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리맨 대통령 인생역정
샐러리맨 대통령 인생역정
  • 백은영 기자
  • 입력 2007-12-24 14:45
  • 승인 2007.12.24 14:45
  • 호수 37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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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 상경 소년 “신화는 있다”

1959년 12월, 차표 한 장 손에 쥐고 포항에서 서울로 상경한 달동네 합숙소 일용직 노동자. 맨밥에 마가린과 간장을 비벼먹고, 청계천 헌책방에서 책을 얻어 공부한 공부벌레. 연습장 이면지에 코를 풀어 코 주위가 항상 시커멓던 잔병 치레자. 이태원 판자촌 단칸방에 사는 노점상인 부모 밑에서 환경 미화원을 하면서 학업을 했던 땟국이 흐르던 촌사람.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그가 2008년 서울상경 50년 만에 달동네에서 청와대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96명에 불과하던 중소기업을 17만명 대기업으로 변모시키고 5천만 국민을 이끄는 수장이 된 그의 이름 앞에는 ‘신화’란 두 글자가 따라붙는다. 현대건설 사장 취임이후 자신에게 단칸방을 제공해준 친구 김창대와 단 둘이 저녁을 먹으며 눈물을 훔쳤다는 인간 이명박은 또 어느 날 저녁 청와대 입성을 앞두고 감격적인 눈물을 훔치고 있을까. 20대 이사, 30대 사장, 40대 회장, 50대 국회의원, 60대 서울시장, 대한민국 대통령까지 이 당선자의 인생역경 스토리를 따라가 본다.

어린 시절 그는 항상 취기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 등교했다.
가난 때문에 곡식으로 술을 빚고 남은 찌꺼기인 술지게미로 아침을 때우고 등교하면 알코올 취기가 돌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에 진학한 형 상득 (현 국회부의장)씨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학교진학을 포기한 채 어머니와 함께 장사에 나섰다.

지금 이 당선자의 이력서를 써오라고 하면 풀빵, 뻥튀기, 밀가루, 떡, 과일, 김밥, 성냥, 아이스케키, 청소 미화원 등 판매직의 이력만 한 장을 채울 정도다. 학창시절 별명은 ‘이 천재’였다. 포항 동지상고 야간 재학 3년 내내 주·야간을 합쳐 1등이었다. 또 온갖 일을 하면서도 전교 1등으로 졸업, 장학금을 받았다. 또 대학 중퇴 경력이라도 가져보겠다며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한 참고서로 공부해 1961년 고려대 상과대학에 합격했다.


위기 때마다 “참아라” 어머니 충고 되새겨

그러나 가난했지만 누구보다 당당하게 행동했다. 오죽하면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기로 유명한 전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조차도 그의 ‘당당함’에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인 줄로 알았다고 한다. 이런 당당함 뒤에는 강직한 어머니가 있었다.

이 당선자는 지난 3월 ‘어머니’라는 책을 출판할 정도로 모정이 대단하다. 인사동 풀빵장수를 보고서도 어머니의 풀빵 냄새가 생각나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새벽 시간 눈을 떴을 때 아직도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 말할 정도다.

최근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 일부 비하발언에도 “명박아, 참아라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옛 말씀이 생각나 대응하지 않고 가까스로 참았다고 한다.

그러나 대학 3학년 때 상대 학생회장에 뽑혀 6·3시위를 주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6개월간 지내다 석방됐으나 한 달 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기업에 취직해서 어머니께 평생 못 입어본 새 옷을 사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끝내 지키지 못했다. 그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한 번 난관이 있었다. 대학시절 학생운동 전력으로 취직할 수 없었다. 현대건설 시험을 쳤으나 필기시험은 좋은데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곤란하다는 말을 듣는다. 집에 오자마자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보내 현대건설에 입사, 5년 만에 이사, 12년 만에 대표이사 사장 자리에 오른다.

이 과정에서 추진력과 지독한 근성을 보인다. 경리사원 자격으로 간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현장, 적자투성이 공사에 현지 폭도가 들이대는 칼로부터 한국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홀로 금고를 지켰다.

또 1980년 신군부시절, 현대에게 자동차 사업의 포기를 강요할 때 정주영 회장 대신 불려가 끝까지 버텨냈다. 그러나 92년 현대생활을 정리하고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한때 정주영회장의 정치동참 제안을 거절해 배신을 했다는 누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인의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4대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의원이 됐으나 95년 지방선거에서 민자당 서울시장 자리를 놓고 경선에서 패했다.

96년 총선에서는 노무현 후보를 물리치고 종로에서 당선됐다. 이후 선거비용 초과지출 혐의로 법정에서 700만원 벌금형을 선고받고 서울시장 도전을 포기, 미국으로 떠났다. 2000년 귀국해 BBK 대표이사였던 김경준과 LKe뱅크를 설립했으나 그는 당선자 신분으로 특검수사를 받게 될 처지에 놓였다. 그리고 2002년 서울시장, 2007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처럼 그의 기적 같은 성공신화에는 또 다른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그를 그림자처럼 평생 내조한 김윤옥(60) 여사다.

35살에 현대건설 사장 승승장구

이 당선자가 35살에 현대건설 사장에 올랐을 때 김 여사는 29살이었다. 한때 세컨드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던 김 여사는 이 당선자에게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아 집안 내 야당이라고 불린다. 박근혜 전 대표와 갈등이 최고조로 올랐을 때 “박 전 대표와 절대 싸우지 말라, 세상에 여자와 싸워서 이기는 남자 없다”고 조언했다. “극한 표현은 절대 쓰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또 이 당선자에 비난이 거세졌을 때도 “1등은 원래 억울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참고 견디면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고 다독거리기도 했다.

한편 이 당선자 슬하에 장녀 주연(36), 차녀 승연(34), 막내 수연 (32), 아들 승연(29)군이 있으며 큰사위 이상주씨는 삼성화재 법무담당 상무보, 둘째 사위 최의근씨는 서울대병원 내과 전문의, 셋째 사위 조현범씨는 한국타이어 부사장이다.

백은영 기자 aboutp@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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