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에서는 그 여자를 찾아 버릇을 고쳐주자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권 상사까지도 꼭 찾아서 ‘고무신 까꾸루 신는’ 여자들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우겼다고 했다.
사실 뛰어봤자 벼룩이라고, 찾자고 들면 뻔한 이 바닥에서 못 찾을 것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얼굴에 황산 몇 방울 뿌리면 ‘여자 일생 종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차 일만이었다. 그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고 했다. 어차피 떠난 여자야, 내버려 둬. 너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다 사랑의 무게가 똑같다고 생각하니? 차 일만은 오히려 분노를 참지 못해 씩씩거리는 권 상사를 달랬다고 했다.
아, 그랬구나. 저 사람에게 그런 아픈 사연이 있구나. 염 은옥은 그것까지도 이젠 자기가 감싸 안고 가야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전화로 두 사람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어머니는 밤이 늦었는데, 잠을 자지 않고 뭣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덧붙여서 뱃속의 아이가 많이 놀랐을 테니까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만 눈 좀 붙이라는 것이었다. 염 은옥은 알았다고 대꾸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권 상사가 곁에서 통화하는 내용을 귀여겨듣다가 말참견을 했다.
“그래두 형수님은 어머니가 기셔서 좋것수. 잘 모시슈, 어머니란 누구랄 것 없이 정말 소중한 분덜이니께…….”
어느새 창밖으로 동이 터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권 상사의 입을 통해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하룻밤을 보낸 셈이었다. 그렇지만 염 은옥은 조금도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뱃속의 아이까지도 귀를 세우고 있었는지, 시도 때도 없이 해대던 발길질을 하지 않았다.
새벽기도를 마친 어머니가 일찍부터 병실을 찾아왔다. 사우나에 다녀오겠다면서 권 상사가 자리를 비켜주자 어머니는 또 염 은옥을 붙잡고 어젯밤에 꾸었다는 꿈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막 잠이 들려는데 말이지, 네가 어떤 남자한테 업혀서 들어오는 거야. 내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너는 대답은 하지 않고 그 남자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 생글생글 웃고 있지 뭐겠니. 그래서 내가 그 남자를 쫓아내려고, ‘빨리 내려놓고 내 집에서 썩 나가라’고 소리를 질러댔지. 그런데 글쎄 그 남자가 어떻게 했는지 아니? 나가지는 않고 부득부득 안방으로 들어가는 거 있지? 아이구, 망측해라…….”
어머니는 기가 막히다는 투로 염 은옥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염 은옥은 왠지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어쩜 이런 사람을 나에게 보내주셨을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또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당분간 우리가 이 사람과 함께 사는 거 맞니?”
그녀의 얼굴에서 어떤 낌새를 느꼈음일까, 어머니가 다짐하듯 물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에서 걱정스러운 빛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요, 어머니. 이 사람과 함께 살 거예요. 당분간이 아니라 어쩜 영원히 함께 살게 될지도 몰라요. 염 은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원을 확실히 알 수 없어 좀 께름칙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 하나는 잘 생겼다, 야. 파마머리가 코미디언 같아 우습기도 하고.”
어머니는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우습다는 듯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아침이 되자 병원은 갑자기 부산스러워졌다. 환자들의 용태를 살피기 위해 간호사들이 한 차례 다녀간 뒤 담당 의사들의 회진이 시작되었다. 그쯤이 되어서야 차 일만은 눈을 떴다. 의사는 붓기가 많이 가라앉은 그를 보며 다음 날엔 퇴원을 해도 괜찮겠다고 말했다. 상처는 깊지만 뼈를 다친 데가 없어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차 일만은 권 상사를 찾았다.
“사우나 갔다가 곧 오신데요.”
염 은옥이 대답했다.
차 일만이 일어나 앉자 그동안 잠자코 있던 어머니가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럼, 우리 은옥이가 아이 낳을 때까지는 함께 사는 거요?”
차 일만은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았다. 그러나 가로젓지도 않았다. 앉은 채로 고개를 돌려 염 은옥을 쳐다보며 소리 없이 웃음을 건넸다. 고마운 사람. 염 은옥은 그 웃음의 의미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보내는 사랑의 암호와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도 그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모처럼 웃는 어머니의 얼굴이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났다. 어느새 햇살이 부채살처럼 온누리로 퍼져가고 있었다.
# 동행
“식사, 하세요오.”
염 은옥이 외치는 소리에 차 일만은 비로소 눈을 떴다. 하품이 먼저 비어져 나왔다. 시계바늘은 어느새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만사를 다 잊고 초저녁부터 깊은 잠을 잤으나 이상스럽게도 몸은 여전히 찌뿌드드했다. 결리던 옆구리가 몸통을 움직일 때마다 신경을 쓰게 했다. 결국 그는 염 은옥의 재촉이 몇 번 더 있고난 뒤에야 느린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뽀삐가 쪼르르 달려와 캉캉거리며 뛰어올랐다.
식탁에는 대구탕이 자글자글 끓고 있었다.
“잘 주무셨어요?”
염 은옥이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차 일만은 주춤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식탁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와는 생판 다른 생활의 변화를 말해 주는 것이었다. 먹고 싶으면 먹고, 마시고 싶으면 마시던 때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이미 자신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그래도 식사는 제 시간에 꼭꼭 맞추어 하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어머니의 지청구를 들으며 차 일만은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접시에 대구 토막을 건져주던 염 은옥이 오히려 그를 변명하고 나섰다.
“아직 몸이 성치 않아서 그렇잖아요.”
대구탕은 입맛에 맞았다. 매콤하면서도 시원했다.
“입에 맞으세요?”
어머니가 눈짓을 했으나 염 은옥은 차 일만이 식사할 적마다 이것저것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였다.
병원에서 퇴원한 날, 차 일만은 짐을 싸가지고 염 은옥의 아파트로 들어왔다. 이삿짐이라고 해봤자 입을 옷가지 몇 점을 챙겨 넣은 가방 두어 개가 전부였고 그나마도 권 상사가 거들어주는 바람에 차 일만은 힘 한 번 쓰지 않고 이사를 마칠 수 있었다.
거처할 방은 벌써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흰 색 침대시트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며 옷장도 비어있었다. 남쪽으로 나있는 유리창 커튼을 젖히자 햇살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부터는 이 방이 내 방이거니 생각하시고 편하게 지내세요.”
염 은옥은 말끝마다 ‘고마워요’란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그 말을 들을 적마다 차 일만은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행한 일인데, 고
마워할 필요가 뭐란 말인가. 짐을 풀면서 그는 가슴이 뛰는 것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미용실은 여전히 성황 중이었다. 미용실을 맡은 미스 리는 시간마다 전화로 보고를 해댔다. 6동 208호 아주머니가 오셨는데요, 왜 안 나오시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어요. 그래서……. 그녀는 애기 때문에 잠시 쉰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 보고를 받으면서, 염 은옥은 소리 내어 웃었다.
식사를 마치면 어머니는 자신의 방으로 건너가 성경책을 펼치는 게 일과였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 차 일만은 그녀가 이야기를 하는 중간 중간에 늘
성경 구절을 읊조리는 것은 모두 이와 같은 것에서 근거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차 일만은 거실 벽에 세로로 걸려 있는 족자도 그녀가 선택한 것이라는 것을 염 은옥을 통해 알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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