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없다 <제17회>
코끼리는 없다 <제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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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08-09 11:23
  • 승인 2007.08.0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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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위험한 사랑(5) [제17회]
“눈이 아무리 밝아도 사람이 제 코는 못 보는 법이거든.
그러니까 ‘째보’를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보자, 이거야.
“그런데 말이야. 왜 ‘빳따’ 형이 ‘깜씨’ 형을 못 잡아먹어서 야단인지 모르겠더라구. 그래두 이 세계에서는 ‘아삼육’으로 소문난 사이들이었는데 말이야.”

설거지를 마치면 염 은옥은 튀어나온 배를 거실 소파에 기대고 비스듬히 앉아 책을 읽거나 십자수를 놓았다. 음악을 듣거나 주부들이 나오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도 그 시간이었다. 그때쯤이면 온 집안을 들쑤시고 다니던 뽀삐도 그녀 곁에 다가와 발치에 누웠다.

식사를 끝낸 이후 차 일만이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책을 건네며 읽어보라고 염 은옥이가 권하였으나 애당초 그런 것들과 거리가 멀었던 그에게 책이란 수면제와 같은 것이어서 책장을 두 장도 넘기기 전에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오곤 하는 것이었다.
“참외 잡수세요.”
염 은옥이 접시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접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시 졸음이 밀려들기 시작한 그는 연신 하품을 터트리면서 뽀삐를 안고 자신의 방으로 건너왔다.

그러나 먹고 자는 것밖에 없는 단순한 시간 보내기가 되풀이 되더라도 그는 시간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란 그들에게 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인 셈이었다. 그들이 어떤 놈들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이곳에 숨어 있다는 것쯤은 벌써 익히 감지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므로 이미 바깥 어딘가에는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망’을 세워놓았을 게 분명했다.

물론 그는 염 은옥의 외출도 금지시켰다. 휴대폰도 반납시켰고, 어머니의 이름으로 새롭게 가입케 했다. 그것 또한 함께 살아남기 위한 방편인 셈이었다. 아이를 무사히 낳을 때까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들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는 게 급선무였다. 그들을 자극시키는 어떠한 행동도 삼가야 하는 것이었다. 바깥과 연결된 통로는 권 상사와 미스 리가 맡았다. 시장도, 은행도, 슈퍼도, 그들이 다녔으며 미용실의 거래처와 단골손님들도 그들이 도맡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차 일만은 살맛이 났다. 부풀어 오른 배를 앞으로 쑥 내밀고 하루 종일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염 은옥이가 늘 곁에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다가 눈이 마주칠 때면 그는 소년처럼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 큰 눈망울로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며,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웃음을 물고 다가설 때는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지곤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이따금 지청구를 주었으나 염 은옥은 상관하지 않았다. 방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다시 방으로, 혹시라도 차 일만이가 불편해 하는 데는 없는가, 살피고 다녔다. 그러다가도 때가 되면 그녀는 잊지 않고 그를 불러댔다.
“시익사, 하아세요오!”

# 탐색전

‘째보’는 시큰둥한 얼굴로 들어섰다. 그러나 권 상사는 약속시간에 맞추어 그가 나타났다는 것은 아직까지 자신과 맺었던 의리의 끈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라고 간주했다. 따라서 잘 구슬려 삶는다면 그를 통해 ‘빳따’의 속셈을 간파하겠다는 목적을 이루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그에게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약점이 있을 터이며, 그것을 먼저 찾아내야 한다는 차 일만의 지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눈이 아무리 밝아도 사람이 제 코는 못 보는 법이거든. 그러니까 ‘째보’를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보자, 이거야. ‘빳따’한테 넘어간 놈이라면 우리에게 넘어오지 말란 법도 없지 않겠어?”

사고가 난 다음 날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차 일만은 힘을 주어 이 말을 해댔다. 거기에서부터 얽히고설킨 문제를 풀어나가자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그리고는, 누운 나무에 열매 맺는 것 봤냐면서 권 상사를 서둘러 내몰았다.

하지만 ‘째보’가 핑계를 대며 자꾸만 약속날짜를 늦추는 통에 권 상사는 애를 먹었다. 조금도 바쁠 것 없다는 심보가 틀림없었다. 결국 권 상사는 차 일만의 지시대로 그에게 약속 일자를 정하도록 맡겼고, 마침내 만나게 된 것이었다.

