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위에 서다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 권 상사는 불퉁스러운 모습으로 병실에 나타났다. 그러나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누워 있는 차 일만의 몰골을 본 그는 사태를 짐작한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입을 먼저 연 사람은 차 일만이었다.
“‘빳따’가 ‘하우스’를 ‘깨방’ 쳤다구?”
‘빳따’는 차 일만의 친구였다. 한때는 차 일만과 더불어 영등포 ‘로타리파’의 쌍날개 노릇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차 일만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쩐’에 약했다. ‘쩐’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덤벼드는 성미였다. 그 덕분에 지금은 이 바닥에서 나이트 업소를 하나 소유했을 정도로 제법 성공한 측에 끼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서교동 사건으로 함께 ‘학교’에 다녀온 뒤 몇 년 동안 지금은 서로 소원한 채 이따금 소식이나 전하면서 데면데면하게 지내고 있는 처지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아우라는 것을 이 바닥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권 상사의 ‘하우스’를 ‘개박살’냈다는 것은 권 상사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노골적으로 깔아뭉갠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가 아닌가. 그것은 바야흐로 선전포고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참에 두 사람의 이름 석 자를 이 바닥에서 없애버리겠다는 흑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견적을 낼 수 없을 지경이에유.”
권 상사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이들’ 서너 명을 데리고 나타난 ‘빳따’는 작심을 하고 온 듯 게임장은 물론이고, 일꾼들의 숙소, 대기실, 주방까지 ‘아작’을 내었다는 것이었다. 이유가 뭐냐고 묻는 권 상사에게 그는 “네가 모시고 있는 깜씨에게 물어봐” 하고는 돌아갔다고 했다.
“그 형님 승질 잘 아시잖유. 좇 같다는 거…….”
염 은옥은 역시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권 상사가 머뭇거리는 눈치를 보이자 곧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제 와서 보니께, ‘째보’가 내 ‘하우스’를 엿 먹이던 것두 다 이유가 있었시유. 본래 그 짜아식이 영등포 시절부텀 ‘빳따 형’하구는 ‘아삼육’이었잖유.”
차 일만은 창문 밖으로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빳따’까지 가담했다면……. 그렇다면 ‘쩐’ 많은 강 승길과 ‘짝짜꿍’이 되었을 터이고, 그 뒤는 외통수였다. 그리고 그 외통수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란 없었다. 이제는 오직 한 길뿐이었다. 그 한 길을 그는 권 상사가 동행해 주기를 바라면서 가까이 불렀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숨겨왔던 ‘그 일’에 관한 이야기를 마침내 자세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권 상사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비로소 왜 ‘빳따’가 그렇게 했으며, ‘째보’가 자신의 코앞에서 그렇듯 의리 없는 행위를 했는
가, 하는 따위의 이유를 알겠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지금까지 왜 ‘그 일’을 자신에게 숨겼느냐, 하는 따위의 추궁은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 미안해. ‘독탕’을 뛰려고 했던 것은 잘못하면 너까지 다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야기를 모두 끝낸 차 일만은 비로소 가슴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응어리 진 채 쌓여있던 그 무엇이 한꺼번에 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시원했다.
사람들은 흔히 이 세계를 의리로 밥 먹고 사는 것쯤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 이 세계만큼 비정한 세계는 없었다. 약육강식. 어느 한 구석이라도 약한 듯이 보이면 어제까지 동무였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돌변하여 잡아먹겠다고 덤비는 곳이 이 세계였다. 이 세계에는 룰도 없었으며, 앞뒤도 없었고, 선후배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적이었다.
권 상사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차 일만도 구태여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누군들 모르겠는가, 전쟁이란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더구나 저쪽은 아직도 ‘현역’을 거느린 막강한 대부대이고, 이쪽은 피라미들한테도 ‘칼질’을 당해 누워있는 퇴역과, 또 ‘망’을 몇 명 데리고 있기는 하지만 은퇴한지 벌써 한참 지난 고려장 치를 사람 하나뿐이지 않는가. 실력은 둘째 치고 숫자상으로도 결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사실 철없던 시절에는 먹고 살기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하며 단독으로 난장을 뛰어다닌 적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이 기름을 뒤집어쓰고 불속으로 뛰어들던 짓거리로 다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로 여겨지는 것이다.
