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화드럼속의 알몸 시체Ⅲ
그는 입대하자마자 바리에보 공방전에 참가했다. 바리에보 공방전은 4개월이나 계속된 치열한 전투였다.
그러나 헝가리 보병연대가 패배하여 베라스키는 세르비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로자 디오시가 베라스키의 편지를 받은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헝가리의 보병연대는 헝가리 조셉 대공의 사열을 받고 있는 베라스키의 사진을 게자 경감에게 보내왔다.
수많은 병사들과 함께 사진에 찍힌 베라스키는 확실히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게자 경감은 베라스키의 사진을 확대하여 부다페스트의 모든 사창가에 뿌렸다. 베라스키의 희미한 사진을 알아보는 매춘부들은 의외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 놈은 천하의 호색한이었군.’
게자 경감은 혀를 찼다. 매춘부들은 한결 같이 베라스키를 멋진 남자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돈을 물 쓰듯이 뿌렸으며 섹스에도 강했다고 매춘부
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레스토랑의 웨이터들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부인들과 식사를 했으며 식사비를 여자들이 냈다고 진술했다.
‘놈은 구혼광고를 내어 여자들을 유혹하여 살해한 뒤에 돈을 빼앗고 그 돈으로 사창가의 여자들을 샀어. 이 정도로 돈을 뿌렸으면 희생자가 더 있을지도 몰라.’
게자 경감은 대장장이 이스토반의 집 정원을 굴삭기로 파헤쳤다. 게자 경감의 예상대로였다. 이스토반이 새로 산 집 정원에서 알몸의 여자 시체 다섯 구가 다시 발견되었다. 베라스키는 여자들을 죽여서 암매장을 한 것이다.
게자 경감은 수사를 확대했다. 헝가리 육군성을 통한 조사도 다시 시작했다.
그 결과 헝가리 육군 야전병원에서 베라스키를 보았다는 목격자가 나타났다.
게자 경감은 육군 야전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는 아름다운 금발머리와 푸른 눈을 갖고 있었어요.”
야전병원의 간호사가 말했다.
“그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병원에 없어요.”
“그럼 퇴원했습니까?”
“퇴원한 것이 아니라 열병으로 죽었어요.”
간호사의 말에 게자 경감은 실망했다.
“시체는 어디에 묻었습니까?”
“열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화장을 했어요.”
게자 경감은 허탈했다. 희대의 섹스 살인마가 열병으로 죽다니. 게자 경감은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게자 경감은 육군 야전병원에서 퇴원한 병사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때 마카베라는 병사가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금발머리였고 푸른 눈을 갖고 있었다. 베라스키의 인상착의와 일치하고 있었다.
‘베라스키가 마카베로 변신한 것이 틀림없어.’
게자 경감은 바짝 긴장했다. 그는 전 경찰력을 동원하여 마카베를 추적하기 시작했으나 끝내 마카베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1919년 마카베로 변신한 베라스키를 부다페스트에서 보았다는 목격자가 나타났다. 게자 경감은 또 다시 수사력을 총동원하여 부다페스트를 이 잡
듯이 뒤졌다.
그러나 마카베를 찾는 일은 이번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베라스키는 또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1932년에는 미국의 뉴욕에서 베라스키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게자 경감은 뉴욕까지 뒤쫓아 갔다.
그러나 수많은 인종이 모여 살고 있는 뉴욕에서 베라스키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잔인한 살인마를 하늘이 용서해 준다는 말인가?’
뉴욕에서 돌아오는 배 안에서 게자 경감은 슬픔을 감출 수가 없었다.
<끝>
제 3 화오대양사건Ⅰ
사이비 종교는 인간의 여린 심성을 파고든다.
인간이 병이나 가난으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영생과 부를 약속하여 신도들을 끌어 모은다.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존재는 미약해지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초자연적인 현상에 의지하게 되는데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여린 심성을 이용한다.
1987년 8월29일 토요일, 88올림픽을 1년 앞두고 가을을 재촉하는 늦여름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경기도 용인군 남서면 북리 (주) 오대양 용인공장에서 남녀 시체 32구가 발견되어 전 국민을 경악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대양 용인공장의 공장장 이경수는 공장의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살해 있었고 오대양의 사장이자 세칭 오대양교의 교주로 알려진 박신자를 비롯하여 31구의 시체는 식당과 탈의실 천장 바닥에서 목을 맨 채 손발이 묶인 채 누워 있거나 2, 3구씩 포개진 상태로 죽어 있었다.
이들의 손발을 묶은 것은 바지나 스커트를 가늘고 길게 자른 천조각이었고 목을 맨 것은 노끈이었다.
경찰은 8월29일 오후부터 수원지검의 지휘를 받으며 수사에 들어갔다.
경찰이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현장 감식. 감식반을 비롯해 강력계 형사들이 사진 촬영을 하면서 지문을 떠 신원을 확인하는 일부터 수사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32구 시체의 신원이 전부 확인되었다.
치안본부에서 유능한 감식반이 파견되었고 경기도경, 용인경찰서의 베테랑 형사들이 대대적으로 투입되었다.
이날은 아침부터 억센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는데 밤이 되자 폭우로 변해 현장 주변을 더욱 음산하게 했다.
마치 세상에 종말이 온 듯한 기분이었다. 치안본부 감식계장은 현장을 통제하고 즉각 감식에 들어갔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치안본부 감식계장은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종말이 온 듯한 으스스한 기분을 느꼈다.
