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살아 있어?”
“…….”
차 일만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거 목숨 한 번 질기네!”
“…….”
“그 목숨 잘 보관해두라구, 내일까지.”
전화는 또 일방적으로 끊겼다. 그러나 차 일만은 휴대폰을 금세 귀에서 내리지 못했다. 흰수작만은 아닌 것 같았다. 말끝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디일까. 시끄러운 잡음이 들리는 것으로 짐작해볼 때 술집 같았다. 술집에서 누군가와 술을 마시다가 안주 삼아 전화를 건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누구에요?”
염 은옥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녀는 미스 리와 통화를 하면서도 귀여겨듣고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빳따에요? 이번엔 권 상사가 물었다.
“돼지…….”
차 일만은 자신도 모르게 꼭 그 뒤에 붙어 다니던 ‘형’자를 빼고 말했다.
마침내 옆 환자가 기다리던 보험회사 직원이 온 모양이었다. 그때까지 벼르고 있던 환자는 그러나 정작 그가 나타나자 어느새 고분고분한 말투로 바뀌어 있었다.
쥑일 눔……. 권 상사의 입에서 욕설이 거침없이 터져 나왔다. 차 일만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떻게 할까.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빛이라고는 한 가닥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역사는 눈물겨운 법이었다. 이제 겨우 사십이 넘은 차 일만에게도 역사란 그러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사람을 때린 것은 그의 나이 열다섯 살 때였다.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들어갔던 그 집에는 자신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생판 남남인 형이 있었는데, 그는 성질이 고약하여 걸핏하면 집에서 기르던 도사견을 차 일만의 코앞까지 데리고 와 ‘물엇!’ 하며 위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럴 적마다 차 일만은 참았다. 개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말썽을 일으키면 가뜩이나 눈물이 많은 어머니가 또 눈물을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그가 또 ‘물엇!’하자 이번엔 정말 개가 차 일만의 넓적다리를 물었던 것이다. 아픈 것은 실상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때 차 일만의 마음속에서는, 내가 개만도 못하단 말인가, 하는 분기가 솟구쳤다. 그는 재빨리 벽에 세워져 있던 삽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삽날로 정신없이 개를 찍었다.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었다. 줄에 묶여있던 개는 곧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나 차 일만은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았다. 그는 피 묻은 삽날로 이번엔 그 짓을 시킨 형을 사정없이 찍어버렸다.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으나 그는 막무가내로 삽을 휘둘렀다.
그리고 차 일만은 그 집을 나왔다. 이십칠 년 전 일이었다. 그 뒤로 몇 번 찾아가 보았으나 개발로 인해서 이미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그곳에서 그 집의 형체란 찾을 수가 없었으며, 그 일이 있고난 뒤 새아버지와 헤어졌다는 어머니도 영영 다시 만날 수가 없었다.
“일단은 합칩시다아. 방법은 그것밖에는 없지 싶으유.”
한동안 끌탕을 하던 권 상사가 이윽고 염 은옥을 불러 앉혔다. 차 일만도 귀를 세웠다. 본디 제갈량 같다고 소문난 그였지만,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역시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아이를 낳을 때까정은 암튼 견디어야 할 꺼이 아니것수.”
그는 합치고 나서도 정 견디기 힘들면 그땐 ‘삼십육계’ 놓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염 은옥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하루 사이에 얼굴이 초췌해진 그녀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아이를 위해서……. 차 일만은 할 말이 없었다. 그는 권 상사가 말을 맺으며 웃음엣소리를 지껄일 때에도 눈을 감고 있었다.
# 확인
‘강월’은 늘 조용했다. 그날도 너무 조용해서 겉으로 볼 때에는 영업을 하지 않는 집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사전에 예약을 하지 아니하면 룸을 차지하기가 힘들 정도로 언제나 만원을 이루는 것이 ‘강월’이었다.
