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적인 성욕으로 살인광이 된 데살보
비정상적인 성욕으로 살인광이 된 데살보
  •  
  • 입력 2007-04-25 10:59
  • 승인 2007.04.25 10: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매스컴은 연일 찢어 죽이는 잭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헨리 경감은 전담 수사반을 편성했다. 그들은 의사나, 한때 외과의사로 해부를 한 적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용의자들은 많았으나 결정적인 증거를 찾을 수는 없었다.

화이트채플의 연쇄살인사건은 영국 최대의 살인사건이 되고 말았다. 잭 리퍼는 살인사건을 저지를 때마다 통신사나 경찰에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렸다. 캐서린 애드위즈를 살해한 뒤에는 화이트채플 자경단의 단장 러스크에게 편지와 소포를 보냈다. 소포에는 사라졌던 캐서린 애드위즈의 신장(腎臟)이 들어 있었다.

러스크 단장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살인마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소름이 끼쳤다.

경찰은 더욱 많은 인원을 투입하여 화이트채플을 감시했다.

10월은 조용하게 지나가고 11월9일이 되었다. 이 날은 런던 시장의 취임식이 있는 날이었다. 런던 시는 전날부터 들떠 있었고 여기저기서 축하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낮에는 런던 시장의 축하 행렬이 하운드 티치를 지나갔다. 거리는 밤이 되어도 들떠 있었다. 밤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술에 취해 사창가로 몰려왔다.

매춘부들은 네 번째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공포에 사로잡혀 매춘을 하는 것을 꺼려했으나 여러 날이 지나자 다시 거리에 나가 호객을 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런던에 살고 있는 매춘부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그녀들은 매춘을 했으나 경기가 좋지 않아 굶주리는 것이 일과였다. 살인마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일을 해야했다.

메어리 자네트 켈리는 25세의 매춘부였다. 잭 리퍼에게 살해된 매춘부들이 대부분 중년 여자들이었으나 그녀는 젊고 건강했다. 메어리 켈리는 술을 좋아하여 손님들에게 받는 돈을 모두 술을 사는데 낭비했다. 저축은 없었고 방세는 밀려 있었다. 11월9일 새벽, 그녀는 한 남자를 유혹하여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으나 그는 무일푼의 빈털터리였다. 메어리 켈리는 욕을 퍼붓고 그를 내쫓은 뒤에 다시 거리로 나왔다.

메어리 켈리는 거리에서 서성거리다가 잭 리퍼를 만났다. 잭 리퍼는 금줄이 달린 고급 회중시계를 가슴에 늘어트리고 있었고 수염이 보기 좋게 양쪽 끝으로 말려 올라가 있었다. 상당히 부자이면서 인텔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메어리 켈리는 그를 유혹하기로 했다.

“멋쟁이 신사분이시네. 댁과 연애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메어리 켈리는 눈웃음을 쳤다.

“몇 살이지?”

남자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음침했다.

“스물다섯.”

“이 근처에 방이 있나?”

“네. 저기 도세트가의 10번지에 있어요.”

“같이 갈까?”

“신사분께서 좋다면….”

메어리 켈리는 유쾌하게 웃으며 잭 리퍼의 팔짱을 끼고 그녀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메어리 켈리는 그녀의 방에서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그녀는 매춘부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피부가 곱고 예쁜 여자였다. 잭 리퍼는 여자들을 살해하면서 섹스를 하지 않았으나 그녀만은 예외였다. 메어리 켈리는 희대의 살인마 잭 리퍼와 섹스를 한 뒤에 살해되었다. 시체는 완전히 해부되어 있었다. 가슴과 복부가 갈라지고 모든 내장들이 적출되어 있었다. 마치 해부 연습을 한 듯한 처참한 모습이었다.

