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보’는 마치 달리기 경주를 마친 사람이 물을 찾듯이 술을 마셨다. 큰 컵에 가득 채운 술을 단숨에 마시고도 목이 마른 듯 또 가득 부었다. 그 모습을 눈여겨보던 권 상사는 이제는 이야기의 핵심을 찔러봐도 괜찮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란디, 그 ‘빳따’ 형은 요즘 어디를 가믄 만날 수 있남?”
안주를 그의 접시에 살갑게 담아주면서 권 상사는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예상대로 ‘째보’는 그 말을 경계하지 않았다.
“신사동 ‘영웅 나이트’에 가봐. 당장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요즘 그 형이 거기 ‘냄비’를 하나 물어가지고는 죽고 못 살지 않것냐. 사랑하는 동생들한테는 여우 오줌보다 더 인색하게 ‘쩐’을 쏘면서, 지금 그 ‘냄비’한테는 대포를 쏘아대고 있다지 뭐겠냐. 환장하지, 환장해. 그 ‘냄비’ 이름이 ‘다연’이라고 하든가……”
이윽고 술기가 오르자 ‘째보’는 그 외에도 자신이 평소 지니고 있던 불만을 혼잣말처럼 웅절거리면서 모두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를 기다리는 권 상사의 존재 따위를 까맣게 잊고 있는 듯 했다.
“자기도 내세울 게 하나도 없으면서, ‘깜씨’형이 어떤 계집을 꿰찼다고 생지랄을 떨어대는 거야, 글쎄. 가만히 보니까, 이 번 문제는 한두 번으로 끝날 게 아니
더라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개박살낼 계획이더라니까.”
‘째보’는 횡설수설이었다. 일관성을 잃고 마구잡이로 떠들어댔으나 권 상사는 그 속에서 자신이 몰랐던 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이제 하나밖에 없었다. 먼저 선수를 치는 것뿐이었다. 더구나 천호동 아이들하고 손을 잡았다면 더욱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처럼 숨어 있는 것을 ‘장땅’으로 알고 있다가는 조만간에 ‘쌍코피’ 터질 게 분명한 일이었다.
# 사랑의 시작
밤이 깊었다. 문병객들이 떠나간 병실이 조용해졌다. 환자 곁에서 종일 시중을 들던 보호자들도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차 일만도 마찬가지였다. 염 은옥은 잠이 든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소등이 되어 있었으나 병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불빛이 그의 얼굴 윤곽을 희미하게 드러내 주고 있었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콧날 아래로 턱에는 하루 만에 어느새 수염이 검게 돋아나 있었으며, 어깨를 중심으로 상체를 감고 있는 붕대에는 아직도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고마운 사람……. 염 은옥은 생각할수록 그가 고마웠다. 보잘 것 없는 자신의 목숨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덤벼들던 그 용맹성이 생각할수록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작심하고 덤벼들던 그 두 사람에 의해 자신은 부지불식간에 당하고 말았을 게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임에 틀림없었다.
염 은옥은 문득 이런 사람이라면 그까짓 과거를 문제 삼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어두운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은 밝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은 누구보다 자신이 증명할 수 있었다. 어쩜 이런 사람을 자신에게 붙여주시다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여’ 소리를 연발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다녀올 데가 있다고 나갔던 권 상사가 다시 봉지를 안고 들어왔다. 그는 들어서면서부터 염 은옥을 향해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거, 그렇게 들여다보믄 우리 형님 얼굴에 ‘빵꼬’나것소.”
염 은옥은 자신도 모르게 차 일만의 곁에서 떨어졌다.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형수’라는 그 소리가 꼭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낯설기는 했으나, 그 소리를 들을 적마다 어느새 자신이 정말 차 일만의 아내가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하는 것이었다.
“뭣 좀 잡수셨수?”
“아니요.”
“그러믄 안되지유. 형수님두 형수님이먼서두, 아기가 있잖어유. 이럴 때일수록 아기를 생각하셔야지…….”