소주잔을 앞에 놓고도 ‘째보’는 손을 쉽게 대지 않았다. 핏발이 선 눈으로 이따금 권 상사를 훔쳐보는 품이 아무래도 남의 밥그릇 앞에 ‘하우스’를 차린 것을 켕겨하는 듯 했다. 그러나 권 상사는 모른 척 했다. 지금 급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잔 지난 일은 모두 덮어버리기루 혀. 나가 그깐 일루 해서 하루아침에 의리를 내팽개칠 위인은 아닝께. 개 홀레 붙득이 싸구려가 된 거이 요즘 우리덜 의리라고는 허지먼서두, 그려두 나는 니를 믿어. 암만, 니가 으떤 눔인디, 의리를 저버리것어. 우리가 으쩌케 쌓은 의리인디…….”

말을 꺼내놓고 권 상사는 스스로 술을 따라 먼저 한 잔 마신 다음 ‘째보’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말이 먹혀들어갔는지 조금 전까지도 씨알이 안 먹혀들 것처럼 찬바람이 돌던 ‘째보’의 얼굴이 어느새 조금씩 풀어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째보’가 만지작거리던 술잔을 들었다.
“‘하우스’? 뭐 그까짓꺼 다 내팽개쳐 뿐져어! 내가 은제 그깐 거에다가 목숨 걸구 살았간디. 아, ‘빵깐’에서 막 나온 내 친구가 그 짓거리를 해서라두 우선 밥 좀 먹구 살아야 쓰것다는디, 내가 그깐 거에 연연해서야 쓰것는감. 기냥 달라구혀두 내줄 판국인디, 안 그려?”
권 상사가 너스레를 떨어대자 ‘째보’가 빈 잔을 건넸다.
“미안하게 됐어. 내 본심이 아니라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빳다’ 형이 느닷없이 ‘깜씨’ 형을 잡아야겠다고 부르는 통에 내가 잠시 ‘쩐’에 홀려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니, 네가 좀 이해해 주라. 너도 알 테지만 그때 내 사정이 말이 아니었거든. ‘학교’에서 막 나와 가지고…….”

차 일만의 예상은 적중했다. 권 상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물론 아직 다 넘어온 것은 아니지만, 이쯤 되면 이미 반 이상은 넘어온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러나 권 상사는 시치미를 뗐다. 이럴 때일수록 끝까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등포 시절 통합을 위한 협상 도중에 말 한 마디 어긋난 관계로 대림동파와 역전파들이 현장에서 칼부림을 했던 사건을 그는 아직까지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 기깐 일은 인제 다 잊어뿐져. 그긋으루다가 니하구 쌓은 의리를 깨박칠 숭은 없는 일이잖은감. 아무리 ‘하우스’가 좋다구혀두, 우리 의리보다 중한 것은 아니쟎여.”
권 상사는 그가 건네준 잔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째보’도 역시 잔을 한 번에 꺾었다. 술이 들어가자 어느새 그의 얼굴에 화기가 돌았다. 비로소 언청이 봉합자국이 시퍼렇게 살아나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야. 왜 ‘빳따’ 형이 ‘깜씨’ 형을 못 잡아먹어서 야단인지 모르겠더라구. 그래두 이 세계에서는 ‘아삼육’으로 소문난 사이들이었는데 말이야.”
“그 모든 거이 다 그 구린내나는 ‘쩐’ 땜시 그런 거이 아니겠남. 종래는 그 놈이 우리덜 의리두 다 ‘깽팡’ 치구 말 것이구먼 그려. 안 그렇게 생각혀?”

“그래서는 안 되지. 아, 우리가 어떤 사이인가. ‘학교’를 함께 입학한 것만 해도 서너 번은 넘지, 아마?”
‘째보’의 술버릇은 여전했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옛날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말끝마다 ‘씨바’ 소리를 연발하면서, 그는 권 상사의 권유를 마다하고 큰 컵에다가 소주를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우리끼리 이야구지먼서두, 그러믄 안 되쟎여. ‘빳따’ 형 말이여. 그렇게 당하구두 ‘깜씨’ 형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디, ‘쩐’이 아무리 좋아두 의리를 개코보닥두 못하게 여기믄 쓰것어?”
“그건 그래, 씨바. 그런데 그 형의 윗줄이 ‘돼지’형 같더라고, 요즘 ‘쩐’ 좀 벌었다고 우쭐대면서 아이들을 모아 데리고 다니는……. 하기야 그래서 나도 한 ‘큐’ 잡을까 해서 붙었던 거지만서두…….”
“그래서 한 ‘큐’ 잡았나?”
“한 ‘큐’는, 씨바. 황새 울었지, 뭐.”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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