영국은 발칵 뒤집혔다. 불과 3개월 만에 발생한 다섯 건의 잔혹한 연쇄살인, 비록 피해자들이 매춘부들이라고 해도 영국 시민들은 분노했다. 매스컴은 연일 무능한 경찰을 비난했다. 그러나 영국을 공포와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연쇄살인사건은 갑자기 뚝 끊겼다.

영국 경찰은 메어리 켈리의 사건에서도 범인을 검거하지 못했다. 범인을 검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영국의 범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많은 추측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자칭 잭 리퍼라고 밝힌 살인마가 검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살인의 동기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살인마에게 살인에의 강렬한 욕망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는 때때로 예측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지는 일이 많다. 성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보스턴의 교살마 알버트 헨리 데살보는 성욕이 지나치게 왕성하여 아내 하나로 만족하지 못하고 닥치는대로 여자들을 강간하다가 살인광이 되었다. 그는 한동안 미국을 공포속에 몰아넣다가 다시 단순한 강간범으로 돌아오는데 그때 그는 2천명에 이르는 여자들을 강간했다고 진술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알버트 헨리 데살보는 비정상적으로 성욕이 왕성한 사내였다. 그의 남성 호르몬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나 부인에게 하루에 5, 6회의 성교를 요구했다. 정상인이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수치였다. 데살보의 부인 일름 가르트 데살보는 남편의 요구를 다 받아줄 수가 없었다. 데살보가 치수 재는 사나이로 변신을 하게 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데살보는 1931년 메사추세츠 주(州) 예르시(市)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해는 사상 최악의 대공황으로 많은 미국인들이 고통을 받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들끓었다. 데살보는 이러한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 가난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데살보의 아버지는 전과가 두 번이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데살보의 어머니를 걸핏하면 구타했고 데살보와 형제들을 때렸다.

‘내가 크면 아버지를 죽일 거야.’

데살보는 아버지를 증오했다. 형제들도 모두 아버지를 미워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은 마침내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폭력전과자였지반 군수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미국은 1천만 명의 청년들이 전쟁터에 끌려 나감으로써 실업자 문제를 해결하게 되어 대공황에서 벗어났다. 전쟁으로 군수산업이 발전하여 생산이 확대되고 고용이 창출되었다. 데살보의 어머니도 군수공장서 일을 하다가 새로운 남자를 만나 아버지와 이혼했다. 데살보는 이 무렵 주거침입죄로 체포되었다. 훔친 물건은 없었다.

“무엇을 훔쳤나?”

“훔치지 않았습니다.”

보안관이 물었을 때 데살보는 고개를 흔들었다. 데살보가 그 집을 침입한 것은 잔디밭에서 한 여자가 일광욕을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왜 침입했지?”

데살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잔디밭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젊은 여자를 보았을 때 갑자기 전율하는 듯한 흥분 상태에 빠진 일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 아이가 물건을 훔치지 못한 것은 우리가 물건을 훔치기 전에 잡았기 때문입니다.”

집주인이 라이플총을 들고 말했다. 데살보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보안관에게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뒤에 소년원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데살보는 6개월의 짧은 형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1948년, 데살보는 17세의 나이로 군대에 자원하여 입대했다. 데살보가 소정의 신병훈련을 마치고 자대를 배치 받은 곳은 독일,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많은 독일 국민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미국은 풍요를 누렸다.

독일 여성들에게 미군 병사들은 한 때 적이었으나 가장 인기 있는 데이트 상대였다. 데살보는 프랑크푸르트가 고향인 독일 처녀 일름 가르트와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데살보는 키가 작았으나 몸집이 단단하여 미군에서 권투 선수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유럽 주둔 미군의 미들급 챔피언을 지냈을 정도로 권투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권투 선수로 대성할 운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군대에 있었기 때문에 프로모터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스스로 프로모터들에게 찾아가지도 않았다.

일름 가르트는 데살보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점령군의 병사인데다가 권투에도 탁월한 기량을 갖고 있었다. 일름 가르트는 그와 즐겨 데이트를 했고 그가 몇 번 만나지 않아서 관계를 요구했을 때도 기꺼이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데살보는 일름 가르트를 만날 때도 성욕이 왕성했다. 데살보는 일름 가르트와 관계를 한 뒤에 항상 다시 요구했다.

