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거인 깨운 ‘로이스터 매직’의 비밀

<만년 꼴찌>. 거인군단 이야기를 꺼내는 첫머리에 빠지지 않던 치욕적 한 마디는 지난해 유효기간이 끝났다. 오랫동안 잠들었던 거인이 마침내 눈을 떴다. 올 시즌 프로야구 8개 팀 가운데 가장 먼저 10승 고지를 밟은 롯데 자이언츠. ‘완벽한 팀’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부족함 없는 롯데를 일으킨 주인공은 바로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외국인 감독인 제리 로이스터(56)다. 잘나가는 팀의 잘나가는 사령탑으로 떠받들어지는 로이스터 감독은 부산의 스타이자 야구영웅이다. 국내파 야구인의 성지처럼 여겨지던 프로팀 수장을 거머쥔 로이스터 감독은 ‘미국식 자율야구’의 달콤한 신세계를 부산 팬들에게 선물했다. 뛰어난 선수관리와 인격으로 아군뿐 아니라 적장들에까지 인정받은 제리 로이스터. ‘야구판 히딩크’ 신화의 비밀을 들여다봤다.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상승세가 무섭다. 매년 되풀이됐던 ‘반짝 돌풍’의 수위는 이미 넘어섰다. 지난 13일까지 부산에서 벌어진 기아와의 홈 3연전을 모두 잡은 롯데는 8개 구단 가운데 가장 먼저 10승 고지를 찍었다. 사상 첫 외국인 감독의 부임으로 환골탈태한 롯데. ‘로이스터의 매직’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부터 시작됐다.
선수·팬 마음 꿰뚫는 덕장
36년 전 LA다저스 선수로 입단, LA 다저스 트리플 A 라스베이거스 감독을 거쳐 2002년 밀워키 사령탑을 지내기까지 제리 로이스터에게 ‘스타’라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부산에서는 사정이 180도 달라졌다. 매일같이 산더미 같은 선물공세에 시달리고 사인을 요청하며 달려드는 팬들에 외출조차 힘들 지경이다. 장 보러간 가게에서 물건 값을 에누리해주는 건 기본이고 대형 할인 마트에서조차 구름 인파를 몰고 다닌다.
로이스터 감독은 모든 순간을 즐기고 있다. 부산에서의 생활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원더풀 타임!’이라고 엄지손가락을 곧추세우는 그는 부산 야구열기에 흠뻑 젖은 특별한 손님이다.
로이스터 감독이 선수와 팬들에게 사랑받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선수에게는 프로다운 대우를, 팬들에게는 선수들과 현장에서 호흡할 기회를 앞장서서 나눠주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승승장구하고 있는 롯데 멤버들은 로이스터 감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긍정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분이다”(내야수 조성환) “친구같이 편안하다. 선수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준다”(포수 강민호) “한마디로 넘버 원! 즐겁게 야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외야수 정수근) “포근하면서도 선수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내야수 이대호) “우리에게 감독과 선수는 더 이상 상하관계가 아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다”(지명타자 마해영)
“선수들 교통비 내가 책임”
‘잘 나가는 팀’을 만든 ‘잘 나가는 감독’의 통 큰 씀씀이도 화제다. 지난 15일 부산 사직 구장에서 벌어진 롯데-두산 경기에 앞서 주장 정수근이 기자들에게 털어놓은 일화는 순식간에 로이스터 감독을 ‘최고의 훈남’으로 만들었다.
한 일간지와 인터뷰를 가진 정수근은 “감독님은 선수들 컨디션 조절을 위해서라면 자기 지갑도 아낌없이 여시는 분”이라고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사연은 이렇다. 지난달 25일 서울 양재동에서 열린 프로야구 미디어데이에 참석하기 위해 로이스터 감독과 정수근, 송승준, 장성우 등 4인방이 서울길에 올랐다. 팀 응원가 녹음 일정으로 새벽에 서울행 KTX를 탄 탓에 이들은 하루 종일 극심한 통근피로(?)에 시달렸다.
참다못한 주장 정수근이 구단 관계자에게 ‘부산으로 돌아갈 땐 비행기로 가게 해달라’며 읍소했지만 구단 측은 난감해했다. 이미 부산행 기차편을 예약해뒀기 때문이다. 그때 로이스터 감독이 나섰다. 감독은 “선수들이 피곤하다는데 비행기로 가자”며 본인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연일 매진, 롯데 흥행 마술사
정수근은 “항공권뿐 아니라 서울서 탄 모범택시 요금까지 모두 감독님에 계산하셨다. 하루 종일 적지 않은 돈을 쓰셨는데 감독님은 ‘난 한국에 돈 벌러 온 게 아니다’며 웃으셨다”고 전했다. 선수들 컨디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통 큰 씀씀이에 감동 받을 만하다.
