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고지의 8부 능선을 넘어선 것처럼 보였던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휘청하고 있다. 당내에서 잠자는 척하고 있었던 잠룡은 비단 박근혜 전대표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1천만표 이상을 획득했던 이회창 전총재가 움직이자 견고했던 이 후보의 지지율은 어느새 40%대 안팎으로까지 떨어졌다.
정치권에선 BBK의 핵심 인물인 김경준씨 소환과 맞물려 이 후보의 낙마설이 현실화되는 것 아니냐는 섣부른 얘기까지 회자되는 상황이다. 한나라당의 한 인사는 “기본적으로 이 후보측 인사들에게 책임이 크다”며 “그 동안 참고 참았던 반MB 성향 인사들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나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박 전대표측과 이 전총재측의 연대설이 현실화된다면 이 후보를 다방면에서 압박할 것으로 전해진다. 이 후보를 옥죄일 몇 가지 카드를 추적했다.
“분열의 원인은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 먼저 불을 지폈다”.
친박 진영의 한 인사는 이 후보와 이 전총재측의 기싸움을 비교적 여유롭게 지켜보면서도 그 책임을 MB 진영에 돌렸다. 최근 친박진영의 좌장인 김무성 의원을 최고위원으로 임명했지만 이미 건널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얘기다.
박 전대표가 이 후보의 최측근인 이재오 최고위원을 향해 “오만의 극치”라며 강도 높게 비판한 것도 향후 있을지도 모르는 분열의 책임을 이 후보에게 돌리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이 전총재측도 이 후보측의 겸손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이 전총재를 대하는 이 후보가 제대로 성의를 보이지 않아 그 동안의 감정이 폭발 직전에까지 도달했다는 게 관계자의 말이다.
창, “MB 황당하다”
실제로 이 전총재측은 이 후보와의 결별을 고민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이 전총재에 대한 이 후보의 상임고문직 제의 과정으로 보고 있다.
당초 MB 진영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이 전총재에게 선대위 상임고문직을 부탁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 후보가 한 인터뷰에서 “두 번이나 대선에 출마한 분에게 고문직을 맡기기엔 모양새가 좋지 않다”며 “그런 적 없다”고 부인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최소한 당의 원로로서 대우 받기를 원했던 이 전총재측은 이 후보의 한 마디 말로 우스운 입장에 놓이게 되자 분노가 한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이 전총재는 이례적으로 “황당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대통령 될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되느냐. 국가지도자가
될 사람이 이렇게 해서는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없다”고 이 후보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이 전총재가 무소속 혹은 신당 창당 후 대선에 나설 경우 최대의 아킬레스건은 ‘보수세력의 분열’이라는 질타가 될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이 전총재측은 ‘분열’의 단초를 이 후보측에게 떠 넘길만한 기회를 호시탐탐 찾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여기에 친박 진영이 이 후보 측의 인사 전횡과 오만을 꼬집고 나서면서 이 전총재에 대한 전반적인 분위기가 나아졌다는 게 한나라당 인사의 전언이다.
“가뜩이나 BBK 의혹 등으로 지지자들이 갸우뚱하고 있는데 박 전대표와 이 전총재가 동시에 나서 이 후보의 ‘오만’을 이야기하면 분열의 책임자도 달라지는 것 아니냐, 아마도 이를 노린 것 같다”.
당 분열 책임을 이 후보에게 떠 넘기는 것과 동시에 MB 최측근의 전횡을 폭로하는 움직임도 동시에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b>“인민군 같은 이재오”
친박 진영은 이미 그 타깃을 이재오 최고위원에게 집중시키고 있다. 박 전대표 캠프의 기획통이었던 유승민 의원은 “이 최고위원과 같은 분열주의자, 반민주적 독선가야말로 당 화합의 최대 걸림돌”이라며 “최고위원 자리에서 물러나 백의종군해야 한다”고 몰
아붙였다.
