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만에 남북 정상이 다시 만났다. 첫 번째 정상회담에 비해 감동은 덜했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늘어났다는 평가도 없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6·15 공동선언 구현 ▲평화체제 구축 협력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 ▲남북 경협의 확대·발전 등이 포함된 10개항에 서명했다. 남북정상회담 동안 두 정상이 주고 받은 선물 보따리에 대한 손익 계산서도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퍼주기’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이 남측에서 북측에 들고 간 내용들이 어떤 것이었느냐를 놓고 다양한 통로로 정보 수집에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노 대통령이 가져간 노트북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담겨 있었을까.
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비교적 여유있게 준비했다.
당초 예정됐던 8월 정상회담이 북측 수해로 인해 10월로 연기된 것도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된 요인이었다.
노 대통령은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각종 자료를 검토하고 전문가 간담회를 가지는 등 꼼꼼하게 준비했다고 청와대는 설명했다. 9월초 남북정상회담 자문위원단 간담회를 개최한데 이어 경제계, 정치권 인사들과 자주 만남을 가지며 조언을 구했다. 청와대 안보실, 통일부 등 실무부서와도 직접 보고와 지시를 통해 준비에 만전을 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상회담 직전에는 국군의 날 행사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공식 일정을 잡지 않고 정상회담 준비에 전력했다. 평양 시가지와 회담장, 방문지와 북측 인사 등에 대한 동영상과 사진을 보며 2박 3일 시뮬레이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실제 상황처럼 대역 인사들도 동원돼 노 대통령의 정상회담 준비를 도왔다.
‘시뮬레이션 예행 연습’
이 과정에서 노 대통령이 검토하고 준비한 서류들도 적지 않은 분량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한만큼 과거처럼 ‘노란봉투’나 ‘007 가방’이 아닌 노트북 컴퓨터에 담겨 평양으로 이동했다는 게 청와대 측의 설명이다.
노 대통령이 북측에 가져간 노트북에는 정상회담에서 논의할 의제들이 포함돼 있었다. 여기에는 한반도 평화문제를 비롯 정치군사, 경제, 사회문화 분야 등 다양한 화두들이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평화선언을 통한 한반도 평화제체 논의와 남북간 군사적 신뢰구축 문제, 정상회담 정례화, NLL 문제 등 핵심 쟁점에 대해선 노 대통령이 직접 자료를 살펴보고 체크했다는 게 청와대 인사의 설명이다.
경제 분야에선 개성공단 확대, 한반도 종합개발계획, 북한 경제의 자생력 강화방안, 개성공단 출퇴근열차 개통, 베이지올림픽 남북 공동응원단 열차 이용 등이 포함돼 있었다.
경협과 관련해서는 노 대통령 뿐 아니라 특별 수행한 경제계 인사들도 상당한 분량의 서류들을 가져간 것으로 알려진다.
현대아산 현정은 회장은 남북 철도 연결, 통신사업, 통천 비행장 건설, 금강산 저수지 물 이용, 임진강댐 건설, 개성관광 성사 등에 대한 준비 서류들을 챙겼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 경세호 회장은 빠른 시일내 사업화가 가능하다는 판단아래 대북 섬유분야 원자재 지원품목 및 지원 규모와 관련된 서류들을 가져갔다.
이한호 광업진흥공사 사장, 이철 한국철도공사 사장, 한전의 이원걸 사장 등 공기업 수장들도 저마다의 역할에 맞는 남북 협력 사업을 놓고 치밀한 준비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돌출 상황도 미리 예상
사회, 문화 분야 의제로는 국군포로와 납북자문제, 이산가족 문제의 획기적 진전, 남북 종합병원 건립 등이 모두 포함됐지만 이중 민감한 사안들은 실제 정상회담에선 언급되지 않았다.
일부 의제들은 노 대통령의 애초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정상회담 정례화’ 가 대표적인 경우다. 노 대통령이 회담 정례화를 제의하자 김 위원장은 “친척집에 갈 때 정례적으로 가느냐. 수시로 놀러가는 것이다”며 수시 접촉을 대안으로 제시했다고 청와대는 설명했다.
이 외에도 노 대통령의 노트북에는 평양도착 성명, 각종 오·만찬 연설, 귀국 보고 등이 치밀하게 담겨져 있었다. 노 대통령은 이를 직접 다듬으면서 수시로 업데이트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분은 평양에 도착해 마지막까지 수정작업이 진행됐다.
