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없다 <제19회>
코끼리는 없다 <제19회>
  •  
  • 입력 2007-08-21 15:38
  • 승인 2007.08.21 15: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2장 위험한 사랑(6)

“아버지가 아마 일찍 돌아가셨는강 봐유, 아버지 이야구 하는 걸 못들은 걸 보믄. ……암튼 형님은 엄마 이야구를 잘 했시유. 술이라두 한 잔 걸치거나, 아님 텔레비에서 엄마 이야구가 나오믄 자기두 엄마가 생각난다믄서 이야구를 풀어놓군 했쥬. 이건 지 추측인디, 암만봐두 형님 엄마가 재혼을 하지 않았나 싶으유.”

권 상사는 또 과자를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염 은옥은 잠자코 권 상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번에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염 은옥이가 가장 알고 싶어 하던 것이었다. 여자들의 이야기.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서도 차 일만은 대체적으로 담담한 편이었다. 나이 사십이 넘도록 이렇다 할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봤다는 게 좀체 믿기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권 상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였다.

“근래 들어와 살림을 차렸던 여자가 있기는 했었쥬. 형님두 그 여자를 끔찍이 아꼈시유. ‘이 민아’라구, 술집에서 알게 된 여자인디, 제법 얼굴뙈기는 반반하니 고왔어유. 한 눈에 사내들이 홀리게끔……. 어찌 보믄, 형수님을 많이 닮은 얼굴이었시유. 아, 그런디 ‘학교’에서 나와 보니께 글시, 발쎄 내빼뻔지구 없두
라구니께유.”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참기 어렵다는 투로 권 상사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외출

“………우리의 반석이시요, 우리의 요새, 우리를 건지시는 자시며, 우리의 피할 바위가 되시고,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지금 사망의 줄이 우리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우리에게 이르렀으나,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오니, 우리의 길을 지켜 주시옵소서. 우리의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새벽에 시작된 어머니의 기도는 아침까지 계속 이어졌다. 주여, 주여……. 염 은옥의 입에서도 같은 말이 몇 번씩 되풀이되어 흘러나오곤 하였다. 눈물까지 흘려가며 간절히 기도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차 일만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이틀 만에 바깥에 내보내는 딸의 신상이 어찌 걱정되지 않겠는가.

더구나 이제 나가면 한참동안 볼 수도 없는 판국인데…….

문밖을 나서는 게 두렵기는 차 일만도 마찬가지였다. 사건이 터지는 것은 언제나 순간적이어서 조금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그는 권 상사가 들어오자 그를 끌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요 앞에서 바람을 좀 잡다가 병원으루다가 지금 막 보내구 올라오는 건데유.”

그런 속에서도 권 상사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웃을 때마다 목 뒤로부터 턱 아래까지 그어진 초승달 모양의 칼자국이 이상하게 실룩거렸다. 아이들이라고 해봤자 ‘하우스’에서 ‘망’이나 보던, 아무 짝에두 쓰잘데기 없는 아이덜 두어 명밖에 더 있간디유……. 그러니까 그것은 일테면 바뀐 병원을 감추기 위해 차 일만이 밤새 ‘짱구’를 굴려 짜낸 일회용 위장전술인 셈이었다. 그는 다시 염 은옥을 불렀다. 그녀에게 그는 한 여름철이었지만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게 하였으며, 짙은 선글라스를 착용하게 하였다. 또한 만삭의 티가 나지 않도록 통으로 된 드레스를 입게 했다. 시시콜콜 해대는 그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염 은옥은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며칠 묵어야할 짐을 꾸리면서도 그녀는 고분고분 따랐다.

“형님, 자동차는 으쩐다요? 형수님 차는 발쎄 저 눔덜이 죄다 읽고 있을 틴디요…….”

권 상사는 걱정스럽다는 얼굴빛이었다. 그러나 차 일만은 아무렇지 않다는 투로 지시를 내렸다.

“콜택시를 불러.”

그것뿐이 아니었다. 차 일만은 병원 가는 시간까지도 아파트 주민들이 많이 출입하는 출근시간대에 맞추었다. 그럴 경우 혹시 그들과 마주친다 하더라도 마구잡이로 덤비지는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었다.

