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중 가장 무더운 기간인 삼복(三伏)이 되면 사람들은 저마다 더위를 이겨낼 비책(秘策)을 꺼내 자신만의 독특한 피서법(避暑法)을 남들에게 자랑삼아 얘기하곤 한다.
예부터 복날이 되면 더위를 피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계곡이나 산정(山亭)을 찾아가 탁족(濯足)을 하면서 노는 풍습이 있었는데 더위에 지친 심신을 보하기 위함이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더위를 이겨 내라는 뜻에서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빙표(氷票)를 주어 관의 장빙고에 가서 얼음을 타갈 수 있게 하였고, 민간에서는 복날 더위를 막고 보신을 하기 위해 여름 과일과 계삼탕(鷄蔘湯), 구탕(狗湯:보신탕)을 즐겨 먹으며 더위를 잊었다.
조선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설화집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 소개된 세 사람의 독특한 피서법 얘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조선 초 한양과 10여리 떨어진 어느 마을에 늙은 재상이 한 스님과 협객(俠客) 이 진사(進士)를 벗하며 살고 있었다.
중복을 갓 지난 어느 무더운 여름날, 늙은 재상은 더위를 피해 사랑방 대청마루에 앉아 빙과(氷菓)를 한입 가득 떠먹곤 갑작스런 냉한 기운을 가시려 연못으로 작렬하는 태양빛을 흘깃거리며 쳐다보곤 할 때였다. 행랑아범이 눈부신 햇살 때문에 실눈으로 눈가의 주름을 더욱 깊게 만들며 사랑채 앞마당으로 다가왔다.
“대감마님, 진사어른과 노(老)스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늙은 재상은 벗들의 방문에 어린아이마냥 즐거워하며 얼른 뫼시라 행랑아범에게 일렀다.
이윽고 행랑아범을 따라 누더기 승복차림으로 삿갓을 쓴 노스님과 갓과 도포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이 진사가 들어왔다. 이들을 반갑게 맞이한 늙은 재상은 행랑아범에게 빙과를 내오도록 이르고 벗들과 대청마루에 자리했다.
“이공과 스님께서 오실 줄은 생각도 못했네 그려, 허허허” 늙은 재상이 말했다.
“혹서(酷暑)에 대감댁의 빙과 생각이 간절하더이다.” 이 진사가 호방하게 말했다.
“그런가, 내 자네들이라면 언제라도 내어줄 수 있지.” 늙은 재상의 호탕한 말에 세 사람은 시원하게 웃었다. 여종이 가져온 빙과를 함께 먹으며 무더운 날씨와 보양식에 관해 얘기할 무렵이었다. 볕 좋은 연못가 한곳에 널어놓은 이불호청을 걷는 젊은 여종이 움직일 때마다 얇은 삼베저고리 사이로 하얀 속살이 살짝살짝 드러났다. 세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여종의 일거수일투족만을 쫓았다.
“이 더운 날에도 생기발랄한 모습을 보니 젊은게 좋긴 좋은가보군요!” 늙은 재상이 부러운 듯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스님이 동조하며 말했다.
“이공과 스님께서는 혹서를 어찌 잊으십니까. 두 분의 망서법(忘暑法)에 대해 듣고 싶군요.” 늙은 재상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소승의 망서 방법이야, 달리 있겠습니까마는….” 스님이 먼저 말을 이었다.
“소승은 기거하는 암자가 있는 산중의 울창한 나무그늘로 찾아들어가, 그 나무들을 벗 삼아 누워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쏘이며 경전을 읽노라면 더위를 어찌 느끼겠습니까.”
“스님들의 독특한 망서법을 듣고자 한 것인데, 우리네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려.” 늙은 재상이 조금은 실망한 듯 말했다.
“그럼 대감께옵선 대감만의 특이한 망서법이 있는지요?” 스님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있지요!” 늙은 재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소상히 한번 말씀해 보시지요?” 스님이 채근했다.
“크고 넓은 건물에 사방으로 문을 열어놓고, 연못의 연꽃향기 맡으며, 이름 모를 나그네새들의 노랠 듣고, 시원한 개울에 여러 종류의 계절과일을 담가두었다가 빙수와 함께 입맛을 돋우면 더위가 왜 무섭겠습니까” 하고 의기양양하게 늙은 재상이 말했다.
한참을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만 듣고 있던 이 진사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두 분께옵서 하신 말씀들은 더위를 물리치는 것이지, 정작 더위를 잊는 방법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진사의 뜬금없는 말에 두 사람은 갸우뚱하며 잠시잠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공, 우리 방법이 더위를 잊는 것이 아니라 물리치는 것이라면, 이공께서 더위를 잊는 이공만의 진정한 방법을 한번 말씀해 보시지요?” 늙은 재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저는 절색(絶色)의 기생을 데리고, 조그마한 초가집에 나무로 울타리를 하고 주위는 병풍처럼 울창한 삼림들이 둘러서 있는 곳에서,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바람에 춤을 추는 기생의 옷고름을 당겨 풀고, 저고리와 치마를 한 꺼풀씩 정성스레 벗겨내 알몸으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 진사가 호흡을 고르며 말을 끊었다. 묘한 얘기에 깊이 빠져 있던 두 사람은 끊지 말고 계속하라며 이 진사를 재촉했다.
“기생의 매끄러운 살갗은 흰 눈과 같고, 이는 서리같이 깨끗하며,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에는 물결이 이는 것 같고, 살랑살랑 내 귓가에서 흔들리는 기생의 손에선 미풍이 일어납니다. 백설의 노래와 추풍의 곡조를 노래 불러,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내 정신을 상쾌하게 할 때, 하늘나라의 신선인가를 의심하게 만드니, 이 어찌 더위를 피한다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진사가 얘기의 끝을 맺었지만 두 사람은 한참동안 감은 두 눈을 뜨지 못했다.
늙은 재상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공의 방법이야 말로 진정한 망서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네, 내 진작 이공의 그런 망서법을 알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네!”라고 하니, 이 진사는 빙그레 웃었다.
“이공, 근데 그 기생과 호합하면 안 되는 것이요?” 늙은 재상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 설화는 기생의 아름다움을 천상의 선녀에 빗대어 표현하여, 남성들로 하여금 세상사의 시름을 한 순간 떨칠 수 있도록 하는 표현적 특성을 보인다. 이처럼 절색의 기생과 삼림욕을 함께 한다면 어찌 삼복의 무더위를 생각할 겨를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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