지정된 룸은 넓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자리를 하기에는 알맞은 크기였다. 이탈리아풍의 실내장식에 한국 전통 양식이 가미된 인테리어는 무겁지 않으면서도 안정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약간 붉은 톤의 조명은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사람까지도 가깝게 느낄 것 같은 마술적 힘이 있어 보였다.
세팅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18년 된 프리미엄 양주와 얼음 통이 테이블 가운데에 술잔과 콜라, 우유, 냉수 등과 함께 자리를 잡고 있었다. 웃옷을 벗어 종업
원에게 건네주며 강 승길은 김 국진을 건너다보았다. 그도 만족해하는 듯 했다. 강 승길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오늘은 이사님의 회포를 풀어 드릴까 해서 마련한 자리이니까, 지난번처럼 슬그머니 내빼시면 곤란합니다.”
강 승길은 호기롭게 말하며 여자들을 불렀다. 오늘은 내 기필코 확답을 얻어내고 말리라. 그는 양주병 마개를 비틀었다.
마담은 약속을 지켰다. 김 국진이 빠져들 만한, 앳되고 삐쩍 마른 여자를 파트너로 맞춰 들여보내주었다. 웃을 때마다 덧니가 보이는 그녀는 그러나 업소가 처
음은 아닌 듯 했다. 착 달라붙어서 시중을 드는 품이 조금도 어색스럽지가 않았다.
김 국진도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건네주는 잔을 마다않고 받았다.
술잔이 몇 순배쯤 돌았을까. 강 승길이 비로소 본론을 꺼내놓기 시작하였다.
“그 골프장 토목공사 말입니다. 저희 회사에 맡기시면 어떻겠습니까. 저희 회사는 하청을 주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회사 아닙니까. 아무래도 직영을 하면 단가도 떨어지고, 공정은 물론 하자 보수까지도 철저히 책임지고 행하는 장점이 있기 마련이지요.”
“아, 그렇게만 된다면 저도 좋지요. 그렇지만 아직은 그럴만한 힘이 제게 있어야 말이지요. 저는 다만 위에서 시키는 일만 겨우 처리하고 있는 아직 말단인데
요.”
김 국진은 어울리지 않게 겸손을 떨었다. 그의 말투에서 강 승길은 아직 그가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자가 찍어주는 과일 조각을 씹으면서도 그의 몸통은 조금도 풀어진 데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강 승길은 본론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일 때문에 지금 제 자리가 가시방석입니다…….”
김 국진이 길게 한숨을 토해내었다.
강 승길은 그가 실패한 ‘그 일’을 또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어찌 아니 그러겠는가. ‘그 일’로 인해서 신임이 두터웠던 윗사람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는 것은, 진급은 둘째로 치더라도 자존심 구기는 일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전에 강 승길과 의견을 맞추었던 일이 아니었다. 그가 단독으로 일을 벌였다가 오히려 기르는 개한테 뒷다리를 물린 꼴이 된 셈으로, 굳이 실패의 요인을 따지자면 상대를 너무 얕잡아 봤다는 것과 조급증에 있었다.
그렇다고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므로 강 승길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잠시 뒤 본격적으로 ‘그 일’을 꺼내놓기 시작하였다. “날마다 채근이 빗발치듯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내 원, 참.” 그는 여자가 가슴을 밀착한 채 콧소리를 내어도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금세 손아귀에 쥘 것 같았던 상무이사 자리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강 승길은 쾌재를 불렀다. 어쨌든 지금은 그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야 할 판국이고 보면 ‘그 일’이란 오히려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좋은 구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잠시 뒤 그는 훈수하듯 한 마디 거들고 나섰다.
“너무 성급하셨어요.”
“누가요? 제가요?”
김 국진이 되물었다. 강 승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쥐 한 마리를 잡기 위해서도 사자는 온 몸의 근육을 곤두세운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녜에, 그럴수록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어야죠. 그리고 단박에 물었어야죠.”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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