“암튼 형님 ‘헷또’ 하나는 정말 기똥차요. 그건 또 은제 생각해냈수?”

다이얼을 돌리면서 권 상사는 어느새 입이 벌어져 있었다.

부산스러움 속에서도 어머니는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기도와 성경읽기를 계속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어머니의 흐느끼는 소리가 거실 밖까지 들려오자 권 상사가 비아냥거렸다. 누가 들으믄 초상낭 줄 알것시유. 하지만 차 일만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일언반구도 없었다.

8시 20분이 조금 넘은 시각, 마침내 차 일만은 열이틀 만에 아파트 문을 나섰다. 한 발 먼저 나간 권 상사가 조용하다는 전갈을 보내오자 그는 곧바로 염 은옥을 앞세우고 아파트 입구로 내려왔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바깥 공기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권 상사가 펴놓은 ‘망’들의 바람에 정말 넘어간 탓일까. ‘빳따’의 아이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차 일만은 콜택시 안으로 염 은옥을 재빨리 밀어 넣었다. 긴장한 탓에 그의 얼굴은 어느새 해장술을 마신 사람처럼 불콰해져 있었다. 온몸에는 여름철인데도 마치 어름창고에 들어섰을 때처럼 소름이 돋았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예요?”

“왜, 벌써 잊어버렸어요?”

“열이틀 만의 외출치고는 기분이 영 아니니까 그렇죠. 또 거기다가…….”

택시가 큰 길로 나서자 염 은옥이 어린 아이처럼 푸념을 해댔다. 어찌 아니 그러겠는가. 자신의 기분이 이럴진대 그녀의 기분도 착잡하리라. 차 일만은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은 따뜻했다.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그녀의 배를 훔쳐보면서 그는 문득 그녀의 웃음매가 눈에 밟혔다.

출근길의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여서 콜택시가 진행하는 속도는 매우 느렸다. 그런 속에서도 권 상사는 떨어질세라, 콜택시 뒤를 바짝 붙어서 쫓아오고 있었다.

“병원까지 옮기게 해서 미안해요.”

차창 밖으로 비껴가는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던 차 일만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일은 자신이 생각해도 무척 잘한 일이었다. 만사는 불여튼튼이었
다. 이런 일에는 특히 더 그러했다. 병원을 옮기자고 했을 때 그녀는 잠시 난색을 표했다. 그건 안돼요. 아이에 대한 기록이 모두 그곳에 있는데……. 더구나 논현동에서 가락동 방면으로 돌려야 한다는 말에는 눈살까지 찌푸렸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차 일만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것도 그나마 일회용일 수 있다는 말까지도 순순히 수용하였다.

“피할 수 있는 데까지는 피해야 한다면서요? 출산할 때까지는…….”

잡힌 손에 힘을 주면서 염 은옥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서 그럴까. 민낯인 그녀의 입술이 파리해 보였다.

그러나 차 일만은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시킬 수가 없었다.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자동차들까지도 그는 무심한 눈길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병원 안은 조용했다. 산모들만 몇 명 눈에 띌 뿐이었다. 그러나 진료실에 들어간 염 은옥을 기다리면서 차 일만은 주변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병원 입구에 ‘망’을 선 권 상사와의 연락을 통해 아무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긴장을 늦추지 말 것을 연신 지시했다.

“아, 글씨, 개미 새끼 한 마리두 얼씬거리지 않으니께 걱정 꽉 붙들어 매슈.”

“그래도 끝날 때까지는 눈도 껌뻑거려서는 안 돼. 알지?”

휴대폰 폴더를 밀어내리면서 차 일만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빳따’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는 지금 뒷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기분으로, 권 상사의 ‘아이들’이 가있는 병원 주변에 진을 치고 있거나, 아니면 벌써 병원을 ‘점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엔 죄 없는 ‘아이’들이나 들볶을 것이었다……. 차 일만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붉으락푸르락 성질을 부리고 있는 그의 등 뒤로 빠드득, 이빨을 가는 강 승길의 소태 씹은 얼굴까지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진료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들어갈 때 9시 32분을 가리키고 있던 시계바늘이 어느새 10시를 넘어가고 있었으나, 진료실의 문은 열릴 기미를 보
이지 않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