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체성 위기…박근혜 드디어 ‘목소리’ 낸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촛불 해결사’로 나서야한다는 당 안팎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당 대표 진실게임’ 등 박 전 대표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여권 내 논란이 일단 7·3 한나라당 전당대회를 계기로 수그러들었기 때문이다. 여권 지도부는 매파가 물러난 자리를 비둘기파가 채웠고, 촛불민심에 혼쭐이 난 청와대도 박 전 대표의 역할론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박희태 신임 당 대표를 매개체로 이명박 대통령(MB)과 박 전 대표가 촛불정국을 협의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다시 ‘보수와 진보의 힘겨루기’란 혼미상태로 접어든 촛불정국에서 보수 세력 결집을 위한 박 전 대표의 역할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그 동안 ‘재협상’요구로 MB를 압박하던 박 전 대표가 ‘고시도 잘못이고 과격시위도 잘못’이라는 양비론(兩非論)으로 누그러진 점도 주목할 만하다.
“신임 당 대표가 풀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촛불 거리시위 해결이다. 박 전 대표를 앞세워 국민에게 호소해야 한다. 대통령의 힘만으로 막을 수 없다”
지난 7월 3일 막을 내린 한나라당 전당대회 직후 박희태 신임 당 대표의 측근이 기자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그는 “박희태 대표는 촛불정국과 관련해 자기주장을 내세우기 보다는 MB와 박 전 대표사이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어서 “친박 복당문제를 조속히 해결하는 것은 물론 김모 의원에게 건교위원장 자리를 배려하는 등 등 국회와 당 요직에 친박계를 배려하는 탕평책으로 박 전 대표의 서운했던 마음을 달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재협상 공세에서 양비론((兩非論)으로
그의 설명대로라면 박 전 대표가 ‘비둘기파의 중재’속에 MB와 협력을 통해 촛불정국 해결사로 나설 가능성이 높아졌다.
촛불시위가 폭력시위로 변질되던 지난달 30일 쇠고기 정국에서 말을 아껴 오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시민일보 고하승 편집국장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정부의 성급한 고시도 잘못, 과격시위도 잘못”이란 입장을 밝혔다. 얼핏 보면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 양비론((兩非論) 같지만 쇠고기 정국과 관련한 박 전 대표의 일련의 발언을 분석해보면 박 전 대표의 인식 변화가 감지된다. 박 전 대표는 그 동안 줄기차게 재협상을 요구하면서 MB를 압박해 왔기 때문이다.
지난 4·9총선 후 4월 25일 여의도 출현 이외엔 침묵의 정치를 펼치던 박 전 대표가 쇠고기 파동과 관련해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5월 초였다.
그는 5월 6일 “국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방법이 재협상밖에 방법이 없다면 재협상이라도 해야 한다”며 재협상을 공식적으로 촉구했다. MB와의 5·10 청와대 회동 때는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그런 대책이 필요하다”며 재협상 기조를 이어갔다.
이어 오세아니아 순방 중이던 5월 15일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정부가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며 정부를 압박했다.
6월 2일에는 “정부가 국민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발언한데 이어, 6월 6일 국회 본회의 출석에 앞서 “쇠고기 수입을 재협상해야한다”고 촉구했다.
이처럼 박 전 대표는 ‘양비론’ 발언 전까지 50여일 이상 ‘재협상, 또는 그에 준하는 근본대책’을 촉구하며 MB의 독주에 제동을 걸어왔다.
여권 관계자는 “촛불정국이 폭력거리시위로 변질되고, 보수와 진보의 힘겨루기 양상을 보이면서 국가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박 전 대표의 변화를 분석했다.
진보-보수 양분된 혼미정국
친박계 한 인사도 “박근혜의 콘텐츠는 국가정체성이다. MB가 촛불에 맞서 ‘국가정체성 수호’를 강조하고 홍준표 원내대표가 촛불 배후로 반미 세력을 언급한 것을 놓고 고심하신 것 같다”고 전했다. 촛불에 대해 한층 강경해진 보수층의 목소리도 박 전 대표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촛불시위를 “위대하지만 끔찍한 디지털 포퓰리즘”으로 표현했던 소설가 이문열씨는 “이제는 의병과 같은 반대 여론이 크게 일어나야 한다” 며 촛불반대 의병운동을 주문했다. 언론인 조갑제씨는 MB에게 ‘목숨을 걸기 싫으면 물러나라’면서 촛불에 대한 강경대응을 촉구했다.
소설가 복거일씨는 ‘이념적 정체성의 혼란’으로 규정했고, 언론인 유근일씨는 MB와 박 전 대표, 이회창 총재로 이어지는 보수 동맹을 제안했다.
국가정체성 공방과 촛불 배후세력 수사가 본격화될수록 보수진영의 결집력이 강해지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보수동맹이 이뤄질 경우 해결사로는 단연
박근혜 전 대표다. 국민들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거의 믿는다. 그만큼 대중적 설득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전망했다.
