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고개 숙일 때 朴은 움직였다

지난 19일, 이명박 대통령(MB)은 말이 많았지만 박근혜 전 대표는 침묵했다. 그러나 ‘MB의 말’이 국민에게 엎드린 사죄였다면 ‘박 전 대표의 침묵’은 권력 핵심으로 나아가는 승부수였다. MB가 청와대 수족들을 보내리라 다짐하던 날, 친박계의 당내 좌장 허태열 의원(부산 북-강서을 3선)이 당권 도전을 선언했다. 박 전 대표가 친박계 전체 좌장 ‘김무성 카드’를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당내 좌장격인 허 의원에게 ‘침묵의 선택’을 내린 것이다. 이에 따라 ‘박희태-정몽준(MJ) 양강구도’로 가던 7.3 한나라당 전당대회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허태열-진영 연대, 박희태-공성진 연대, 박희태-MJ 연대, 친박-MJ 연대 등 각종 시나리오가 쏟아지고 있다.
MB와 청와대 내각이 민심의 촛불에 혼쭐나고, 이상득-정두언, 소장파의 갈등으로 권력 핵심에 공백이 생기는 사이에 ‘통첩과 침묵의 여왕’ 박근혜식 종합 예술의 정치가 시작되고 있다.
MB가 ‘쇠고기 파동’과 관련, 지난 19일 국민 앞에 세 번째 고개를 숙였다.
대선공약이었던 대운하 사업을 국민이 반대한다면 추진하지 않겠다고 했다. 쇠고기 정국과 관련 미국이 추가협상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고시를 보류하거나 수입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허태열 깜짝 카드 꺼내
MB는 특히 "청와대 비서진은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대폭 개편하고, 내각도 개편하겠다"며 읍참마속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S라인(서울시 인맥),강부자(강남 부동산 부자)’논란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청와대와 내각이 출범 116일 만에 결국 중도 하차한 것이다. 같은 날 박근혜 전 대표(친박)계의 당내 좌장인 허태열 의원은 여의도 당사에서 당내 친박계 의원 11명(유정복 최경환 이혜훈 이정현 구상찬 김선동 손범규 윤상현 김태원 서상기 이범관)이 도열한 가운데 전당대회 출사표를 던졌다.
허 의원은 이날 "네편,내편 가르는 분열의 정치는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면서 "우리가 참여해야 당이 균형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해 친박 세력의 대표주자임을 시사했다. 허 의원은 특히 “최고위원 한 자리가 목표가 아니다. 당 대표가 목표”라고 강조했다.
‘박희태-정몽준(MJ)’ 당권 양강 구도에 특급변수가 나타난 것이다. 이로써 한나라당 7·3전당대회는 ‘친이계 대 친박계’의 대결구도로 치러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당초 허태열 의원은 불출마가 예상됐다. 여권 관계자는 “허 의원이 그동안 여러차례 당권 도전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혔지만 박 전 대표가 허락하지 않는 바람에 포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허 의원은 이날 박 전 대표의 '허락' 여부에 대해 "두 번 정도 말씀을 드렸는데 ‘출마를 하라 말라’ (말을)하지 않으셨다. 전적으로 저의 결정이라 생각했다“며 침묵의 재가를 받았음을 시사했다.
허 의원은 또 "오늘 유정복 의원을 통해 박 전 대표에게 보고해 달라고 했고, 유 의원을 통해 '열심히 하시라'는 격려의 말을 전해 들었다"며 박심(朴心)의 허락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박 전 대표는 이미 지난 4·9총선기간 동안 당외 친박계 후보들이 지지를 부탁할 때도 ‘침묵의 지원’으로 거센 친박 돌풍을 몰고 온 바 있다.
허 의원의 출마로 일단 '친박계' 후보들 간 재정비가 불가피해졌다. 공식 출마를 선언한 진영 의원(서울 용산 재선)은 조만간 박 전 대표 측을 만나 허 의원과의 연대를 모색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영남권 출신 김성조 의원(경북 구미갑, 3선)의 경선중 행보도 관심자리다.
허태열 카드에 MB계 긴장
MB계는 이같은 ‘허태열 당권 카드’에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다.
당외 친박계의 복당으로 당내 50여명에 달하는 친박계 의원들의 표가 허 의원에게 쏠릴 경우 당권 구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같은 영남권 출신으로 MJ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의 경우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지난 20일 CBS가 한나라당 당 대표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MJ가 26.4%로 1위, 박희태 전 부의장은 18.3%로 2위를 기록했다. 지난 조사에 비해 MJ는 제자리에 머문 반면, 박 전 부의장은 2.4% 상승해 두 사람 간 격차가 다소 좁아지는 양상이었다. 여기에 박 전 부의장측은 당내 지지기반이 MJ보다 강해서 ‘해 볼만 한 승부’였다.
그런데 느닷없는 ‘허태열 변수’로 경남 남해-하동이 지역구였던 박 전 의원은 ‘영남 친박’ 표를 일정 부분 허 의원에게 내줄 수밖에 없게 됐다. 이미 박 전 의원이 친박 복당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영남권 낙선 당협위원장 10여 명이 MJ 쪽으로 기울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허태열 카드는 ‘MJ 당권’에 어느 정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나라당 당권을 둘러 싼 ‘박근혜-MJ연대설’이 솔솔 흘러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요서울>은 이미 여러 차례 7·3 전대에서 ‘박근혜-MJ연대 가능성’을 보도한 바 있다.
