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합민주신당이 정동영 후보를 대선후보로 선출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좋지 못하다. 지지율이 마의 20%대를 좀처럼 뚫지 못하는 가운데 민주당 이인제 후보와 장외의 문국현 후보를 어우르는 범여권 단일화 또한 산 넘어 산이다.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대통령의 보이지 않는 입김까지 작용하며 ‘정권 재창출’ 시나리오는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민주당을 비롯 정치권 일각에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고건 전총리 카드가 다시 거론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대통령 선거를 불과 50여일 앞두고 부상하고 있는 ‘고건 추대설’을 추적했다.
고건 전총리는 최근 태국행 비행기를 탔다.
태국 국립연구회 초청으로 ‘한국 새마을운동의 성공 요인과 이전 가능성’을 주제로 특별강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고 전총리의 측근은 “새마을 운동의 주역으로서 전남도지사 시절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연을 하기 위한 것”이라며 “새마을 운동에 관심이 높은 동남아 지역에서 가끔 연락이 온다”고 말했다.
대선 불출마 선언 이후 정치권과 담을 쌓은 고 전 총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연지동 사무실에서 책을 읽거나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게 사무실 관계자의 말이다.
최근 정치권 한편에서 나오고 있는 ‘추대설’에 대해 최측근 인사는 “이미 모두 끝난 일 아니냐”며 “고 전총리의 마음이 이미 뜬 지 오래”라고 말했다.
태국서 ‘새마을’ 강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 전총리의 팬클럽인 ‘우민회’와 민주당 일각에선 여전히 고 전총리 카드를 저울질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대선 불출마 선언에도 불구하고 고 전총리의 몸값이 여전히 높은 것은 현 대선 구도에 기인한 바가 크다. 통합신당의 정동영 후보, 민주당 이인제 후보, 장외의 문국현 후보 등 범여권의 후보 지지율을 모두 합쳐도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게 필적할 만한 경쟁력을 갖는 게 현재로서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고 전총리는 이 후보의 지지율을 앞섰던 범여권의 유일한 인사였다는 점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대선 지지율 1위를 차지했던 인사도 한나라당을 제외하면 고 전총리 한 사람 뿐이다.
고 전총리의 또 다른 강점은 김대중 전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모두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향후 예상되는 범여권 단일화가 두 전현직 대통령들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경쟁력을 갖췄다는 평가다.
DJ는 2004년 서울시장직에서 퇴임하는 고 전총리에게 이례적인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그의 행정력에 높은 점수를 줬다. 노 대통령도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였다”고 평가하기는 했지만 참여정부 초대 총리로 고 전총리를 선택한 것은 그의 장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깜짝 카드 부상 가능성
무엇보다 한나라당 후보가 결정됐다는 사실은 고 전총리의 경쟁력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 있다. 이명박 후보와 고 전총리의 차별성이 더욱 극명해진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서울시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물러났지만 청렴의 상징인 도덕성 면에서는 고 전총리가 한결 낫다는 평가다.
고 전총리는 여기에 대학총장과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지내는 등 다양한 장점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환경’ 관련 경쟁력은 이 후보의 ‘대운하 구상’과 대조될 수 있는 부분이다. 국무총리와 전남도지사 등 행정 요직을 두루 거친 것도 이 후보를 압도한다.
범여권에서 추진하고 있는 ‘후보 단일화’와 관련해서도 고 전총리는 다른 후보들에게 밀리지 않는다.
정동영 후보의 강력한 지지 지역인 전북에서는 한 때 정 후보와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높은 지지율을 보여줬다. 민주당 이인제 후보와의 호남 지지 경쟁에서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정치권 관계자의 말이다.
민선 서울시장 선거를 치러냈던 만큼 정치 경험이 전무한 문국현 후보와도 뚜렷한 차별성을 부각시킬 수 있다.
지난 2002년 대선에서도 당시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가 ‘단일화’를 이뤄낸 것은 후보 등록 하루 전이었다. 고 전총리가 결단만 내린다면 아직도 시간은 충분하다는 게 정치권의 평가다. 2004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해 당선됐던 오세훈 서울시장의 사례도 없지 않다.
이 외에도 진보와 보수를 아우를 수 있는 고 전총리 특유의 이념적 위치도 다른 후보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장점으로 손꼽힌다.
“지지 선언 고민 중”
하지만 고 전총리의 대권 도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고 전총리를 지지했던 민주당 최인기 의원실 관계자는 “가시권에 들어와 있는 후보들을 대상으로 길을 찾아야지 다 끝난 고 전총리로 가능하겠느냐”며 “이미 정치권에서 묻혔다”고 말했다.
정치적인 쟁취 보다는 ‘추대’를 선호하는 고 전총리 스타일도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고 전총리의 한 측근은 이와 관련 “지지를 약속했던 정치권의 배신에 정이 떨어진지 오래”라며 “한 번 당했으면 됐지 또 그렇게 되겠느냐”고 말했다.
가족들의 부정적인 입장도 여전하다. 고 전총리의 부인인 조현숙 여사 등 가족들은 “이제 그만 고생하시고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며 고 전총리의 대권 행을 만류했었다.
그러나 고 전총리가 대선 정국을 마냥 멀리서 지켜볼 것 같지는 않다. 고 전총리의 팬클럽 중 손학규 전경기지사를 지지했던 인사들이 다시 고 전총리에게 눈을 돌리고 있다.
고 전총리의 최측근도 “직접적으로 뛰어들기는 어렵겠지만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면서 “아직은 고민 중이지만 때가 되면 입장을 밝힐 수도 있다”고 말했다.
고 전총리가 지지 선언을 할 경우 그 대상은 비단 범여권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 후보측도 고 전총리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 물밑 접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별도로 박근혜 전대표와 고 전총리, 심대평 국민중심당 후보를 묶는 ‘영남 + 호남 + 충청’ 시나리오도 회자되고 있다.
여전히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는 고 전총리가 막판 대선 정국을 뒤흔들 수 있는 태풍의 눈으로 등장할 지 정치권 초미의 관심사다.
#‘노무현의 저주’ 계속 될까?
한 때 범여권의 유력 대선주자였던 고건 전총리와 정운찬 전서울대 총장은 모두 ‘정치세력화’에 실패하며 중도에 대권 도전을 포기해야만 했다.
공교롭게도 출마 포기 선언 직전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비수와 같은 발언이 터져 나왔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말 고 전총리를 향해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였다”고 힘을 뺐다. 정 전총장을 향해선 “경제 공부 좀 했다고 경제를 잘 하느냐”고 아픈 곳을 찔렀다.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 전경기지사에게도 ‘보따리 장수’라는 험한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친노 표를 얻지 못한 손 전지사는 신당 경선에서 패배했다. 김근태 전의장도 신당 창당 과정에서 노 대통령에게 유쾌하지 못한 발언을 들은 뒤 대선 출마 의지를 접었다.
그런 노 대통령이 최근 문국현 후보를 향해 선을 그었다.
“검증을 거친 분도 아니고 잘 모르기 때문에 신중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11월 대반란을 준비하고 있는 문 후보가 노 대통령의 가이드 라인을 통과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김승현 okkdoll@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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