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에서 고려의 자주를 꿈꾸다!
바다 위에서 고려의 자주를 꿈꾸다!
  • 남석진 
  • 입력 2007-06-21 17:36
  • 승인 2007.06.21 17: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천, 6월의 가 볼만한 곳 <4> - 전남 진도군

녹진 전망대로 오르면 진도의 관문인 진도대교와 울돌목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울돌목은 그 명성에 걸맞게 거친 숨소리를 내며 험한 물살을 쏟아내고 있다. 그 옛날 고려의 자주를 꿈꾸며 몽골군과 항쟁했던 삼별초 일행도 이 험한 물살을 헤치고 벽파진으로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남해의 요충지인 벽파진은 9개월 후 삼별초 토벌을 위해 나선 여몽연합군에게도 그 길을 내어주고 만다. 중군과 우군, 좌군으로 공격에 나선 여몽연합군은 그렇게 벽파진을 통해 진도 입도에 성공하고 독립국으로서의 고려를 꿈꿨던 삼별초의 꿈 역시 여몽연합군의 진도 입도 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독립국가로서의 고려를 꿈꿨던 용장산성에서, 그리고 삼별초 항쟁의 주역인 배중손 장군이 최후를 맞은 남도석성에서 그들의 피맺힌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하다.



삼별초항쟁은 고려 무신 정권이 붕괴된 후 고려 정부가 몽고와 강화를 맺고 개경 환도를 결정하면서 시작된다.

몽고와의 치욕적인 강화조약에 반발한 삼별초는 장군 배중손을 지휘관으로 삼은 다음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을 새 왕으로 옹립해 1270년 6월에 반란을 일으킨다. 새로 왕을 세우고 관부를 설치한 삼별초는 반란 3일 뒤 공사 재물을 접수하고 강화도에 남아 있는 귀족·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아 진도로 보내게 되는데, 이때 동원된 선박이 1천여 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무너진 ‘용장산성’

진도군 군내면에 소재한 용장산성(사적 제126호)은 이렇게 벽파진을 통해 진도로 들어온 삼별초가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삼별초는 이곳 용장산성에 9개월 동안 머물면서 대몽항쟁을 위해 차근차근 그 세력을 넓혀 나가게 되는데, 멀리는 탐라국에서 가까이는 완도와 거제도에 이르는 30개 도서지역을 장악하며 해상왕국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다.

하지만 1271년 5월 화포(火砲)와 화창(火槍)을 앞세운 여몽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용장산성은 힘없이 무너지고 삼별초의 처절한 패퇴가 시작된다. 현재 용장산성에는 계단식으로 조성된 방대한 규모의 행궁지가 남아있을 뿐 대부분의 산성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배중손 장군이 산성을 쌓을 때 조성한 것으로 전해오는 용장사의 석불좌상(유형문화재 제17호)과 삼별초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전시해 놓은 용장산성 홍보관이 마련돼 있다.

용장산성에서 탈출한 삼별초의 퇴로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이는 삼면에서 밀고 들어오는 여몽연합군의 기세를 분산시키기 위함이었는데, 승화후 온을 위시한 김통정과 유존섭 등 간부 일행은 남쪽의 왕무덤재를 넘어 갑포로 방향을 잡았으며, 총참모장이었던 배중손장군 일행은 서쪽의 임회를 바라고 남도포로 방향을 잡았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퇴각하던 승화후 온 일행은 지금의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 부근에서 여몽연합군과 첫 번째 격전을 치른다. 이 격전에서 승화후 온과 그의 아들 항이 몽고의 장군 홍다구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이곳이 바로 ‘왕온의 묘’가 있는 ‘왕무덤재’이다.


흩어진 ‘작은 무덤’

현재 왕무덤재에는 왕온의 묘 외에도 비교적 규모가 있는 5~6기의 묘가 더 있지만, 온의 아들 항의 묘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승화후 온이 타던 말의 무덤으로
알려진 ‘말 무덤’이 왕온의 묘로 오르는 길 우측 숲에 자리해 있다.

승화후 온을 잃고 계속 남하하던 김통정 일행이 여몽연합군과 다시 맞닥뜨린 곳은 ‘돌아온 백구마을’로 유명한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부근이다. 이곳에서의 격전도 삼별초에게는 쉽지 않은 전투였다.

승화후 온의 목을 벤 여몽연합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그에 반해 왕을 잃고 패주만을 계속하던 삼별초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곳에선 아직도 처참했던 당시의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마을 앞 군데군데 남아 있는 작은 봉분들이 바로 그것이다. 돈지리 마을 앞 들판에 흩어져 있는 이 작은 무덤들을 마을사람들은 ‘떼무덤’ 혹은 ‘대분통’이라 부른다.


‘삼별초 궁녀 둠벙’

진도군 신의면 돈지리에 있는 ‘삼별초 궁녀 둠벙’도 돈지벌 전투의 연장선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곳은 돈지벌 전투 중 피난길에 나선 삼별초의 궁녀들이 창포리에서 만길리로 넘어가는 만길재에서 우황천이라 불리던 이곳 웅덩이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이다. 이는 몽고군에게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한 것으로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할 당시 삼천 궁녀가 부여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과도 흡사한 사건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은 우황천의 대부분이 메워졌지만 진도군 신의면 돈지리 마을 입구에는 아직도 ‘삼별초 궁녀 둠벙’이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웅덩이가 남아있다.

밀리고 밀리던 김통정 일행이 제주로 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거쳐 간 곳은 금갑선착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북문재 정상의 금갑진이었다.

더 이상 밀릴 곳이 없었던 김통정 일행은 고심 끝에 진도를 버리고 제주로 그 본거지를 옮길 것을 결정하게 된다. 최근 북문재 정상에선 김통정 일행의 최후 방어선이었던 금갑진에 대한 발굴공사가 한창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그럴듯한 탐방로는 없다. 하지만 금갑리 마을회관이 있는 금갑슈퍼 앞 공터에서 금갑교회를 끼고 도는 작은 길을 따라가면 어렵지 않게 금갑진에 오를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일몰’

한편 서쪽으로 퇴로를 잡은 배중손 장군은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위치한 남도석성(사적 제127호)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퇴각 내내 여몽연합군의 집요한 추적을 어렵사리 뿌리친 배중손 장군이었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은 말 그대로 중과부적이었을 것이다.

삼별초 항쟁의 주역이었던 배중손 장군의 죽음으로 삼별초의 아홉 달에 걸친 짧은 영광과 10일간의 치열한 전투도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배중손 장군이 최후를 맞은 남도석성은 삼국시대 쌓은 성이지만 지금의 남도석성은 조선시대에 왜구를 막기 위해 증ㆍ개축한 것으로 둘레 610m의 석벽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남도석성의 특이한 점은 성내에 사람들이 실제로 생활하고 있다는 점인데, 성내에는 현재도 20여 가구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이외에도 성내에 있었던 객사에 대한 복원도 진행 중이다.

삼별초의 행적을 찾아 남도석성까지 발걸음을 했으면 진도군 지산면 세방리도 놓칠 수 없다. 진도의 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이 마을은 몇 해 전 기상청이 우리나라에서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선정한 뒤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곳으로 촘촘히 떠 있는 다도해 너머로 떨어지는 낙조가 일품인 곳이다.

자료제공:한국관광공사·진도군청

남석진  nsj@dailysun.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