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 풍속사 <제9화>
조선 성 풍속사 <제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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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04-05 14:22
  • 승인 2007.04.05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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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악의 왕실 스캔들 세자빈의 동성애인(同性愛人)


조선은 유교의 근간아래 탄생한 국가로서 유교적인 이념상, 여성의 정조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고, 여성이 정조를 잃거나, 지나치게 음탕하거나, 남편의 문란한 성생활에 말이 많거나, 행여 남편이 첩실을 두었는데 부인이 투기만 하여도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 하여 부인을 내칠 수 있었다. 이러한 남성우월적인 폐단을 막기 위한 조치로 칠출삼불거(七出三不去)라 하여 내쫓지 못할 3가지 경우가 있었으니, 보내도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으면 내쫓지 못하고(有所取無所歸不去), 함께 부모의 3년상을 치렀으면 내쫓지 못하며(與共更三年喪不去), 전에 가난하였다가 부자가 된 후에는 내쫓지 못한다(前貧賤後富貴不去)라 정하여 비록 칠거를 범하였다할지라도 삼불거에 해당되면 부인을 내쫓을 수 없도록 국법으로 정하
였고 만약 이 법을 어기는 남성은 엄한 처벌을 받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남성들은 아무리 어여쁜 부인이나 애인(첩)일지라도 한번 마음이 떠나게 되면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그 여인네와는 쉽게 살을 맞대려 하지 않는 것이 남성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렇다면 동짓달 기나긴 밤처럼 길게만 느껴졌을 무수한 밤들을 청상과부처럼 홀로 지새워야하는 조선의 여성들은 어떻게 자신의 끓어오르는 애욕을 달래어 왔을까? 전래동화처럼 시어머니와 머리를 맞대고 이불을 누비며 대바늘로 자신의 허벅지를 사정없이 찔러대고 있었을까. 지금의 여성들처럼 조선의 여성들 또한 애욕을 주체할 수 없을 때면 여러 가지 방편을 찾고자 했다. 자위는 말할 것도 없고 외간남자와의 비밀스런 로맨스는 물론이고 동성 간의 애정행각은 옵션이었다. 여성들의 동성연애라! 실로 음탕함과 외설스러움이 극에 달하지 않는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세자빈의 충격적인 동성연애사건이 있어 소개하고자하며 그 사건은 세종실록 영인본 4책 36면에 기록된 문종의 두 번째 세자빈 봉씨(奉氏)의 폐출일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였다.

세종대왕 재위 시, 왕세자였던 문종대왕의 두 번에 걸친 폐세자빈 사건이 있었는데, 첫 번째 사건은 지나친 투기심과 문종을 유혹하기 위해 요상한 방법(남자가 좋아하는 여인의 신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들고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내가 사랑을 받게 되고 저쪽 여인은 멀어져서 배척을 받는다는 술법과, 교합중인 뱀이 흘린 정기(精氣)를 수건으로 닦아 자신의 음부에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는 민간의 그릇된 술법)을 문종과 자신에게 행하여 왕실의 물의를 일으킨 휘빈 김씨를 세자빈 자리에서 폐하는 사건이었고, 이러한 전철을 다시 밟지 않으려 세종과 소헌왕후는 세자빈 간택에 신중을 기하며 우락부락했던 휘빈 김씨와는 정반대인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 봉여(奉礪)의 여식으로 가녀린 체구의 청순한 순빈 봉씨를 간택하였다.