권 상사는 혀끝을 차며 봉지 속에 담긴 것들을 탁자위에 꺼내놓았다. 김밥이 담긴 일회용 용기 몇 개와 우유 두 통, 그리고 스낵 종류들이었다. 그는 나무젓가락을 건네며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웠다.
“꿈나라에 간 형님은 그 나라에서 실컷 잡수실테니까 냅둬버리구, 우린 우선 이거라두 먹구 시장기를 달래야 할 거이 아닌감유?”
너스레를 떨던 권 상사가 먼저 김밥을 입안에 넣고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염 은옥도 김밥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경황 중에 자신이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은 게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렇다구 짜이식덜이 당장 쳐들어오는 것두 아닐 터이니…….”
“정말 또 쳐들어올까요?”
염 은옥은 짭짜름한 김밥이 구미에 맞았다. 그녀는 또 김밥을 집어 올렸다. 벌써 김밥을 담았던 용기가 다 비어가고 있었다.
“아까 형님 이야구 못들었남유? 그 눔덜은 이 지구 끝까정 쫓아오구두 남을 지독한 놈덜이라니께유.” 권 상사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걱정 말아유. 우리 형님이 어떤 분이신디, 지까짓 것덜이…….”
염 은옥은 다시 차 일만을 한 차례 돌아다보았다. 파마한 머리가 풀어져 이상한 모양이기는 했으나, 환자복 사이로 보이는 근육질의 몸매가 바위처럼 단단해
보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권 상사가 다시 거쿨지게 입을 열었다.
“우리 형님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남유?”
“아니요, 아무 것도…….”
염 은옥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오늘밤 시간두 넉넉하니께, 우리 형님이나 실컷 씹으믄서 날밤 한 번 벗겨 봅시다여. 워떠유?”
스낵 봉지를 뜯으면서 그가 물었다. 이번엔 염 은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권 상사는 거침이 없었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 이따금 과자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웃었다. 그러나 염 은옥은 웃지 않았다. 웃을 수 있는 게재가 아니었다. 이야기 하나도 허투루 흘려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귀를 바투 세웠다.
“외로운 사람이에유. 형님이나 나나. 외로움이 얼마만큼 지긋지긋한 것인중 형수님은 아세유? 이 시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것이에유.”
밥이 없어서 외로웠고, 밥을 해결하기 위해 싸웠다. 싸우다보니까 형편이 엇비슷한 또 다른 싸움패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밥그릇을 따지게 되었고, 그러다보니까 또 똑같은 무리들과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힘겨루기를 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는 사생결단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살다보니까 자신들의 주변에는 온통 비슷비슷한 무리들이 들끓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를 일러 ‘조직’이라고 칭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뒤로 빠졌지만 차 일만도 한 때는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아니라는 이야기이지요?”
염 은옥은 과거를 문제 삼고 싶지 않았다. 현재가 중요했다. 미래와 연결되는 통로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아닌가. 그녀는 또 귀를 세웠다.
권 상사는 다시 귀성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돈 몇 푼에 팔려서 봉천동에 쳐들어갔던 일이 있었지유. 한창 신나게 뿌시다 보니께 앞장 서 있어야 할 형님이 보이질 않는 것이지 뭐것시유. 그래서 이거이
무슨 일이다냐, 하구 난 다 챙개치구 냅다까라 뛰었지유. 형님을 찾으러……. 그랬는디 우리 사랑하는 형님께서 어디 기셨는지 아세유? 글씨, 초등학생 하나를 붙들구 함께 울구 있지 뭐것시유. 낭중 물어보니께, 그 아이의 집을 뿌셔서 미안해서 그랬다나 뭐라나……. 암튼 그 뒤루 집 뿌시는 일에서 형님은 영원히 ‘찌’ 당했시유.”
염 은옥은 다시 차 일만을 돌아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저 사람이 그런 면이 있는 사람이로구나. 아이의 슬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그녀는 공연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 사람이라면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까지도 충분히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을 사람으로 여겨졌다.
권 상사는 차 일만의 어릴 적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물론 그것은 그가 직접 체험한 일이 아니어서 얼마만큼의 가감이 있을 수 있다고 염 은옥은 전제하고 들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서도 그의 사람됨은 충분히 살필 수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