조선시대 대표적인 기생을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 없이 황진이를 꼽을 것이다.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 진사(進士)의 서녀로 개성(송도)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었고 시(詩), 글씨(書), 가무(歌舞)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자색이 곱기로 더욱 유명했다.
황진이가 기생의 길로 접어든 계기라면 15세 무렵의 일로 옆집 총각이 자신을 연모해 상사병을 얻어 죽음으로 해서라고 전한다.
당대의 유명한 문인과 이름 있고 덕망 높은 선비(碩儒)들과 일류 명사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詩才)와 자색으로 그들을 유혹하고 정을 통했다는 황진이의 얘기는 일화별로 조선 중· 후기의 문헌과 야사를 통해 덧붙여지거나 각색되어 전해지고 있다.
황진이는 어떻게 그 많은 남성들과 정을 통하면서도 자식을 생산하지 않았을까?
그 비밀은 기생들만의 독특한 피임법에 있었다.
기생들은 보통 배란기를 계산해 가임기간을 피해 관계를 가졌으며 또 체외사정 같은 방법을 썼는데 요즘처럼 실패율이 높았으며 대부분의 남성들은 체외사정하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좀 더 적극적인 피임법으로는 고운 창호지를 말아 질 안에 넣고 자궁의 입구를 막아 정자가 들어가는 것을 방해했다고도 하며, 비단을 여성의 생식기에 대어 임신을 막았다는 얘기도 문헌과 야사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교의 근본사상 아래 개국한 조선은 남자를 중요시 여기던 성리학의 영향으로 남존여비 사상과 삼종의 도라 하여 여성은 혼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혼인을 하면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따르라는 악습에 철저히 천대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시기에 더욱 천대받는 서녀로 태어나 글을 깨우쳤고 남성 못지않은 뛰어난 문장을 지녔던 황진이는 그 멸시와 천대를 일삼는 남성들을 자신의 일탈을 통해 치마폭에서 비웃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조선 영조 때의 무신 구수훈의 ‘이순록’(二旬錄)에 수록된 황진이의 일화를 소개하자면, 황진이가 당시의 3대 인물이었던 율곡 이이 (사임당 신씨의 아들로 조선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로 아홉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이라고 불림), 송강 정철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뛰어난 시인으로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 서애 유성룡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임진왜란 시 군무를 총괄)을 밤의 잠자리를 가지고 평하면서 율곡은 진정한 성인이고, 송강은 군자이며, 서애는 소인이라 했는데, 그 이유는 이랬다.
율곡이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는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의주로 향하면서 개성에 며칠 머물게 되어 황진이를 불렀다.
율곡은 황진이를 가까이하며 가무와 문장에 대해 얘기하고 차와 식사도 함께 하면서 다정하게 대했다.
저녁이 되어 황진이가 물러가겠다고 하니 율곡이 붙잡았다. 황진이는 잠자리를 함께 할 것 같아 기뻐했는데, 밤이 깊어가니 “내 너 같은 명물을 그
냥 돌려보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먼 여정에 피로가 심해 그러니, 이 밤은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고 율곡이 말했다.
황진이는 못내 아쉬웠지만 내일을 기약하며 집으로 돌아갔고 다음날 다시 찾아오니 어제와 같이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여러 날을 같이 지내며 갖가지 방법으로 율곡을 유혹해 보았으나 끝내 흐트러지지 않았으니, 율곡은 황진이의 몸을 탐한 것이 아니라 그 재능을 사랑하고 아꼈으니 정말 성인이라는 것이었다.
송강이 중국 명나라 사신으로 가면서 역시 황진이를 불러, 술잔을 기울이며 보일 듯 말듯 드러나는 자태에 넋을 잃고 선녀 같은 가무를 즐기다 여흥
에 취해 ‘장진주사’(將進酒辭)라는 사설시조 한수를 읊으니 황진이의 마음이 동했다.
한 잔 먹새 그려 또 한 잔 먹새 그려,
꽃을 꺾어 술잔 수를 헤아리며 한없이 먹새 그려,
이 몸이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여 꽁꽁 묶여 매여가나,
곱게 꾸민 꽃상여를 타고 만인이 울며불며 따라가나,
억새풀, 속새풀, 떡갈나무, 버드나무가 우거진 숲에 가면,
누런 해와 흰 달이 뜨고, 가랑비와 함박눈이 내리며,
회오리바람이 불 때 그 누가 한 잔 먹자 하겠는가?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가 놀러와 휘파람을 불 때,
지난날을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밤이 깊어 황진이가 돌아갈까 여쭈니, 송강이 호탕하게 웃으며
“내 너 같은 명물과 환애하지 않으면 어찌 되겠느냐?” 말하며 송강이 분명하게 천침(薦枕 : 첩이나 시녀 등이 잠자리를 모심)할 것을 명해 동침했고,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또한 그렇게 환애했다.
이는 남자의 정상적인 처사로서 분명한 그 처분(處分)이 정말 군자에 해당한다고 했다.
서애 또한 중국 사신 길에 황진이를 불러 다정하게 대하기에, 황진이는 천침을 명하는 줄 알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밤이 깊어가니 뜬금없이 나가라고 명령하는 것이 분명 율곡과 진배없는 성인이다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한밤중에 부하를 시켜 몰래 들어오라 해 동침할 것을 요구하니 황진이가 싫다고 거절했다.
서애는 애원하고 달래 황진이와의 호합을 이루고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 새벽에 일찍 나가라고 명했고, 황진이는 어처구니없어하며 나왔다. 이 일은 명쾌하지 못한 처사이며 대장부답지 못하다하여 서애는 소인이라는 평가였다.
밤에 잠자리를 가지고 당대 인물들에 대해 각기 다른 평가를 내렸는데, 이 설화는 세 사람의 출생연대와 황진이의 활동연대를 비교하면 이는 후대의 사람들이 이이는 높이고 유성룡을 폄훼하려는 의도로 허구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황진이라는 걸출한 명기를 내세워 설화의 신빙성을 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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