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기획] 15명 식솔 데리고 탈북한 길수 가족 스토리-④
[탈북기획] 15명 식솔 데리고 탈북한 길수 가족 스토리-④
  • <정리=정재호 기자>
  • 입력 2020-08-28 14:39
  • 승인 2020.08.28 17:53
  • 호수 1374
  • 2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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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소는 중국의 돼지우리보다 못했다”

[일요서울ㅣ정재호 기자북한인권국제연대 문국한 대표는 ‘장길수 가족’ 탈북을 주도한 주인공이다. 문 대표는 지난 1999년 문구 사업을 위해 중국에 진출했다가 알게 된 조선족 여성을 통해 길수 가족과 친척을 소개 받았다. 당시 15명이나 되는 길수 가족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북한을 탈출했다. 문 대표는 지난달 28일 일요서울과의 만남에서 “20년째 북한인권운동을 해왔지만 북한의 인권상황과 중국에서 떠돌는 탈북자 인권상황은 변한 것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지난 2000년 문 대표는 길수 군이 경험한 북한의 인권실태를 글과 그림으로 알리기 위해 ‘눈물로 그린 무지개’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현재 책은 절판됐다.

주변 환경이 지저분해 구호소에는 늘 바퀴벌레와 빈대가 우글거렸습니다.[문학수첩]
주변 환경이 지저분해 구호소에는 늘 바퀴벌레와 빈대가 우글거렸습니다.[문학수첩]

 

장길수 - 16세. 함경북도 화대군 출생.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아버지와 군대에 간 형님을 남겨 둔 채 어머니와 작은형 등 일가족 3명이 탈북, 그 후 두 번에 걸쳐 가족을 구하려고 두만강을 건넜다.

-“내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구호소로 옮겨온 우리는 우선 나무 패는 일을 했다. 한창 나무를 패고 있는데 경리원 아줌마가 우리더러 오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너 그전에 여기 들어왔던 아이구나” 했다. 

나는 사람을 잘못 보았을 것이라고 시치미를 뗐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 기억력이 좋아 한번 본 사람은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분명 나를 본 기억이 있다며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계속 모른다고 잡아뗐다. 내가 하도 우기자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여기에 잡혀 들어온 적이 있었다. 북한에서는 만 17세가 넘는 아이들을 성인으로 인정한다. 중국으로 넘어간 성인은 정치범 수용소에 집어넣고, 17세가 안된 아이들은 모두 구호소로 인계했다. 

지도원들은 우리들이 나이를 속인다고 계속 따져 물었으나, 우리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들은 우리 나이가 17세가 넘었으면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어 공을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우리가 한창 나무를 패고 있는데 경리원 여자가 우리를 찾았다. 우리는 7~8세 어린 꼬마들과 같이 줄을 섰다. 경리원은 이제부터 한 명씩 노래를 불러보라며 민국형부터 시켰다. 민국형은 ‘나의 조국’이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민국형이 노래를 부르자 그들은 박수를 치며 잘 부른다고 칭찬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여기서는 노래를 부르라면 부르고, 일을 하라면 해야 되는 곳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다. 

내가 노래를 다 부르자 이번엔 ‘김일성 장군의 노래’, ‘김정일 장군의 노래’, ‘영원히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를 모두 합창으로 부르게 했다. 노래가 모두 끝나자 식사 시간이 되었다. 

북한에는 정치법이 없다고 합니다. 가족요양소, 집결소, 교화소 등의 그럴듯한 이름들이 모두 정치범 수용소나 마찬가지입니다.[문학수첩]
북한에는 정치법이 없다고 합니다. 가족요양소, 집결소, 교화소 등의 그럴듯한 이름들이 모두 정치범 수용소나 마찬가지입니다.[문학수첩]

 

그러나 식사란 게 겉보리를 갈아 그 가루에 풀을 섞어 만든 가루밥이었다. 돌이 마구 씹히고, 삼키려고 하면 목이 막혀 넘어가지 않았다. 밥은 새까맣고 겨가 많이 보이고 풀이 가득 섞였는데 그나마 한 줌도 못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9명이었다. 나와 민국형과 보모 한 명 그리고 아이들이 6명이었다. 그런데 6명의 꽃제비 아이들은 넋을 잃고 맛있게 잘 먹었다. 국은 까만 미역국이었는데 미역에 곰팡이가 슬어서 썩었는지 국이 시큼하고 쓰기만 했다. 

