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에 대한 배신감이 포기 원인
정치인에 대한 배신감이 포기 원인
  • 김승현 
  • 입력 2007-05-08 16:11
  • 승인 2007.05.08 1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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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과 정운찬의 닮은꼴
고건 전총리에 이어 정운찬 전서울대 총장이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범여권 후보로 분류되는 인사들 중 두 번째다. 서울대 선후배 사이이기도 한 두 사람은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 모두 좌절의 쓴 맛을 본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참여정부에서 초대 총리를 지낸 고 전총리는 관료사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경제학자 출신인 정 전총장은 국내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다.
정치권에선 두 사람의 불출마 선언배경이 유사하다며 ‘보이지 않는 손’을 얘기하기도 한다. 한 때 여론조사 1위를 달렸던 고 전총리의 부담을 정 전총장도 맛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종의 ‘필연’이라는 얘기다.



“대결적 정치구도 앞에서 역량이 부족함을 통감했다.”

지난 1월 16일 전격적으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고 전총리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며 “보다 훌륭한 분이 나라의 조타수가 돼 달라”는 당부와 함께 정치권을 떠났다.

그로부터 100여일 후, 또 한 명의 범여권 대선주자가 ‘중도포기’를 선언하며 등을 돌렸다.

정 전총장은 지난달 말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지난 몇 달 간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신중히 생각했지만 결론은 이번 대선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그럴 만한 자격과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치권에 깊은 배신감”
하지만 두 사람이 불출마 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정치적 환경 또한 적지 않게 작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 전총리 측근은 “열린우리당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겠다던 의원들이 막상 지지율이 떨어지니 망설이기 시작했다”며 “고 전총리가 이에 대해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정 전총장 또한 정치 세력간 싸움에 적지 않은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열린우리당에서 정 전총장과 가까웠던 한 인사는 “특정 정치인을 돕는 것과는 분명 차원이 달랐을 것”이라며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지 않는 한 독자 신당을 만드는 것 자체가 요원하게 느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민주당과 통합신당모임의 연대 움직임이 불발로 끝난 것도 정 전총장의 결단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정가 인사는 자금 문제를 들었다.

“고 전총리가 지지율 1위를 달릴 때만 해도 후원금을 내기 위해 줄을 섰다. 하지만 관료 출신인 고 전총리는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도 좀처럼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주위에 모였던 인재들도 하나 둘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정 전총장도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하는 눈치다. 그는 이와 관련 “그동안 소중하게 여겨온 원칙들을 지키면서 동시에 정치세력화를 추진해낼 만한 능력도 부족하다”며 정치자금에 있어 자신이 없음을 감추지 않았다.

민주당의 한 인사는 “정 전총장이 독자세력화를 모색했지만 정치를 잘 모르는 사람이 이를 주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며 “통합신당 움직임도 지지부진한데다 지지율도 좀처럼 오르지 않자 불출마를 선언한 것 같다”고 말했다.

범여권의 또 다른 대선주자인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은 이를 ‘보이지 않는 유리벽’으로 표현하며 “정 전총장도 그런 장벽을 느꼈던 것 같다. 재미 삼아 불러내면 안 된다”고 말했다.

과거 정 전총장이 “나를 불쏘시개로 이용하려고 한다”며 정치권을 향해 불쾌감을 드러낸 것도 이 같은 연속선상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 빅2 사이에 이른바 검증론이 제기된 것도 비정치인인 두 사람의 행보를 위축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과거 문제가 중점 부각되면서 가족들이 적극적인 만류에 나섰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제학 공부했다 해서…”
고 전총리는 아들의 병역 문제 등을 비롯, 과거 행적들에 대한 의혹들이 제기된 바 있고 정 전총장도 불운했던 어린 시절이 서서히 공개되기 시작했다.

고 전총리의 부인인 조현숙 여사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공직 생활도 오래 했는데 이제는 좀 쉴 때가 되지 않았느냐”며 “정치와는 생리가 맞지 않는다”고 만류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총장 가족들도 정치권 참여를 적지 않게 반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치권 일각에선 두 사람의 발목을 잡은 결정적인 요인으로 청와대의 의중을 지적하기도 한다. 실제로 “고 전총리 기용은 실패한 인사였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있은 후 얼마 안 돼 고 전총리는 사퇴했다.

정 전총장과 노 대통령의 관계가 불편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두 사람은 서울대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 정책을 놓고서도 상당한 시각차를 보여왔다.

노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실물 경제 좀 안다고, 경제학을 공부했다고 해서 경제를 잘 아는 것은 아니다”고 말한 것은 이명박 전시장과 정 전총장을 동시에 겨냥했다는 게 정치권의 평가다. 그만큼 노 대통령이 마음에 두고 있는 인물과 정 전총장은 거리가 있었다는 것.

정 전총장이 사퇴를 결심한 후 청와대 브리핑이 이 달 초 소개한 노 대통령의 글은 이 같은 분위기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노 대통령은 여기서 “지도자가 되겠다고 하는 분은 주위를 기웃거리지 말고 과감하게 투신해야 한다”면서 “안 되면 망신스러울 것 같으니 한 발만 슬쩍 걸쳐놓고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는 자세는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다”라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이 글은 정 전총장이 불출마선언을 하기 일주일 전 작성됐다.

고 전총리에 이어 정 전총장이 중도에 포기한 것은 정치환경도 크게 작용했지만 역시나 청와대의 의중이 상당부분 반영됐을 것이라는 게 열린우리당 인사의 말이다.

김승현  okkdoll@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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