염 은옥이 몇 차례 드나든 다음 이윽고 권 상사가 입을 삐죽히 내밀고 물었다.
“그럼 저 여자가 형님의 목숨과 바꾼 여자유?”
“일테면 그렇지…….”
차 일만은 쑥스러웠다. 왠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참, 형님두 성격 한 번 별나우.”
“무슨 소리야, 그건 또?”
“하필이믄 아이를 배고 있는 여자를 사랑할 건 뭐유?”
“짜아식이 한다는 소리하고는…….”
“그렇잖유, 길거리에 쌔구 쌘 거이 여자덜인디…….”
권 상사가 엇조를 놓았으나 그의 말본새가 본래 그렇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터였기 때문에 차 일만은 사설을 늘어놓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염 은옥이가 깎아온 참외를 말없이 씹던 권 상사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예수쟁이지유?”
“어떻게 알았어?”
“아, 척 하믄 삼천리지, 지가 눈칫밥 몇 년인디 그걸 모르것슈. 쩌어기, 성경책이 뒤비져있네유.”
“…….”
차 일만은 잠자코 있었다.
“그라구 보니께, 형님이나 나나 이제 예수쟁이 될 날이 멀잖았구먼유. 하기사 죽기 아니믄 까무라치기인디, 미리 천당을 예약해 놓는 것두 괜찮은 것이기는 하지유.”
권 상사는 혼자 웅적거리며 혀끝을 찼다. 예수쟁이……. 차 일만은 그의 말이 어쩜 옳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항생제 주사를 놓기 위해 왔던 간호사가 가고
난 뒤 권 상사가 다시 은밀한 말투로 물었다.
“형님이 어찌다가 그렇게 되았는지는 내 모르것지먼, 정말 사랑 하나는 오지게 하는개비네유. ‘박’이 터지믄서두 끝까정 지켰다는 것을 보믄…….”
옆구리가 결리는 가운데에서도 차 일만은 그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아, 사랑……. 그것이 사랑인 줄은 아직까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걸고 그녀의 생명을 지켰다는 것만큼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는 오후 내내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는 염 은옥이 다시 들어와 ‘참외 더 깎을까요?’ 하
고 묻자 자신도 모르게 또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는 어느새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문병 온 사람들로 한동안 조용하던 4인용 병실이 갑자기 왁자해졌다. 차 일만의 옆 환자는 아직까지 합의를 보지 못한 교통사고 환자였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도중 난데없이 돌진해온 승합차에 치었다는 그는 보험회사 직원이 빨리 오지 않는다고 안달을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권 상사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담 까짓꺼 함께 죽어버립시다아, 우리. 그는 똑 같은 소리를 몇 번씩 반복했다. 그러나 차 일만과 마찬가지로 길을 빠져나갈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 찡그린 얼굴은 좀체 펴지지 않고 있었다. 염 은옥과 상의를 해보았으나, 그녀도 울상만 짓고 있을 뿐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말 우는 데 말 가고, 소 우는 데 소 가는 법이여.”
그녀의 어머니 입에서 쏟아지는 ‘주여, 주여’ 소리의 간격이 빨라졌다. 무겁게 누르는 공기를 밀어내 듯 잔기침을 해대던 차 일만은 그 소리가 들릴 적마다 권 상사의 아내가 떠올랐다. 어쩌면 이 시각 그녀도 똑같은 소리를 되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때였다. 염 은옥이가 미용실에 있는 미스 리와 통화를 하기 위해 버튼을 누를 때였다. 차 일만의 휴대폰이 울렸다. 강 승길이었다. 그는 첫 마디부터 누워있는 차 일만을 차갑게 찍어 눌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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