경찰 감식 업무만 수십 년 동안 해왔으나 이토록 많은 시체가 한꺼번에 죽은 것을 본 일이 없었다.
‘외상은 없잖아?’
시체는 한결 같이 노끈으로 목이 졸려 살해되어 있었으나 기이하게 반항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독약에 의한 살인의 증상도 보이지 않았다.
32구의 시체는 식당천장에 19구, 탈의실 천장에 13구 등 두 군데로 나뉘어 있었다.
대부분은 외상이 없이 반듯이 누워 있었으나 박씨등 2∼3명은 머리등에 타박상을 입었고 공장장 이경수만 목을 매어 숨져있었다.
손·발은 거의 다 헝겊과 옷가지로 묶여 있었고 목이 노끈으로 졸린 상태였으며 내의나 잠옷차림인 채 입과 코는 휴지로 막혔으며 주변에는 피를 닦
아낸 휴지가 널려 있었다.
입구 쪽에는 항히스타민 약병 5개와 신경안정제로 보이는 알약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세칭 오대양교의 교주이자 (주)오대양 사장 박신자.
그녀는 당시 48세로 많은 사채를 끌어들여 공장을 설립하고 종말론으로 신도들을 현혹했다.
‘세상이 말세가 되었는데 오대양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전 세계 오대양은 내가 주관한다’ ‘오대양을 떠나면 죽음의 재앙을 받는다’라고 설파하여
신도들이 자신을 하느님처럼 숭배하게 만들었다.
박신자는 오대양의 신도들을 집단으로 합숙생활을 하게 했으며 배신자는 가혹하게 린치를 가하는 등 강력한 카리스마로 신도들 위에 군림했다.
1987년 8월16일 주유소를 경영하는 이상열(가명)이 박신자에게 빌려준 5억원을 받으러 갔다가 오대양 직원들에 11시간 동안이나 감금을 당하면서 돈을 포기하라는 각서를 강요당한 뒤에 풀어준 사건이 발생했다.
이상열은 즉시 경찰에 신고하여 이상열을 폭행한 오대양 직원 13명을 구속했고 박신자를 참고인 자격으로 불렀으나 조사를 받는 도중 박신자가 실신을 하여 병원으로 옮겼으나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오대양에서 근무하는 직원과 학생, 유아원생 등 100여 명도 종적을 감추었다. 이때 박신자가 경찰의 조사를 받는다는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박신자에게 돈을 꾸어주었다는 사람들이 속속 나타나 채권자가 수십 명에 이르렀고 채권액도 80억원을 넘게 되었다.
이상열의 단순 폭행사건에서 거액 사기사건으로 발전한 것이다.
경찰은 박신자의 행방을 집중적으로 추적하기 시작했다. 8월28일 한 채권자로부터 잠적했던 오대양 사람들이 용인공장에 살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
왔다. 충남 경찰은 용인 오대양 공장을 기습하여 어린이 19명 등 49명을 발견하여 대전으로 데리고 왔으나 천장에 숨어 있던 박신자 등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사건의 미스터리는 여기에 있다.
오대양 공장을 기습한 경찰이 천장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박신자 등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박신자를 비롯한 31구의 시체가 외부에서 옮겨졌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오대양 공장 주위에서 밤새 차가 드나들어 시체를 옮겼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용인 공장에서 발견된 시체들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져 치밀하게 부검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독극물 등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시체들에서 발견된 것은 히드라민이라는 약물을 복용한 것으로 드러났을 뿐이었다.
경찰은 박신자가 죽은 뒤에 오대양의 공장장 이경수와 박신자의 두 아들(24세, 22세)이 신도들에게 히드라민을 복용하게 하여 가사상태에 빠지자 차례로 이들을 살해한 뒤에 자신들은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목을 맨 상처가 가장 깊었기 때문에 대들보에 목을 매었다고 보는 것이다.
오대양의 공장장 이경수는 이들의 시체를 천장으로 옮긴 뒤에 자신은 대들보에 목을 맨 것으로 추정했다.
오대양 사건은 미스터리다. 어쩌면 건국이래 가장 큰 미스터리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31명의 추종자들이 사장, 또는 교주의 지시로 자살, 또는 자살에 동의했다는 것은 한국판 ‘인민사원’ 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신흥 유사 종교의 맹목적인 광기가 빚어낸 이 사건은 신흥종교의 천국으로 불리는 우리나라의 사회풍토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70년대까지는 이러한 사이비 종교는 농촌이나 산골이 주무대였으나 80년대 들어서는 대도시에 집중되었다.
사이비 종교 교리의 특징은 ‘말세가 도래하니 나를 따라야 영생을 얻는다’로 귀결된다.
현실이 고달프고 무지한 하층민들은 이러한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신도들이 된다.
사이비 종교의 또 하나 특징은 성의 문란이다. 백백교 사건에서 보듯이 수많은 여신도들이 간음을 당하고 집단 최면에 의해서거나 기독교계 신흥
종교의 피가름 교리처럼 교리자체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70년대 일월산기도원 교주는 100여 명의 여신도와 간음을 했고, 용화교주 서백일은 ‘구원을 받으려면 딸을 바치라’고 하면서 간음을 일삼다가 피살
되기도 했다.
칠사도의 교주 예성실은 집단 나체 예배를 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끝>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