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 풍속사 <제7화>
조선 성 풍속사 <제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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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03-22 10:39
  • 승인 2007.03.22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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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과 함께 막혀버린 향봉(香峯)약수

조선후기 편자 미상의 ‘고금소총(古今笑叢)’에 실린 11종의 소화집(笑話集) 가운데 열 번째 편에 해당하는 저자와 저작연대미상의 ‘기문(奇聞)’의 66편의 얘기 중 ‘군시양의(君是良醫)’란 제목의 야담을 소개하기에 앞서 조선시대 의술에 대해 알아 본다.

김두종(金斗鍾, 1896~1988)의 ‘한국의학사’에 ‘지방의료기관’이란 항목이 있기는 했고, 태조 이성계에서 태종에 이르는 기간 동안은 지방에 의원, 혹은 의학원을 두고 의원을 파견했다고 하지만, 이 기관들은 뒷날 종적이 묘연하다고 한다.

조선시대 의료기관으로는 궁중에 임금의 약을 조제하는 내의원(內醫院)이란 곳과 대궐 내에 필요한 약재를 공급하거나 약재의 하사를 관장하는 전의감(典醫監)이란 왕실에 속한 의약기관이 있었다.

이 기관의 의료 혜택을 볼 수 있는 대상은 왕과 왕비, 세자, 왕실가족이나 고위관료들이었고, 일반 백성들의 치료는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란 곳에서 담당하였는데, 혜민서는 병을 치료할 능력이 없는 일반 서민의 질병을 구료하는 기관이었고, 활인서는 무의탁 병자를 수용하고 전염병이 돌 때 임시로 병막(病幕)을 지어 환자의 간호를 담당하고 환자가 죽으면 묻어주는 일을 담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의료기관은 한양에 집중돼 있었고 지방에는 이런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방의 백성들은 작은 약방에 의지하거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무속신앙과 오랜 경험으로 얻은 노파들의 민간요법에 의존하여야 했다.

어떤 젊은 과부가 강원도 강릉의 기생 매월(梅月)과 집이 붙어 있어 이웃하며 살고 있었다.

매월은 그 자색과 뭇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이는 화려한 가무솜씨로 이름이 높아 일대의 재사(才士)와 사대부 공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한낮이었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매월의 집이 너무도 고요하여 과부는 이상타 여기고 장독대를 정리하는 척하며 매월의 집을 넘겨다 보았다.

마침 매월이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뽀얀 속살의 미소년과 가는 허리를 껴안은 채 호합을 하고 있었다.

과부는 혹시라도 들킬세라 큰 장독 뒤에 몸을 숨기고, 매월과 미소년의 여러 가지 자세의 음희행위를 지켜보았다.

매월의 사내를 홀리는 갖가지 교태와 미소년의 음탕한 짓거리에 과부의 손은 어느덧 자신의 은밀한 그곳을 더듬고 있었다.

콧속을 흐르는 공기는 뜨겁고 불규칙하게 들락거렸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신음은 점점 거칠어졌으며, 하문(下門)을 만지작거리는 손놀림은
더욱 빨라졌다.

하지만, 오래도록 진 맛을 맛보지 못한 과부인지라 몸뚱이는 불덩이처럼 달구어졌고, 여체의 계곡 향봉의 약수는 넘쳐나야 마땅한데, 가뭄을 맞은 듯 말라갔으며,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던 신음도 외마디 소리와 함께 뚝 끊어져 말문조차 막혀버리고 말았다.

과부는 사타구니를 파르르 떨며 장독대에 덜컥 주저앉아 근육이 굳어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고, 말이 나오지도 않아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때마침 이웃에 사는 노파가 찾아와 장독대에 쓰러져있는 과부를 발견하고는 달려가 그 연유를 물으니, 과부는 목멘 듯이 거친 숨소리만 내뱉을 뿐 아무런 말도 못하는 것이었다.

노파는 무슨 곡절이 있음을 직감하고는 종이와 붓을 가져와 과부에게 주었다.

과부는 제대로 가눌 수 없는 팔로 사력을 다해 그 간에 있었던 일을 대강 적어 노파에게 보이니, 노파는 크게 웃으며 “상말에 이르기를 그것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병은 그것으로써 고치는 방법밖에 없소. 이 병엔 건강한 사내를 맞이하여 치료하는 것이 가장 빠를 것이오”하고 노파가 말하자, 과부는 머리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그럼, 이렇게 계속 있으시구려”하고 말하며 발길을 돌리려는 노파를 과부가 붙잡았다.

노파는 빙그레 웃으며 조금만 기다리라 하고는 과부의 집을 나섰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리니, 이웃에 사는 노총각이 헐레벌떡 뛰어와 장독대에 쓰러져 있던 과부를 번쩍 안아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노총각은 과부의 옷을 모두 벗기고 자신도 발가숭이가 되어 듬직한 물건을 과부의 사타구니부터 조심스레 문지르며 아래둔덕 언저리로 나아갔다.
과부는 몸이 점점 느른해지는 것을 느꼈고, 자신의 의지로 가눌 수 있게 된 두 다리를 움직여 노총각의 허리에 감았다.

노총각은 노파의 귀띔에 따라 일순간 힘을 몰아 한꺼번에 충격을 가하니, 과부의 막혔던 말문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터져 나왔고, 향봉의 약수는 봇물 터지듯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어어 무엇이 이렇게 쏟아지는가?”

노총각이 과부에게 물었다.

“향봉의 약수라고 하옵니다.”

노총각의 질문에 과부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향봉이라는 뒷산 골짜기의 약수가 떠올라 냉큼 대답했다.

과부는 노총각과 호합을 이루며 흥이 올라, 매월에게 배웠던 온갖 교태를 부리니 노총각의 절구질은 신명이 넘치고 향봉의 약수는 시내처럼 흘러넘쳤다.

그렇게 수차례를 호합하니, 과부의 병은 씻은 듯이 낫고 노총각은 자신의 오랜 숙원을 풀었던지라 너무나도 행복했다.

과부는 노총각의 품에 안기며, “당신이야말로 참된 양의(良醫)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노총각은 과부에게 매일같이 이렇게 호합하며 함께 살지 않겠는가라고 물으니, 과부는 크게 기뻐했다.

과부와 노총각은 결혼해 살며 많은 자식을 두었고, 자신들을 맺어준 노파가 영면하는 그 순간까지 제 부모를 모시듯 돌보았다고 한다.

이 조선후기의 설화는 지극히 남성들의 관점에서 바라본 과부의 성적 심리를 표현한 것으로, 남편 없는 과부들은 성적 발산이 없어 신진대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남성들의 그릇된 심리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부당하다 할 수 있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남성들은 여성과의 호합에서 오로지 자신만이 상대여성을 흡족하게 해 줄 수 있다고 하는 자기도취와 자기과시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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