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 식물 탐구의 역사
2천년 식물 탐구의 역사
  • 김선영 기자
  • 입력 2011-10-31 15:45
  • 승인 2011.10.31 15:45
  • 호수 913
  • 3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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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서양 식물탐구 2천년 通史 출간
2000년 식물학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탐험하고 여행한 인문교양서가 출간됐다. 2005년 영국에서 출간된 이 책 ‘2천년 식물 탐구의 역사’는 수많은 언론의 찬사를 받았으며 ‘데일리 텔레그래프’ ‘올해의 책’에 선정되는 등 영예를 안았다. 방대한 문헌연구와 광범위한 현장답사, 무엇보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테오프라스토스를 거쳐 린네까지 내려오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갈등관계에 있는 58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그들의 활약상을 사회문화적 역사 풍광과 아울러 조명했다.

이 책은 오늘날 적용되고 있는 식물 분류의 규칙이 탄생하기까지 그 과정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활약상을 담아낸 역사서다(원제 The Naming of Names). 원제에서 연상되듯 이 책은 식물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식물의 이름 짓기’에 관한 에피소드를 주로 담았다.

수 세기 전 유럽에서는 약재로 쓰기 위해 식물을 들여오는 일이 잦았다. 이 당시 각 식물의 의학적 가치는 하나의 식물을 다른 종과 구별해내는 식물 채집꾼의 능력에 따라 달라졌다. 그러나 식물에 이름을 붙이고 구별하는 과정은 자연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당대의 욕망과 맞물린 것이기도 했다.

초기 르네상스 시기,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자연계에 대한 연구와 분류로 이어진 가운데 이는 식물과 인간의 관계를 실증적인 틀 안에서 재정립하는 계기를 낳았다.

특히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고 몇십 년 후 가장 먼저 출판된 것은 식물 관련 책이었고, 화가들은 식물의 세부적인 면을 표현하는 것으로 책 제작에 참여했다. 화가들의 도움을 받은 식물학자와 자연학자들은 식물의 이름 체계에 대해 합의를 보고자 식물을 실제로 관찰, 분류하는 작업을 지속했다. 이후 식물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전파되었고 식물학에는 눈에 띄는 진전이 있었다. 하지만 유럽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새 식물들은 식물 연구자들에게 식물의 명명 작업이 보다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케 했다.

저자 애너 파보르드는 이러한 내용이 포함된 식물 탐구의 2000여 년 역사를 방대한 기록과 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식물을 분류하는 일이 시대의 철학적ㆍ종교적 가치, 정치권력과 경제 상황, 매체의 발명과 지식의 유통 과정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멘탈리티와 무관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식물 연구자들의 성공과 실패 속에 담긴 인생의 아이러니

이 책에는 식물 연구의 역사를 만들어간 다양한 인물들의 성공담과 실패담이 교차하고 있다. 그 중에서 식물 연구에 생애를 바친 영국의 성직자 윌리엄 터너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16세기 식물 연구의 열기가 유럽에서 활발하게 일어났지만 영국은 예외였다. 1564년 터너가 ‘신본초서’의 마지막 부분을 완성하고 나서야 영국은 제대로 된 식물 서적이 나온 곳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터너는 식물의 잎사귀, 줄기 또는 꽃의 자세한 모습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능력, 올바른 종류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는 깊은 관심, 특히 서로 다른 나라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연구하지만 비슷한 성격의 학자들 사이를 잇는 복잡한 연락망을 꾸준히 구축해내는 능력이 있었다. 이는 그가 뛰어난 식물학자들이 무수히 등장했던 시대에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요인이었다. 하지만 결국 언어는 그의 발목을 잡았다. 터너는 ‘식물의 이름’에서 영어로 책을 쓰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당시 영국에 사는 300만 명의 사람들 가운데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50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의 책은 영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영국을 벗어난 대륙에서는 독자를 전혀 확보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라틴어가 공용어였던 것이다.

어쨌든 당시 독일로 망명했던 기간에 고국의 언어인 영어로 썼던 그의 책은 다른 언어로 번역조차 되지 못했다. 그리고 수많은 다른 선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이뤄낸 업적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터너가 참을성 있게 그간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로 된 식물의 이름을 통합하여 모아놓은 덕분에 식물에 관한 혼돈은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17~18세기에는 당시 학자들이 선보였던 식물 이름 짓기 대신 린네가 고안한 두 단어로 된 명명 체계인 ‘이명법’이 점점 보편화되었다. 식물 연구와 관련이 깊은 식물학, 분류학, 계통학 등의 학문이 발달되었고 이제 과학자들은 식물의 DNA를 분석함으로써 외적인 특징으로는 결코 알아볼 수 없는 좀 더 분명한 식물 간의 연관성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다.

‘속씨식물 계통연구 그룹’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은 학자들은 용감하게도 식물 계층구조의 대대적인 구조 개혁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테오프라스토스 이후 처음으로 식물을 유의미한 집단으로 분류하고자 했던 체살피노는 스위트피, 미모사와 가까운 실거리나무과라는 새로운 과에 이름이 사용되는 영광을 얻었다. 플리니우스와 함께 의학용 식물의 최고 권위자였던 디오스코리데스는 그보다 높은 마목이라는 목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테오프라스토스의 이름을 딴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제법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이 표현을 통해 저자는 식물 탐구의 역사 속에 담긴 인생의 아이러니를 느꼈던 것은 아닐까.

[김선영 기자] ahae@ilyoseoul.co.kr

김선영 기자 aha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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