역시 친박 진영에서 활동했던 이규택 의원도 “일제시대 때의 헌병완장이나 인민군의 빨간 완장이 떠 오른다”면서 “자기가 대통령 후보가 된 것처럼 착각해서 완장을 차고 다니는 망령이 든 것 같다”고 원색적으로 이 위원을 비난했다.
당 안팎에선 이 후보가 몰리고 있는 상황의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포용 정책의 실패’라고 지적한다. 당권과 내년 총선 공천과 관련, 친박 진영의 요구를 MB 진용이 들어주지 않자 적전 분열이 심화되고 있다는 얘기다.
친박 진영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는 “이 최고위원이 이 후보측 강경파의 핵심 아니냐”며 “이 전총재측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이 위원이 아닌 제3의 인물이 공격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MB 최측근과 관련된 폭로전은 이 후보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힘과 동시에 이 전총재 혹은 박 전대표 ‘대안론’을 확산시키는 카드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 전총재와 박 전대표가 뽑아들 수 있는 세 번째 연대 카드는 대구, 경북 지역(TK)과 부산, 경남 지역(PK)의 민심을 분리시키는 데 있다.
“영남 전선 이상 있다”
이 전총재는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막강한 영남 득표력을 과시했지만 상대적으로 TK 지역의 지지가 더욱 높았다. TK 지역은 지난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 전대표가 이 후보에게 우세를 보였던 지역이기도 하다.
박 전대표가 지금보다 적극적으로 지역 훑기에 나선다면 이 후보의 TK 지지율은 상당 부분 잠식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확실한 텃밭으로 불리는 TK 지지율이 흔들린다면 전체적인 이 후보 지지율 또한 악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최근 MBC 여론조사에서는 TK의 경우 이 후보 39.6%, 이 전총재 35.1%로 이미 상당한 지각변동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후보측의 소홀한 대접에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한 이 전총재와 친박 진영은 분열 책임론과 MB 측근의 전횡, 영남 민심 분열 등의 카드를 섞어가며 ‘MB 흔들기’에 본격적으로 나설 전망이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이와 관련 “지금까지는 BBK 연루 의혹 등이 이 후보에게 큰 상처가 되지 못했지만 마지노선이 무너지면 상황은 돌변할 가능성이 높다”며 “이 후보측의 대처 여부에 따라 대선 정국도 크게 요동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 MB측 “우리도 좌시하지 않겠다”
‘미풍’으로 생각했던 소용돌이가 걷잡을 수 없는 ‘태풍’으로 진화했다.
이회창 출마설을 대하는 이명박 후보 진영의 분위기는 상황 초기만 해도 “설마 역사의 죄인이 되겠느냐”며 “분위기 띄우는 역할이 될 수도 있다”는 긍정론까지 나왔을 만큼 여유로웠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상황은 훨씬 심각했다.
이 전총재가 출마를 강행하고 박근혜 전대표가 힘을 실어줄 경우 이 후보측은 “결코 좌시하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한 인사는 “공정한 경선을 통해 선출된 후보를 이런 식으로 흔드는 것은 민주주의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더구나 두 번이나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이 전총재가 그 주인공이라면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이미 캠프 안팎에선 이 전총재의 발목을 잡기 위한 움직임이 진행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몇몇 인사들을 통해 ‘호소 작전’을 펴는가 하면 이 전총재의 비리에 관해서도 수집 작업에 들어갔다.
이 후보와 가까운 이방호 사무총장이 “이 전총재가 출마한다면 지난 대선에서의 불법자금 자료를 공개할 수 있다”며 으름장을 놓은 것도 그 일환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총장은 이와 관련 “대선자금 수사가 진행된 지난 2003년 당시 최병렬 전대표가 대선자금의 잔금과 관련한 일련의 내용을 담은 수첩을 갖고 있었고 나도 본 적이 있다”며 수첩 내용의 공개를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이 후보측 캠프에는 2002년 당시 이 전총재를 수행했던 핵심 측근들 상당수가 포진해 있어 이 전총재의 또 다른 ‘아킬레스건’이 등장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MB 진영의 긴장감은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올 만큼 팽배해 있다는
게 내부 관계자의 말이다.
김승현 okkdoll@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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