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차 일만은 조급증을 내지 않았다. 만삭이 되어 산달을 겨우 한 달밖에 남기지 않은 산모가 뜬금없이 찾아왔는데, 어떤 의사가 대충 넘기려고 하겠는가. 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때였다. 휴대폰의 벨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권 상사였다. 차 일만은 황급히 폴더를 밀어 올렸다. 그의 음성은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형님, 이를 어쩌지유? 그 병원 앞에서 지금 내 ‘아이’들이 ‘빳따’네 ‘아이’덜한티 허벌나게 깨지는 모양인디……. 형님두 알다시피 갸덜은 카드짝이나 만지라믄 ‘왔다’지만, 주먹은 초등핵교 아이덜맹키루 촛짜덜 아니유.”
권 상사는 여차하면 그쪽으로 달려갈 것 같은 기세였다. 차 일만은 우선 그를 붙잡을 필요를 느꼈다.
“그건 이미 예상했던 일이잖아! 거기는 단지 눈속임을 위한 소모품일 뿐이라고, 내가 몇 번씩 ‘이바구’를 해줬냐, 이 짱구야. 그리고 그건 지금 네가 달려간다고 해서 도움이 될 문제가 아니야. 모르긴 몰라도 상황은 벌써 종쳤을 텐데, 뭘.”
차 일만은 그들이 왜 그렇듯 무모한 행동을 감행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피라미 같은 ‘아이’들을 조져서 깜쪽같이 사라진 권 상사와 자신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함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문제라면 벌써 권 상사가 수차례 주지시켜 놓았을 것이므로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옮긴 병원의 소재는 여기에 올 때까지 권 상사에게까지 비밀로 했던 것이므로 조진다고 해서 나올 성질의 것이 아니잖은가. 다친 ‘아이’들이야 나중에 치료를 해준 다음 밥이나 배
불리 먹여 주고, 용돈이나 몇 푼 쥐어주면 될 일이었다.
“그럼 어쩐대유, 우리 ‘아이’들……. 이쪽으루다 부를까유?”
“그건 안 돼, 아직은. 그러니까 오늘 일이 모두 마감될 때까지는 ‘떡’이 되더라도 그쪽에서 ‘떡’이 되어 개기고 있으라고 그래.”
차 일만은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이럴 때일수록 인정에 끌려서는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었다. 이 바닥 생활을 하루 이틀 한 처지도 아닌데, 그런 ‘촛짜’같은 주먹궁리도 할 줄 모르다니……. 그는 혀끝을 찼다. 벽에 걸린 시계는 어느새 10시 2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염 은옥이 진료실에서 나온 시각은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11시 10분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그녀는 그 큰 배를 내밀고 어린 아이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서 차 일만은 진료의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아이 건강하데요. 그 난리를 겪었는데도 끄떡없이 씩씩하게 자라고 있데요.”
염 은옥은 자랑스레 떠들었다. 초음파 조사 등을 통해서 아이의 발육을 생생하게 살필 수 있었다면서 그녀는 의사가 다음 달 초에는 입원을 하는 게 좋겠다는 소견을 주었다는 것까지 상세히 말해주었다.
“수고했어요.”
이윽고 차 일만은 일어섰다. 아직도 갈 길은 멀었다. 그는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그들의 눈을 따돌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제 가고자 하는 길까지도 행운이 꼭 따르리라는 법은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염 은옥을 며칠간 권 상사의 집에 숨기는 작업은 극히 모험적이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승강기 앞에 이르자 염 은옥이 여짓거리다가 물었다.
“그냥 가야하는 거예요?”
“그럼요.”
“나, 냉면 먹고 싶은데…….”
염 은옥이 간절한 눈빛으로 차 일만을 돌아다보았다. 차 일만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뭘……. 그는 문득 자신도 갈증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권 상사도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으로 두 말 않고 찬성했다.
“까짓 그럽시다, 형님.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두 좋다는디…….”
