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대운하 보류’ 노림수 있다
청와대 ‘대운하 보류’ 노림수 있다
  • 김승현 기자
  • 입력 2008-04-29 10:44
  • 승인 2008.04.29 10:44
  • 호수 731
  • 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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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 정치학’정치권 손익계산서
‘한반도 대운하를 반대하는 전국교수모임’ 발족식이 지난 3월 25일 서울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 김종욱(가운데) 공동대표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최대 공약이었던 ‘대운하 구상’이 총선 이후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로 재부상하고 있다. 대운하 구상의 전도사를 자처했던 이재오 의원이 4·9 총선에서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에게 패하며 낙선한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연내 추진을 준비하던 청와대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청와대가 최근 국정과제 보고회의에서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제외시킨 것도 상승하는 반대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총선 이후 격변하고 있는 정치권은 ‘대운하 구상’과 관련 새로운 손익계산서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다.

‘대운하 구상’의 물줄기를 돌린 것은 다름 아닌 민심이었다.

전도사를 자처한 이명박 대통령(MB) 최측근 이재오 의원이 “대운하 공약을 심판하겠다”던 문국현 대표에게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총선 결과에 ‘화들짝’

총선에서 당선된 친이계만 100여명에 달하지만 ‘대운하 구상’에 대한 의지는 예전 같지 않다. 경향신문 조사에 따르면 한나라당에서도 반대와 입장 유보가 찬성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나라당 당선자 중에서도 조건부를 포함 찬성한 응답률은 33.3%에 그쳤고 유보와 반대(조건부 포함)가 각각 48.6%와 11.1%였다.

한국일보 조사에서도 당선자의 절반이 넘는 135명(53.8%)이 ‘반대한다’고 답했고 ‘찬성한다’는 의견은 47명(18.7%)에 그쳤다.

각종 조사에서 대운하에 대한 반대 여론이 60%를 넘는 흐름을 정치권이 외면할 수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로 지적된다.

한나라당과 청와대가 이처럼 대운하 구상에 신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총선 결과가 계획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대운하 전도사’였던 이재오 의원은 선거전 “대운하 건설은 버릴 수 없는 역사적 과제”라며 강력 추진을 주장했었다.

청와대도 인수위 시절부터 대운하 추진을 물밑에서 준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외 홍보 등 외부 작업엔 소극적이었지만 실무팀들이 구체적인 로드맵까지 작성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와 현대건설·대우건설·삼성물산 건설부문·GS건설·대립산업 등 건설사들이 정보를 공유하며 ‘밀약’을 추진하고 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청와대는 당초 180석 가까운 의석을 확보해 대운하 구상을 연내에 신속하게 추진하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나도 속았다”고 할 정도로 선거 결과는 과반수 의석을 겨우 넘었을 뿐이다.


“특별법 통과 불가능”

당내 친 박근혜 전 대표 진영과 친박연대, 친박 무소속 연대 당선자들은 일치감치 ‘대운하 추진 반대’에 방점을 찍은 상황이어서 분위기는 더욱 비관적으로 흐르게 됐다.

4월 총선 이후 민자 건설사 컨소시엄을 대상으로 제안공고를 내고 6월 안으로 ‘한반도대운하 특별법’을 상정해 통과시키겠다는 계획도 사실상 어렵게 됐다.

총선 전 대운하론자들은 “국회에서 특별법이 통과될 경우 국민의 검증을 받은 것과 같다” 며 “찬반 국민투표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해 왔지만 제동이 걸린 것이다.

이에 따라 시행사 확정→ 운하 설계→2009년 초 운하 착공 이라는 로드맵도 변경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청와대의 최근 움직임도 이 같은 ‘회의론’이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정부는 대운하 사업을 193개 국정과제에서 제외한 데 이어 청와대 또는 국토해양부 산하에 두려던 추진기구 계획도 보류했다. 18대 국회 개원과 함께 상정하려던 대운하 특별법도 당분간 연기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청와대 인사는 “반대 여론이 높아 당분간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청와대와 정부가 직접 나서지는 않기로 했다”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기자와 만난 한나라당 친이계 인사는 “방미를 마치고 돌아온 이 대통령의 시야가 더 넓어졌을 것”이라며 “당장 해결해야 할 현안이 쌓여있는데 대운하 구상에만 올인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시범 구간’ 등 대안 검토

청와대는 대운하 사업 백지화 가능성이 제기되자 “여론수렴을 더 거치겠다는 것이지 변화된 것은 없다”고 공식 해명했다. 하지만 이 역시 “반드시 국민들을 설득해 추진하겠다”는 대선 당시의 입장과는 분명한 거리가 있다는 평가다.

‘대운하 구상’을 놓고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책임 미루기’에 들어간 분위기도 감지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운하 문제를 당에 맡기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반해 이한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처음 듣는 얘기”라며 “대운하와 관련된 환경이 더욱 나빠져 6월 특별법 통과는 불가능하다. 그보다 서민생활을 살리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일축했다.

이에 따라 국정 운영에 부담을 느낀 청와대가 ‘대운하 구상’에서 서서히 발을 빼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영산강이나 낙동강 준설을 통해 대운하를 시범적으로 건설·운영하거나 경인운하를 연내 마무리해 여론을 반전시키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민간단체인 한반도대운하연구회에 여론 수렴과 홍보 방안 마련 등을 맡기는 방안도 ‘정치적 부담’을 줄이기 위한 포석 중 하나다.


18대 국회 ‘최대 화두’로

대운하 구상을 애초부터 반대해왔던 친박 진영과 야당들은 반대 여론의 힘을 바탕으로 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총선 이후 재편된 정치구도 속에서 ‘강력 반대’만이 청와대를 압박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통합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은 모두 여론을 들어 대운하 완전 철회를 주장하고 있다. 민주당 당직자는 “대운하 구상은 국민들의 여론이 가장 안 좋은 대선 최대 공약”이라며 “민심의 쓴 맛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운하 구상’을 둘러싼 전략 대결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불 튀길 전망이다. 발을 한 발 빼려는 청와대로선 정치적 타격을 최소화하며 국민들의 이해를 구해야 한다.

총선 민심으로 물줄기가 뒤바뀐 ‘대운하 공약’이 어떻게 진행될지 18대 국회의 최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대운하 놓고 학계도 발칵

이준구 서울대 교수“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일”

‘대운하 반대’ 움직임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인 것은 연초 서울대 교수들이 주도한 ‘대운하 건설을 반대하는 서울대 교수 모임’이었다.

이들은 대운하 구상의 근거를 제공한 학자들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반대 목소리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뒤이어 전국 교수모임이 구성되는 등 학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이 모임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서울대 경제학부 이준구 교수는 자신의 전공을 바탕으로 대운하 구상을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길쭉한 반도인 나라에서 긴 쪽을 따라 운하를 판다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고 혹평하며 “경제 중심이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옮겨가고 있고 물류도 비용보다 시간이 중요 요소로 가는 추세다. 물류 촉진을 위해 운하를 판다는 것은 시대 흐름을 역행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서울대교수 모임을 바탕으로 지난 3월 말엔 ‘한반도 대운하를 반대하는 전국교수모임’이 발족됐다. 여기에 참여한 대학 교수만도 2400여명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참여교수는 “대운하 구상에 참여한 모 교수의 경우 학자의 양심을 팔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폄하했다.


김승현 기자 okkdoll@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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