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태 신임 국회의장(가운데)이 지난 2010년 6월9일 오후 서울 연희동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자택을 방문하고 있다. [뉴시스]](/news/photo/202006/398170_314476_2655.jpg)
-“마닐라호텔에서 말라카낭궁으로 만찬 장소를 바꿨다”
-“이 순방으로 아세안과의 대화가 시작됐다”
[일요서울 | 조택영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 말레이시아와의 최종 공동성명에 말씀하신 내용이 들어가나.
▲ 그렇다. “양국이 위치한 각 지역의 평화와 안전이 상호 긴밀한 관계에 있으며 아시아 및 전 세계의 평화 안전 유지에 필요불가결하다는 견해를 서로 같이하겠다”는 내용이 말레이시아와의 공동성명에 들어간다. 이를 위해서 밤새도록 고생했다. 당시 후세인 온 말레이시아 수상이 전두환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에서 마하티르 모하마드 부수상을 만나 달라는 이야기를 한다. “시간을 좀 내 달라, 마하티르 부수상이 곧 수상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전두환 대통령이 마하티르 부수상을 만났다. 그랬더니 마하티르 부수상이 총리로 취임을 하면 소위 동방정책을 전개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그 정책의 핵심은 개발도상국의 선두주자인 한국이며, 한국이 롤모델이라는 이야기를 밝혔다. 당시 순방을 통해서 아세안과의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아세안과의 관계가 그 후부터 발전을 한다. 처음에는 부분 대화 상대국이지만.
- 다이얼로그 파트너라고 한다.
▲ 그렇다. 1989년부터 아세안 회원국들과 부분별 대화관계, 곧 섹토럴 다이얼로그 파트너가 된다. 1991년에 가서는 완전 대화관계, 곧 풀 다이얼로그 파트너가 될 거다. 이 풀 다이얼로그 파트너는 선진국 아닌 국가로서는 우리 한국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1994년에는 저희가 ARF(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 가입했고, 북한은 2000년에 가입한다. 1997년에는 한·아세안 정상회담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돼서 아세안 30주년 기념에는 한·중·일 정상회담이 아세안 테두리 속에서 열리게 되고, 이렇게 아세안을 베이스로 하는 대화가 발전을 한다.
그리고 방문 중에 싱가포르 리콴유 수상을 만나셨다. 저는 거기 배석하지는 않았지만, 두 분이 데다테 방식으로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그때는 노 외무장관이 참석을 했는데, 나오신 후에 이야기를 들으니까 리콴유 수상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강조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국가가 발전하려면 청렴하고 유능한 인재들이 국정을 담당할 필요가 있다. 청렴하고 유능한 인재들이 국정에 참여하여야 한다.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지 않고서는 부강한 민족국가 건설은 불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 공무원에게 충분한 보수를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한다. 아시다시피 싱가포르는 정부 공무원에게 톱 레벨 기업보다 더 높은 보수를 주는데, “싱가포르는 그렇게 처우를 좋게 한 후에 부정부패 행위가 적발됐을 때는 아예 공직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특히 강조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마닐라에 갔는데, 첫날은 공식 저녁 만찬도 하고 그대로 잘 진행됐다. 그다음에 공식 저녁 만찬을 우리가 주최할 차례였다. 당시 우리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제2차 세계대전 전에 머물렀다는 유명한 호텔인 마닐라호텔에 묵고 있어서 그곳에서 저녁 만찬을 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쪽에서 위해 첩보가 왔다.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겠다고 하는 그 첩보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주재하는 필리핀대사가 보고해 왔다고 한다. 그래서 한사코 이 호텔에서 하는 것을 말리고, 그 대신 말라카낭궁 안에서 하자고 제안을 해서 마르코스 대통령 내외를 초청하기 위한 디너가 말라카낭궁 안에서 열렸다.
이 순방으로 아세안과의 대화가 시작됐고, 우리가 각 국가와의 개별적인 협력에 더해 아세안 프레임 속에서 전체 동남아시아를 보는 시각이 생겨났다. 아세안과의 협력 관계가 아세안이라고 하는 조직, 서브 리전 조직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게 큰 의의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 제5공화국 시기 우리 외교에서 우방국인 미국·일본과의 관계를 확실히 안정시키고, 또 제3세계의 외교에서 우리의 통일정책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고, 조직으로 아세안과의 기초를 놓았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북정책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상당히 궁금해진다. 이후 제6공화국의 북방정책이 외교사학자들에게는 상당히 각광을 받는 테마이기도 하다.
▲ 그렇다.
- 이미 1970년대 데탕트 시기에 우리가 남북 관계에서 대화를 제의를 한 적도 있었고, 전두환 정부 때 북한에 대화 제의를 했다. 특히 이범석 장관의 국방대학교 연설은 아직도 회자되는데, 우리의 통일정책이라는 맥락에서 이 부분을 좀 짚어 달라.
▲ 알겠다. 말씀하신 데탕트 이후에 7·4남북공동성명으로 대표되는 대화가 시작됐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정치인으로 있을 때 당시에 일본에서 납치된 사건을 빌미 삼아 북한이 남북조절위원회 회의를 깼다. 그래서 남북관계는 반짝하다가 말았는데, 우리의 6·23평화통일외교선언이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공산권 세계와 관계를 갖겠다는 아주 적극적인 신호였다. 우리가 남북한 동시 UN 가입 제의를 하고,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공산권 국가와 관계를 갖겠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명한 거다.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 때 와서 우리가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제의하게 된다. 이 제의를 전두환 대통령이 1982년 1월22일 국정 연설에서 천명했다. 어떤 경위에 따라서 이루어졌나 하면, 1981년 1월12일 남북한 당국 최고 책임자의 상호 방문을 제의하고 또 6월 5일에 가서는 이 제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남북 최고 책임자 간의 회담을 제의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당시 외무부와 통일원, 남북관계를 다루고 있는 안전기획부, 이 세 기관에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될 때를 대비해서 우리의 통일방안을 연구하고 검토하라는 지시를 했다. 그래서 외무부·통일원·안기부가 통일방안을 검토하고 연구하기 위한 실무자 그룹을 구성하고 회의를 했다.
조택영 기자 cty@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