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없다 <제2회>
코끼리는 없다 <제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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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04-24 10:16
  • 승인 2007.04.24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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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강물아, 강물아

#접점

“일은 틀림없이 처리하겠지?”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고개를 끄덕거리며 김 국진 이사는 황 회장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뒤가 깨끗해야 해. 공연히 잘못해서 망신살 뻗치면 아니 함 만도 못해.”

“그런 일에는 원체 경험이 많은 놈이니까 알아서 잘 처리할 겁니다.”

김 국진 이사는 강 승길을 떠올렸다. 일만 잘 되면 골프장 건설 공사를 맡기겠다는 말에 침을 흘리며 달려들던 그의 웃음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래도 태진개발 황 회장은 미심쩍었다. 까딱 잘못하면 국회의사당 입성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개망신을 당하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의 주름살 잡힌 미간은 좀체 펴지지 않았다. 혹을 떼려다가 오히려 혹을 하나 더 붙이는 경우는 없을까. 그래서 그는 혹시라도 생길지 모를 뒤탈을 준비하여 자신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김 국진 이사에게 다시 한 번 강다짐을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무튼 아이는 안 돼.”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라도 그걸 미끼로 달라붙으면 그땐 정말 처치 곤란 아닌가 말이야. 내 얼굴이 구겨지는 것은 물론이고……. 내 말 알아듣겠지?”

“그럼요, 회장님. 회장님의 체면에 금이 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죽이지는 마. 그렇다고 병신을 만들어서도 안 돼. 그냥 말로 살살 달래서 해결하도록 해. 뒷돈은 내가 충분히 줄 테니까.”

황 회장은 한숨을 길게 토해내며 김 이사를 넌지시 내려다보았다. 이쯤 해두면 뒷날 일이 혹시 잘못되더라도 면피를 할 수 있는 길은 열어놓은 셈이었다. 굳은 자세로 소파에 앉아 하명을 기다리고 있는 그가 그 정도로 말했으면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 지는 벌써 알아차렸을 것이었다.

“입은 무거운 자인가?”

“그럼요! 걱정 마십시오. 자기도 구린 데가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그 일이란 이젠 시위를 떠난 화살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염 은옥. 황 회장은 비로소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이었다.


#생대구탕

간밤에 또 꿈을 꾼 모양이었다. 식탁에 마주 앉은 은옥이가 듣는 둥 마는 둥 하여도 어머니는 개의치 않고 침을 튕겨가며 꿈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너와 내가 누군가에게 쫓겨 도망을 가는 거야. 한참동안 헤매면서 뛰어다녔어. 이유는 몰라. 아무튼 그렇게 글쎄, 한참동안 허둥지둥 도망을 가다보니까 앞에 큰 강이 가로놓여 있는 거지 뭐겠니. 소름이 끼쳐, 지금도, 그 강물. 시퍼런 강물이 깊기도 깊지만, 또 물살이 엄청 빨리 흘러가는 거야. 우리가 도무지 건너갈 수 없을 만큼. 큰 일이 났지 뭐겠니, 뒤에서는 우리를 잡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쫓아오는 판국인데……. 정말 꼼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에 빠져버렸어. 그래서 마침내 내가 단안을 내렸지. ‘은옥아,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그리곤 그냥 두 눈 꼭 감고, 둘이서 손 붙잡고 뛰어내려버렸지, 뭐. 아, 하나님 아버지.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우리가 강물에 가라앉질 않는 거지 뭐겠니? 그냥 두둥실 뜬
채 물살 따라 내려가는 거야. 참, 꿈도 요상하지?”

이럴 땐 어머니가 스스로 말을 끝내고 입을 닫을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라는 걸 은옥이는 벌써부터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꿈 이야기를 어디 한두 번 듣는가. 그러나 어머니는 생대구탕이 식는 줄도 모르고 연신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꿈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혹시 황 회장이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너를 찾는 것을 예시하는 꿈은 아닐까?”

어머니가 은옥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꿈 이야기의 끝은 늘 그런 식이었다. 어머니는 아직까지도 황 회장을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은옥이는 어머니에게 숟가락을 쥐어주며 웃고 말았다. 어머니가 기대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가 아는 그는 냉혹하고 이기적이며, 욕심이 끝 간 데 없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잠시 황 회장을 떠올리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주여……. 가슴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은 그 소리는 요즘 들어 그녀가 입버릇처럼 자주 뇌까리는 소리였다.