문종 또한 휘빈 김씨와의 불상사를 거울삼아 순빈에게 애정을 다하리라 다짐했는데, 혼례를 치르고 난 뒤, 순빈은 겉보기와는 달리 하루가 멀다하며 밤이면 밤마다 세자에게 달려드는 색기 충만한 여자였다. 빈궁의 일을 도맡아하던 세자의 유모가 죽자 소헌왕후는 고미(古未)란 이름의 늙은 궁궐 여종으로 하여금 빈궁의 일을 대신 맡게 했는데, 순빈이 밤마다 고미를 불러 말하기를, ‘할미는 어찌 내 뜻을 알지 못하오’하며, 이 노파로 하여금 세자를 불러오도록 했다. 부부의 호합도 쉬어가며 해야지 매일 같이 되풀이한다면 이 세상의 어떤 남성이 견딜 수 있겠는가. 세자 또한 밤이 무서워 순빈을 피하게 되었고 여러 해 동안 순빈과 잠자리를 멀리하자 왕실의 후사가 걱정이었던 세종과 소헌왕후는 명문가의 덕 있는 규수를 잘 골라 뽑아, 후사 잇는 길을 넓히도록 세 사람 권씨, 홍씨, 정씨를 승휘(承徽:세자궁에 딸린 종사품 내명부의 품계)로 뽑아 들였는데, 순빈의 성질이 시기심이 강하고 질투함이 심하여서, 처음에는 사랑을 독차지 못한 일로 오랫동안 원망과 앙심을 품고 있다가, 권 승휘가 임신을 하게 되자, 순빈은 더욱 분개하고 원망하여 항상 궁인에게 말하기를, ‘권 승휘가 아들을 두게 되면 우리들은 쫓겨나야 할 거야’하였고, 때로는 소리 높여 울기도 하니, 그 소리가 궁중에까지 들리었다.

이 날 이후 순빈은 밤이면 항상 궁궐여종에게 자신이 직접 지었거나 예부터 전해오던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했고, 세자가 자신을 찾지 않음을 한탄하며 술로 밤을 지새우기가 일쑤였다. 몇 달이 흐른 후 궁중의 나인들 사이에서는 쉬쉬하며 해괴한 소문이 돌았는데, ‘순빈께서 궁궐의 여종 소쌍(召雙)이란 사람을 사랑하여 항상 그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 한다’는 소문이었다. 이 소문을 우연히 듣게 된 세자가 어느 날 궁궐 안을 청소하던 소쌍을 보고 갑자기 묻기를 ‘네가 정말 빈과 같이 잠자리를 하느냐?’하니, 소쌍이 ‘그…그러하옵니다’라고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세자가 아무런 조치 없이 넘기자, 순빈은 더욱 기고만장하여 소쌍을 늘 곁에 두었고 잠시라도 소쌍이 자리를 비우면 원망하고 화를 내며 말하기를 ‘나는 비록 너를 매우 사랑하나, 너는 그다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하며 책망하였고, 소쌍은 순빈과의 관계가 깊어갈수록 두려움을 느끼며 다른 나인에게 말하기를 ‘빈께서 나를 사랑하기를 보통보다 매우 다르게 하므로, 나는 매우 두렵고 무섭다’하였다. 소쌍이 또 권 승휘의 사비 단지(端之)와 서로 좋아하여 함께 자기도 하였는데, 순빈이 사비 석가이(石加伊)를 시켜 항상 미행하게 하여 단지와 함께 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소쌍과 단지가 동궁 후원에서 싸움을 하여, 소헌왕후가 그 자초지종을 물으니, 순빈의 음행이 드러나 세종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세종과 소헌왕후가 소쌍을 불러 그 진상을 물으니,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 있었습니다. 빈께서 제게 같이 동침하기를 요구하자 저는 이를 극구 사양하였으나, 빈께서 윽박지르시며 몰아붙여 소인은 마지못해 옷을 반쯤 벗고 병풍 뒤로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벗기시고 강제로 눕게 하여 남자와 교합하는 자세로 서로의 손과 도구로 희롱하였습니다”라며 소쌍이 상세히 아뢰었다.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한 세종이 순빈을 불러 사실을 다시 물으니, 순빈이 대답하기를,

“소쌍이 단지와 늘 함께 붙어 다니며 항상 사랑하고 좋아하여, 밤에는 함께 잘 뿐 아니라 낮에도 서로의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았습니다. 이것은 곧 저들의 짓이며 저는 처음부터 동숙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고 변명했다.

“빈은 어떻게 그렇게도 잘 아는가, 그 일을 보고 부러워하게 되면 반드시 이를 하게 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거늘, 빈은 과인을 기만하려드는 것인가”하며 세종이 꾸짖듯 추궁하자 그때서야 순빈은 울음을 터뜨리며 모든 사실을 자복하였다. 결국 순빈은 폐서인되어 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시대 최악의 왕실 스캔들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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