병원 앞은 그래도 조심스러웠다. 그들이 쳐들어올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경계를 늦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차 일만은 재빨리 염 은옥을 권 상사의 승용차에 밀어 넣었다. 핸들은 권 상사가 잡았다. 그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냉면집으로 곧장 차를 몰았다.
냉면 그릇을 말끔히 비운 뒤 염 은옥은 비로소 만족한 듯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웠다. 그녀의 크고 검은 눈동자가 더 맑고 깊어 보였다.
“알지요? 이제부터 권 상사네 집에 가셔야 한다는 거…….”
그러나 지금은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차 일만은 그녀를 더 이상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곧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염 은옥이 미적거리자 권 상사가 너스레를 떨며 반죽을 놓기 시작했다.
“누추하지만 잠시만 우리 집에 가 기시유. 내 집에 가믄 내 에펜네라는 걸출한 위인을 만날 것인디, 그 여자두 지독한 예수장이이니께 아마두 형수님이 지내시는데는 지루하지 않을 것이유.”
염 은옥이 다시 입을 활짝 벌리고 크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차 일만을 의지하는 신뢰가 깊게 배어있었다. 며칠만 기다려 줘요. 이것도 다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니까. 차 일만은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찬 냉면을 먹은 뒤였으나 그녀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선방이 필요하다
“형님 말 문자맹키루 조사는 모두 끝냈으니께, 이잔 형님이 알아서 구어 먹든지 삶아 먹든지 맘대루 하슈. 난 그저 죽이 되나 밥이 되나 형님이 하재는 대루 따를 참이니께…….”
권 상사는 마시던 아이스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차 일만을 건너다보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빳따’는 이틀에 한 번, 혹은 사흘에 한 번꼴로 영웅 나이트클럽에 출근하는 여자의 집에서 묵어간다는 것이었다. 조강지처가 두 눈 시퍼렇게 뜨구 있는디, 그러케 기집질을 해서야 쓰간디요……. 권 상사는 ‘째보’가 전했다면서 반포에 있는 그 아파트의 주소까지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 일만은 그에게 ‘비둘기’를 날렸다는 ‘째보’를 아직도 신뢰할 수가 없었다. 한 번 ‘배신을 때린 아이는 두 번도 때릴 수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이미 수차례 겪은 까닭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을 지금 꼬치꼬치 따지고 있을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머리 숫자’가 모자라는 판국에 그나마 그가 ‘빳따’와 합세하지 않고 우리 쪽에 서 준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선방을 깐다’는 것은 비단 일반인들의 세상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도 곧잘 통용되는 작전 가운데 하나였다. 비밀이 철저히 보장되기만 한다면 적은 인원으로도 방심하고 있는 상대방을 단 일격에 넉 다운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 작전의 매력이었다. 하지만 ‘선방’이라고 해서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깨질 염려도 있는 것이었다. 상대가 낌새를 채면 얼마든지 역습이 가능한 것으로, 그때에는 회복하지 못할 만큼의 큰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도 차 일만은 알고 있었다. 부평 백마장 사건이 그런 종류에 속했다. 서울에서 쳐들어갔던 막강한 구로동파가 역 앞에서 ‘물 먹은’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차 일만은 자신이 있었다. 숫자를 믿고 방심하고 있을 게 빤한 상대의 허를 찌른다면 승산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고 차 일만은 판단하고 있었다.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더 이상은 ‘빳따’에게 밀릴 공간도 없을뿐더러, 더 이상 밀린다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건달들의 역사는 건달들이 만들어간다……. 비록 숫자는 적지만 ‘선방’을 때리기로 작정한 이상,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확실한 거지?”
“아, 그렇다니께유!”
같은 소리를 ane는 게 벌써 몇 차례인가. 권 상사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들은?”
“두어 명…….”
권 상사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 그 두어 명도 ‘촛짜’들이었으므로 이번 ‘전쟁’을 치르기에는 역부족인 실력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걱정스러운 빛을 나타내지 않았다. 어차피 한 배를 탄 이상 걱정한다고 해서 뒤돌아갈 수는 없는 길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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