따지고 보면, 황 회장과의 인연은 처음부터 악연이었다. 그러나 은옥이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황 회장을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었다. 구태여 원망을 하자면 어머니의 말처럼 그것은 자신이었다. 아무리 속았다고는 하지만, 가정이 있는 남자를, 그것도 아버지뻘이나 되는 남자를 사랑했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변명을 하자면 달콤했던 그의 감언이설이 이유가 되겠지만 그녀는 그것도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말처럼 정말 그때 잠시 무엇에 홀린 것일까. 그녀는 그때를 생각할 적마다 지금도 몸서리를 쳐대곤 하였다.

그러나 아이만큼은 황 회장의 마음대로 될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임신이 되었다는 데에는 이의를 달 수 없지만, 아이의 아빠가 낳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버릴 수는 없다는 게 그녀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그것은 생명이었다. 생명을 버린다는 것은 잉태라는 죄악 위에 또 다른 죄악을 덧붙이는 행위로 그것은 스스로 용서할 수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정말 요상한 꿈이었어.”

“밥이나 잡수세요. 딴 생각일랑 마시구…….”

어머니는 그래도 꿈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눈치였다. 대구탕 국물을 훌훌 거리다가도 또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곤 하였다.

그런 어머니이지만, 은옥은 어머니가 곁에 있다는 게 늘 든든하였다. 물론 처음엔 몸을 함부로 굴린 자신을 몹쓸 년이라고 꾸짖었으나, 결국은 아
이를 낳아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에 동조해준 어머니였다. 아암,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구……. 은옥은 그런 어머니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은옥은 자신의 배를 한번 쓰다듬었다. 과식한 탓일까. 임신 칠 개월째로 접어든 배가 유난스레 커진 듯 느껴졌다.

아이도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다른 산모처럼 유별나게 입덧도 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래서 은옥은 아이가 더욱 불쌍하게 느껴지곤 하였다.

이따금 발길질을 할 적에도 힘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할 만큼만 은근히 알리곤 하는 아이의 발길질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애잔하게 만들었다.

식기를 닦다가 주방 바깥으로 문득 눈길을 준 은옥은 아파트 출입문 부근에 피어있던 목련이 어느새 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솜처럼 흰 빛으로 탐스럽게 피었던 꽃잎이 누렇게 바랜 채 땅바닥에 떨어져 주검같이 널브러져 있었다. 누군가 봄은 고양이 걸음처럼 다가왔다가 속절없이 간다더니만,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미용실엔?”

“나갈 거야.”

꿈에 대하여 그녀가 시큰둥해 하자 어머니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봄 햇살이 가로로 길게 누운 집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식사를 마친 어머니가 일어서자 지금까지 발치에 엎드린 채 잠자코 있던 빠삐가 한바탕 짖어댔다. 은옥은 창에서 눈길을 돌렸다. 방으로 들어간 어머니는 지금쯤 다시 성경을 펼쳤으리라. 그리곤 돋보기를 낀 채 새벽에 읽던 다음 구절부터 다시 읽고 계실 것이다.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듣는 순간 황 회장은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했다. 목석연하던 점잖은 티에서 벗어나 그는 지금까지 은옥이가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었던 몰강스러운 면모를 보였다. 당장 병원에 가라는 명령은 만약 그것을 어길 경우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 같은 무서운 데가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그의 본색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돈 때문이지?”

그녀가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도리질을 하자 황 회장은 당장이라도 억지로 끌고 갈 것 같은 기세로 그녀를 압박했다. 아무리 은옥이가 설명을 해도 납득하려고 들지 않았다.

“아니에요. 언제 제가 돈을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나요?”

“그렇다면?”

황 회장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금뺏찌’를 달기 위해서는 사생활이 깨끗해야 한다. 그것은 그가 은옥이를 안을 적마다 항상 우려하고 있던 점이었다.

“이 아이는 나의 잘못으로 잉태되었지만, 우리 마음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 아이는 이 아이대로 태어나 살 권리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으래? 잘났군. 그렇다면, 이 아이로 인해서 파생될 나의 장래는 누가 책임지지?”

“그래도 낳을 거예요.”

은옥은 단호했다.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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