여권 관계자는 “필승카드인 김무성 의원을 당 대표로 내보내지 않고, 당내 좌장격인 허 의원을 선택한 것이 의아스럽다. 물론 허 의원은 처음부터 전대출마 의사를 밝혀왔지만 당 대표로 약하지 않는가?”라며 ‘박근혜-MJ연대설’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러나 친박 측은 “당협 위원장 250여명 중 80여명이 친박인데 우린 무조건 허 의원을 찍을 것”이라며 “허 의원은 당 대표가 되기 위해 출마했지 누구를 당 대표로 밀기 위한 들러리가 아니다”고 밝혔다.
서울시의회 의장 경선
절묘한 역학구도 친박 승리
MJ 측도 "표면적으로 보면 허 의원 측이 박 전 부의장 표를 갉아먹겠지만, 친이 측이 위기의식을 느껴 결집하면 오히려 불리할 수도 있다"고 했다.
박희태 전 부의장도 "1인 2표이기 때문에 지역기반이 겹쳐도 큰 영향은 없을 것"고 밝혔다.
‘돈 잔치’의혹으로 얼룩지긴 했지만 지난 18일 서울시 의회 후반기 의장 후보를 뽑는 한나라당 경선에서 친박계가 초반 열세를 딛고 절묘한 구도 속에서 승리한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날 경선에는 중립 성향의 박주웅 의장과 친박계 김귀환 한나라당 서울시 의회 대표의원, 그리고 친이계 정병인 의원과 이대일 의원이 출마했다. 1차 투표에서 친박계 김 후보는 34표로 친이계 정 후보에게 4표 뒤졌다. 중립성향 박 의장과 이 의원은 지지층의 결집력이 약해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결선 투표에서 2,30명으로 예상되던 부동층 가운데 16표가 친박계로 이동한 반면, 정 후보는 12표밖에 더 하지 못했다. 친이계로 분류되던 표마저 일부 이탈한 셈이다. 결국 50 대 50 동수, 연장자 우선 순으로 친박계가 승리했다.
여권 관계자는 “친박계의 결속력을 놀랍다. 반면 친이계로 분류한 의원들이 의외로 부동층의 투표 양상을 보였다. 말만 친이계일 뿐이다. 이번 선거는 이 구도를 절묘하게 보여줬다”며 “7·3전대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7·3전대가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부동층 폭이 예상외로 넓다. MB의 국정지지율 하락도 주요 변수다. 여권 관계자는 “친박계의 당내 결집력과 MB 지지율 하락으로 인한 친박진영의 반시이익, 박 전 대표의 대중적 인기 등 다양한 변수들을 감안하면 허태열 카드의 파괴력이 예상보다 훨씬 클 수 있다”고 내다봤다.
청와대와 여권이 최근까지 ‘박근혜 당대표 카드’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도 이 같은 박 전 대표의 파괴력 때문이다.
본지 <일요서울>은 이미 738호를 통해 MB와 가까운 인사가 MB와 독대직후 ‘총리 추대에 대한 박 전 대표 측의 반응에 회의를 보이면서, 당대표 가능성을 타진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靑·여권 ‘박근혜 당대표’ 미련 못 버려
여권 관계자는 “이상득 의원과 소장파 등이 꾸준하게 박근혜 당 대표 카드를 언급했던 것도 박 전 대표와의 정면 승부를 피하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결국 7·3전대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좌장 허태열을 ‘깜짝 카드’로 내보냈다. 앞으로 친박계의 영남권-수도권 후보인 허태열-진영 의원과 친이계의 영남권-수도권 주자인 박희태-공선진 의원 간 연합전선, 박희태-MJ 단일화, 친박-MJ간 연합 전선 등 갖가지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지만 결론은 하나, ‘박근혜 전 대표가 누구의 손을 들어 줄 것이냐에 달렸다.
결국 7.3전대 당권의 향방은 입으로 말하지 않는 침묵의 박근혜 전 대표, ‘그의 손 안’에 있는 셈’이다.
#다시보는 ‘승부사 박근혜’
“내 힘으로 당선, 그것으로 됐다”
‘당대표를 대통령이 좌지우지할 수 없다’
MB와 5·10청와대 회동 직후 ‘당 대표 진실게임’이 벌어졌을 때 박근혜 전 대표가 보인 반응이었다.
민심과 당심이 당 대표를 뽑는 것이지 이심(李心)이 낙점할 수 없다는 의미다. 박 전 대표의 당권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박 전 대표는 이미 ‘총리 추대설, 당 대표 추대설’ 등을 일축한 바 있다.
결국 자신의 당내 왼팔 ‘허태열’을 통해 승부수를 던진 박 전 대표, 그는 지난 2000년 한나라당 5·31 전당대회에서도 여성 몫의 지명직을 버리고 부총재직 경선에 출마했다. 박 전 대표는 최병렬, 강재섭, 이부영, 박희태 의원 등 14명이 나선 부총재 경선에서 1천5백표를 얻어 최병렬 후보(1천8백표)에 이어 2위로 부총재직에 당선됐다. 이부영, 하순봉, 강재섭, 박희태 후보 등이 뒤를 이었다.
경선 전날까지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렸지만 박 전 대표를 견제하기 위한 조직표가 움직이면서 선두를 놓쳤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결과에 대해 “나는 담담했다.
최선을 다했고 내 힘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역시 승부사다운 표현이다.
오경섭 기자 kbswav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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