현 상황에서 보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개입 이후 과격거리시위는 줄었지만, 향후 촛불정국에서 ‘진보와 보수의 힘겨루기’는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실제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이어 개신교에서 시국기도회, 불교계에서 시국법회를 가졌고, 주말에 노동계가 대규모 촛불집회에 나서자, 보수단체의 맞불집회도 본격화되고 있다.
박 전 대표 측도 친박복당 등 그 동안의 갈등 요인들을 조만간 마무리 짓고, 새로운 당 지도부와 함께 촛불 해법 구상에 들어갈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친박계 한 의원은 “촛불 해법을 고민 중이다. 조만간 답을 내 놓을 듯하다”고 밝혔다.
7·3전대 경선에서 박희태 대표를 도운 여권의 핵심도 “박근혜 전 대표와 함께 가는 것이 맞지 않느냐?”고 거들었다.
친이 소장파 한 의원은 “전대를 통해 보여준 친박계의 단합력을 정국 해법에 활용해야 한다. 박 전 대표에게 적대적이던 세력은 거의 물러난 상태”라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발족한 선진경제연구포럼(한나라당 나성린 의원이 주도)의 한 의원도 “박 전 대표가 향후 대권가도를 순항하기 위해서는 4·9총선 과정에서 보여준 계파의 수장 이미지를 벗어야 한다.
촛불정국은 공당의 지도자로서 면모를 보여줄 좋은 기회”라고 밝혔다.
MB와 촛불 정국 협의 기대
때에 따라서는 MB와 박 전 대표의 직접 회동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MB는 6·10 대규모 촛불시위를 전후해 직접 전화를 걸거나 측근들과 여권 지도부를 청와대로 불러 장시간 면담하는 방식으로 촛불 민심을 수렴한 바 있다.
MB의 측근도 “대통령은 인연을 중시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족들을 하나둘 잘라 낸 것은 박 전 대표와의 관계 회복을 통해 촛불정국을 해결하려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 측 관계자도 “촛불정국의 방관자로만 있을 경우 당내는 물론 보수진영의 비난에 직면할 수 있다. 때로는 국정의 협력자로, 때로는 MB의 견제자로 변신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왜 박근혜인가?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오랜 침묵 끝에 ‘폭력시위의 중단’을 주문하자마자 폭력시위가 수그러졌다. 박근혜의 마법이 통한 것일까?
박 전 대표는 지난달 30일 침묵을 깨고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왜 박근혜인가(시민일보 고하승 국장의 칼럼집)’ 출판 기념회에 등장했다. 28일과 29일 양일 촛불시위가 최악의 폭력사태로 얼룩지면서 경찰과 시위대, 양측이 수백여명의 부상자를 낸 직후였다.
박 전 대표는 이 자리에서 “과격 불법 시위와 경찰 과잉 진압이 어느 게 먼저인지는 논란이 있지만 불행한 일”이라면서 “폭력 시위는 본래의 취지에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폭력시위가 거짓말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에는 당.정.청이 ‘국가정체성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강경대응에 나서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폭력지위 자제를 호소하는 등 촛불 정국 상황이 급변한 영향이 컸었다.
그러나 말을 극도로 아끼는 박 전 대표가 ‘말’하자마자 폭력시위가 꼬리를 감춘 것은 인과성을 고려하지 않는다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박근혜식 마법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천막당사에서 ‘한나라당의 부활’을 외쳤을 때 기적같이 121석을 건졌고 승산이 없던 재보선 현장에도 박 전 대표만 등장하면 승리의 여신이 찾아왔다”고 밝혔다. 이어 기적 같은 승리의 드라마를 펼쳤던 히딩크의 마법을 언급하면서, 박근혜식 마법의 원천으로 그의 ‘원칙과 소신’을 꼽았다.
이날 출판기념회의 저자인 고하승 국장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조차 초연함을 보이는 그녀의 담대함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 놓을 수 있다는 결연한 평소 의지’에서 박근혜식 힘의 원천을 찾았다.
한나라당 유승민 의원도 이 책의 추천사에서 ‘박정희와 육영수의 DNA를 물려받은 건 분명하지만 ,박근혜에게는 그녀만의 꿈과 도전이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고 국장이 저서에서 ‘4·9총선에서 이른바 MB마케팅을 사용한 이재오, 이방호 의원 등이 낙선하고, ‘근혜 마케팅’을 사용한 홍사덕, 김무성 의원 등이 당선된 것도 이같은 현상을 증명하는 사례일 것(고하승 著 왜 박근혜인가? 355페이지)’이라고 분석한 것도 박근혜식 마법때문이 아닐까?
결국 히딩크의 마법처럼 풀리지 않는 박근혜 마법의 수수께끼, 과연 박근혜식 마법은 위기의 MB와 여권을 구하는 촛불정국의 해법이 될 것인가?
오경섭 기자 kbswav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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