노 대통령의 노트북에는 안보실과 통일부, 국정원과 재경부 등이 준비한 자료들도 빼곡하게 담겨져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청와대는 “주요 의제와 관련된 우리 측 입장과 다양한 사례 등이 준비됐다”며 “일부분은 노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해 따로 만들어졌다”고 전했다.
북측,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예상 발언을 놓고 다양한 대응 로드맵도 준비됐다. 주요 의제 뿐만 아니라 세세한 대화도 신경썼다.
“하루 더 머물라”는 김 위원장의 파격 제안에 노 대통령이 다소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연습이 선행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노 대통령의 노트북은 평양행 대통령 전용차에 실려 2박 3일 일정동안 함께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노 대통령은 회담 보고 결과 자리에서 “처음에는 양측 사고 방식의 차이가 엄청나 눈앞이 캄캄했다”며 “둘째 날 오후가 돼서야 잘 풀리기 시작했다”고 방북 소감을 밝혔다.
“회담에서 가져간 보따리를 확 풀어 놓았는데 성과를 다시 싸 갖고 올 때는 그 보자기가 조금 작을 만큼 성과가 좋았다”는 게 그의 말.
노 대통령의 공언처럼 노트북에 담아갔던 내용들이 제대로 역할을 다했는지 향후 후속 성과들이 판가름할 전망이다.
#한나라당 긴급 특명 “신북풍을 저지하라”
2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나라당과 이명박 후보측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전선의 양극화다. 이번 기회를 통해 발언력이 커질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개입 가능성이 현실화 된다면 상황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
한나라당의 한 인사는 “대선 구도가 박빙으로 갈 경우 남북문제는 핵심 쟁점이 될 것”이라며 “노 대통령이 적지 않은 선물 보따리를 들고 온 만큼 예전처럼 강경 대응 일변도로는 힘들다고 본다”고 말했다.
소장파 재선 의원도 “한반도 문제에 관한한 대세는 이미 정해졌다”며 “현실을 인정할 건 인정하는 게 선거 전략 차원에서도 우위에 있다고 본다”고 입장을 밝혔다.
때문에 정상회담 직후 한나라당의 반응은 상당히 신중했다는 평가다. 지난 여름만 해도 ‘이면합의설’을 제기했던 한나라당이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섣부른 공격은 ‘역공’만 불러올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강재섭 대표는 “노력과 합의를 인정하지만 아쉽다”고 했고 박형준 대변인은 “미흡하지만 노력은 평가한다”고 입장을 발표했다. 이명박 후보도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당내 일각에선 “너무 청와대가 의도한 쪽으로 끌려가는 것 아니냐”는 볼멘 소리가 터져나왔다. 급기야 안상수 원내대표가 총대를 메고 “경협으로 위장된 퍼주기”라며 “북측은 주는 것이 없는데 우리는 엄청난 지원을 한다”고 선봉장을 자임했다.
범여권도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반격을 퍼부었다. 통합신당 이낙연 대변인은 “자신들이 집권하면 평화와 공영을 이루겠다고 말하면서 10·4 공동선언을 ‘퍼주기’라고 비난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빈말”이라며 “이것이 한나라당이 집권해서는 안 되는 분명한 이유”라고 일침을 놨다.
정상회담 이후 대선 정국에서 한나라당은 당분간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게 정치권의 지적이다. 국내 보수 그룹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한나라당으로선 일단 강·온 양면 대응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한나라당과 이 후보측에서도 이를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대북 루트’를 개척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당의 한 인사는 “정상회담 정례화가 ‘수시 개최’로 바뀐 것은 남북 모두 대선을 의식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며 “이 후보로서는 신북풍을 사전에 차단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범여권의 한 관계자도 “2차 정상회담 이후 많은 유권자들이 김정일 위원장과 함께 서 있는 이명박 후보를 연상하게 될 것이다”며 “이 후보의 전략 선택에 따라 대선 구도도 바뀔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퍼주기’ 공세와 NLL 논의, 납북자 문제 등 강공은 안 원내대표 등 당이 맡고 이 후보는 북측과의 관계 개선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정상회담 이후 재편되고 있는 대선 정국에서 이 후보가 어떤 카드를 들고 나올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승현 okkdoll@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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