몇 끼니를 굶은 우리는 먹기 싫어도, 맛이 없어도 억지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식사가 끝나자 우리는 경리원 아줌마를 따라 어떤 창고로 갔다. 그런데 그 창고는 썩은 냄새로 가득했다. 그녀는 그 안에서 옷을 꺼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입고 있는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우리가 영문을 몰라 가만히 서 있자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우리에게 짧은 반팔 상의와 팬티만 입게 했다. 그리고 무릎까지 오는 헐은 바지를 주었는데 너무 형편이 없었다. 고무줄도 없어 자꾸 바지가 흘러내렸다. 그 창고를 나와 호실로 갔다. 구호소에는 50개 되는 칸이 있는데 전깃불이 있는 칸은 단 둘뿐이었다. 지도원방과 경리원, 보모들이 있는 주방만 불이 들어왔다.

우리가 들어가는 칸은 방이라기보다 중국에서 봤던 돼지우리보다 못했다. 전깃불도 없었으며 온통 빈대가 가득했다. 어린 아이들 여섯 명이 모두 우리 칸에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에게 옥수수 이삭 하나씩을 주었다. 경리원 아주머니가 줬다는 것이었다. 옥수수는 영양이 좋지 못해 알이 채 영글지 않은 물렁한 것이었다. 또 너무 작아 한입에 다 들어갔다. 그러나 배가 고프니 그마저도 맛있게 먹었다. 

잠을 자기 위해 바닥에 누워 있으니 빈대가 물기 시작했다. 어찌나 세게 물던지 아프기도 하고 가렵기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빈대가 피를 빨아먹어서인지 빨갛고 넓적하였다. 크기도 다양했다. 빈대를 죽이면 새빨간 피가 나왔다. 빈대의 몸에서 나온 피는 너무 역해서 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밤만 되면 천장 위에서 빈대들이 마치 비 오듯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낮이면 구호소 벽을 타고 천장 위에 올라가 있다가 밤만 되면 우리를 못살게 굴었다. 그날은 빈대들 때문에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다. 빈대가 많은 것은 우리 호실뿐만이 아니라 구호소에 있는 모든 호실이 전부 그랬다. 

밤이 깊어 새벽 2시쯤이었다. 나는 도망칠 궁리를 했다. 전에 여기에 들어왔다 도망을 친 경험이 있기에 살며시 물을 열어봤다. 그러나 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낮에 지도원이 스무 살 되는 ‘철호’를 시켜 문을 지키게 했다. 나는 문을 조심스레 열며 철호에게 변소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그는 갔다가 빨리 오라고 했다. 문을 열었으나 복도가 너무 깜깜했다. 한 걸음 내딛기가 힘들었다. 나는 벽을 더듬거리며 변소로 갔다. 

변소에는 아무리 보아도 도망칠 만한 곳이 없었다. 나는 다시 호실로 돌아오며 살펴봤다. 철호는 복도 바닥에 겨울 군대 외투를 깔고 누워 있었다. 재빨리 나는 문 앞에 받쳐놓은 걸상을 당겨 사람이 나갈 수 있게 했다. 나는 민국형을 깨우고 열어 놓은 문을 통해 먼저 도망치라고 조용히 말했다. 민국형은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걸어 나가던 중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그 소리와 함께 우리 문에서 보초를 섰던 철호가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구호소 직원들이 모두 일어났으나 민국형은 도망친 상태였다. 그들은 내가 있는 호실로 찾아와 손전등으로 안을 비췄다. 나는 숨을 죽이고 잠을 자는 척했다. 구호소는 다시 적막해졌다. 민국형이 탈출한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철호가 다시 잠든 틈을 타서 도망을 쳤다. 그러나 구호소를 벗어나 얼마 뛰지도 못하고 바로 잡혔다. 

지도원은 나를 발로 차고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내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정리=정재호 기자> sunseoul@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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