“그는 애프터서비스까지 해준다니까.”

일름 가르트는 친구들에게 그의 왕성한 성욕을 자랑했다.

“호호호. 그럼 이태리 종마(種馬)인 모양이구나.”

일름 가르트의 친구들이 까르르 웃어댔다. 일름 가르트는 데살보와 결혼했다. 젊었을 때였기 때문에 데살보가 수시로 관계를 요구해도 언제나
들어줄 수 있었다.

“당신은 아무 데서나 스커트를 들추려고 해. 아무래도 병인가 봐.”

일름 가르트는 데살보에게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데살보는 일름 가르트를 포옹하고 말했다. 일름 가르트는 그럴 때마다 기분좋은 일이라는 듯이 웃었다. 친구들은 그러한 그녀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신혼 때에는 데살보의 요구가 달콤하게 들렸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되자 일름 가르트는 점점 그를 상대하는 것이 벅차게 되었다.

“당신 때문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일름 가르트는 차츰차츰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데살보가 관계를 요구하는 횟수가 점점 많아져 하루 5, 6회에 이르게 되었다. 일름 가르트는
데살보의 요구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데살보가 요구하는 횟수대로 모두 들어주면 일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걷는 것도 힘들었다. 쇼핑을 하러 다닐 때나 이웃의 파티에 참석할 때 어기적거리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데살보는 파티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었다.

데살보는 아내 일름 가르트를 데리고 귀국했다. 그는 제대를 하여 다른 일을 할 생각이었다. 미군 부대 당국이 그에게 제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전쟁 때는 많은 병사들이 필요했으나 전쟁이 끝나자 병사들을 줄여야 했다. 미군 당국은 무작위로 병사들을 제대시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나 제2차 세계대전처럼 많은 병사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데살보는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 아내 일름 가르트와 더욱 트러블이 잦아졌다. 데살보는 욕망을 분출할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아내는 그를 거부할 때가 더 많아서 아내 한 여자에게 욕망을 분출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1955년 1월, 데살보는 포스 딕스라는 마을에서 9세 된 소녀를 강제로 추행했다. 소녀의 어머니는 딸의 불행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경찰에 고발하지 않았다. 데살보는 그러한 짓을 저질렀는데도 체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자들이 강간을 당해도 그 일이 알려질까 봐 쉬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큰 소득이었다. 그러나 소문은 부대 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부대는 그를 형사 고발하는 대신 명예제대를 시켜버렸다.

일름 가르트는 데살보에게 미안했다. 데살보가 9세밖에 되지 않은 소녀를 추행한 것은 자신이 데살보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일름 가르트는 데살보를 적극적으로 받아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1958년 데살보 부부에게 아기가 태어났다. 데살보는 저축한 돈이 없었기 때문에 고통에 시달렸다. 그는 도둑질을 하러 침입했다가 주거침입죄로 체포되었다. 그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아내 일름 가르트와의 관계가 다시 악화되었다. 돈도 벌지 못하고 도둑질이나 하려고 한 데살보가 하루 5, 6회나 관계를 요구하는 것이 일름 가르트에게 고까울리 없었다.

데살보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모든 원인이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내 일름 가르트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것이 모두 돈을 벌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데살보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집행유예로 풀려난 지 한 달 만에 다시 도둑질을 하러 들어갔다가 체포되어 이번에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도둑질에는 도무지 재간이 없었다.

데살보는 어느 날 아기를 안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는 매우 가정적인 남자였다. 그는 아내 일름 가르트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설거지는 언제나 그가 도맡아서 했다. 드라마에서는 한 사내가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양복점에서 사용하는 줄자를 가지고 여자의 치수를 재는 척하면서 몸을 만지고 있었다.

‘그래, 바로 저거야!’

<다음호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