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 풍속사 <제15화>
조선 성 풍속사 <제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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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05-17 13:42
  • 승인 2007.05.17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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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

철저한 신분(계급)사회였던 조선은 양반과 상한(常漢:상놈)의 법적용에도 엄격한 차별을 두었으며, 양반은 지나친 차별과 멸시로 상한 위에 군림했고, 심지어 그들을 종처럼 취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시대는 유교에 바탕을 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회적 신분제도를 통치기반으로 성립된 왕조였기 때문일 것이다.

갑오개혁(1894년)이후 사농공상의 신분제도는 점차 무너졌지만,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돈이면 잘잘못간에 유자(有子)는 쉽게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이 진리 아닌 진리가 되어버려, 지금도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고시촌과 도서관을 전전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마도 뿌리 깊은 계급의식이 우리의 마음을 꼭 붙들어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 신분제도가 법적용에 어떤 영향을 발휘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설화가 있어 소개코자한다.

조선후기 어느 마을에 한 양반이 무더운 여름인지라 사랑채의 마루에 나가 더위를 식힐 때면, 일손을 도우러온 이웃 상한의 아내가 물동이를 이고 봉긋한 젖가슴을 저고리 아래로 살짝 드러내고 늘 그 앞을 지나다녔는데, 스물의 나이로 미색까지 출중한 물오른 여인이었다.

양반이 그 미색에 반해 여러 날을 지켜보며 여인을 친압하고자 하였지만, 적절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아 발만 동동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마루에 나가 여인을 기다리던 양반은 물동이를 이고 오는 여인을 본 순간 동공이 확대되며 입을 쩍 벌리고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어졌다.

물동이에서 흘러넘친 물이 여인의 목선을 타고 여인의 모시저고리를 흠뻑 적셔 뽀얀 어깨의 속살과 탐스런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젖가슴을 출렁이며 다가오는 여인을 보자 양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선발로 내려가 여인의 두 귀를 잡고 입을 쪽하고 맞추었다.

여인은 당황하여 물동이를 땅에 떨어뜨리고 소리치며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 집으로 달려갔다.

여인의 말을 듣고 시어머니와 남편은 양반의 집으로 찾아와 종들과 마을사람들이 보는 와중에 무수히 욕하며 모욕을 주었고 양반은 아무런 대꾸도 않고 그 자리를 피했다.

분을 이기지 못한 여인의 남편이 관가에 이 사실을 고발하니, 관장이 양반과 상한을 불러 신문하게 되었는데, 양반은 “죄를 지었으니 법전에 명시된 대로 벌을 받겠습니다”했다. 관장이 형방을 시켜 대전통편(大典通編)을 가져와 법률을 적용시켜 보라고 명했다.

형방이 법조문을 살펴 처벌 조항을 찾으니, 양반이 여인에게 입맞춘 것은 법률에 나와 있지 않고, 상한이 양반을 모욕하고 욕한 죄만 나와 있는데, 세 차례에 걸쳐 형문(刑問:형장(刑杖)으로 죄인의 정강이를 때리던 형벌)에 처하고 멀리 귀양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대답했다.

관장은 곧 양반을 석방하고 상한에게 한차례 형문한 다음 하옥하라고 판결하자, 상한이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국법의 지엄함을 내세우며 관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반이 집에 돌아와 있으니 상한의 모친이 찾아와 용서를 구하며 아들을 귀양 가지 않게 해 달라고 애원하며 빌었다.

그러나 양반은 판결이 그렇게 났으니 자신도 어찌 할 수 없다고 냉담하게 대답했다.

상한의 모친은 울며 애원하다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부(慈婦)와 부둥켜안고 우는 것밖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녁나절까지 울고 있던 모친이 눈물을 훔치며,

“얘야 네가 한 번 가서 간청해 보는 것이 어떠냐?”라고 물었다.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하던 여인은 어쩔 수 없는 듯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여인이 밤에 양반의 집 사랑채 뜰에 와서 엎드려 남편을 구제해 달라고 애원하니, 양반은 여인을 방으로 불러들였다.

여인이 문을 닫고 조신하게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양반은 여인의 머리를 움켜잡고 입을 맞추었고 여인은 눈을 감고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내 특별히 이번만큼은 구제해 줄 터이니 안심하라”하며 여인을 달래고는 끌어안아 여인의 치마저고리 사이로 손을 넣어 마음껏 희롱하고 여인의 옷을 벗겨 상상만 했던 물오른 나신을 오래도록 감상하고 환애하였다.

양반의 음심은 충족되고 기분은 두둥실 떠 무릉도원에 오르니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었고, 거기다 여인마저 황홀경에 수없이 빠져들며 호합의 흥을 더해가니, 양물(陽物)은 지칠 줄 몰랐고, 흑곡의 음수는 흘러넘쳐 요를 흥건히 적셨으며 그 여흥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일이 끝나고 여인이 흐뭇한 표정으로 방을 나서며, “이렇게 좋은 만남이 어찌 그리 늦었습니까?”하면서 좋아했다.

양반은 그 밤 내내 잠들지 못하고 흐뭇하게 웃었다.

이튿날 양반은 관가에 들어가 관장에게 그 상한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정중히 청하였다.

이에 관장은 빙그레 웃으며, “이제 뜻을 이루셨나보군요?”하고 물었다.

양반이 함박웃음을 머금고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말을 실감하니, 꿈이라도 꾼듯합니다. 그려”하고 대답했다.

관장은 형방을 불러 상한을 석방하였다.

이날이후 여러 해 동안 여인은 양반의 집에 때때로 드나들며 양반과 정을 쌓았다.

이 설화는 성수패설(醒睡稗說)에 실린 얘기로 계급사회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양반이라는 특권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음심을 채우는 조선시대 기득권층을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좋은 만남이 어찌 그리 늦었습니까?’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양반에 의해 쓰인 설화인 듯하다.

설화를 재구성하며 ‘억울하면 출세하라!’라는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도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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