롯데가 올 시즌 주중 3연전 뒤 서울로 올라올 때 비행기를 타게 된 것도 로이스터 감독의 제안으로 결정됐다. 프로선수들이 자신의 몸을 맡기고 따르기엔 더 없이 훌륭한 마음가짐이다.
롯데 사령탑 취임 뒤 첫 인터뷰 자리에서 로이스터 감독은 팬서비스를 유독 강조했다. 일명 ‘팬프렌들리(Fan Friendly)야구’다.
그는 적극적으로 구단에 의견을 내 팬들을 위한 마케팅전략까지 손수 챙기고 있다. 그는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열기를 몸으로 느낀 뒤 직접 구단 직원들에게 여러 가지 흥행 아이디어를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는 지난 13일 기아와의 홈경기에 5회말이 끝난 연간회원 관중 10명을 덕아웃으로 초대했다. 팬들은 선수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덕아웃의 생생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이벤트는 다름 아닌 로이스터 감독의 머리에서 나왔다. 스스로 ‘덕아웃 워크’라 이름붙인 감독의 제안은 부산 야구팬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얻었다.
또 롯데 팬 상품가게를 이용한 관람객 가운데 추첨을 통해 로이스터 감독과 국민의례를 할 수 있는 이벤트도 벌어졌다. 행사 이름은 ‘제리와 함께’. 이 역시 로이스터 감독이 직접 머리를 짜낸 결과다.
로이스터 감독은 최대한 팬들과 선수 사이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부산팬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정말 행복하다. 열렬한 응원뿐 아니라 팬레터와 선물을 챙겨주는 팬들도 많아 감사드린다”고 머리를 숙였다. 그는 롯데가 ‘가을잔치’에 뛰게 되면 구성진 ‘부산 갈매기’를 열창하겠다는 약속도 더했다.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감독의 마케팅 전략 때문일까. 롯데는 지난 15일 평일관객만 1만9200명을 동원했고 주말경기는 2경기 연속 매진을 기록했다.
롯데와 맞붙은 상대팀의 팬이 포털 사이트에 올린 글엔 로이스터 감독에 대한 진한 호감이 배어있다. 스스로 삼성라이온즈 골수팬이라고 밝힌 누리꾼은 “투수가 바뀔 때마다 직접 걸어 나와 투수들의 기를 살려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상대팀 타자에게 안타를 얻어맞고 연속 폭투를 던진 신인에게도, 세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잡은 만점짜리 베테랑에게도 로이스터의 태도는 한결 같았다.
‘로이스터 식’ 선수 조련법
강판되는 투수들의 엉덩이를 수고했다며 툭 쳐주고 등판하는 투수의 글러브에 손수 공을 쥐어주는 감독의 모습은 확실히 새롭다. 특히 눈에 띄는 활약을 하고 돌아오는 선수들에게는 정이 듬뿍 담긴 포옹까지 선사한다.
또 다른 야구팬은 칭찬에 인색한 한국 야구에 로이스터가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고 평했다. 이 팬은 “재미보다 승부에 집착하는 ‘한국식 안전주의’에서 벗어나 주자 무사 1루 상황에도 ‘강공’을 주문하는 로이스터의 전략은 야구도시 부산을 들뜨게 한다”며 로이스터의 선수관리 능력은 국내무대에서 ‘지존급’이라 평했다.
마음을 주고받는 로이스터식 선수 조련법은 1군 선수를 2군으로 내려 보낼 때 확실히 빛난다. 다른 감독들이 보통 전화로 강등 소식을 알려주는데 반해 로이스터 감독은 직접 선수를 불러 타이른다.
‘너는 좋은 선수지만 이런 점이 좀 미흡하다. 2군에서 약점을 잘 보완하면 곧 나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선수에게 목표의식을 심어주는 것. 그 자리에는 코치진도 함께 참석해 선수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올 초 롯데가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외국인 감독을 선임하자 야구계는 한바탕 벌집을 쑤신 듯 했다. 일부는 로이스터 감독 부임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감독이 메이저 리그 출신이어도 선수들이 따라가지 못하면 헛수고라는 회의적 의견도 있었다.
여기엔 외국인 지도자들이 줄줄이 한국에 진출하면 국내 지도자들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위기감도 섞여있다. 때문에 로이스터 감독을 선임한 롯데의 선택은 ‘판돈 큰 도박’에 가까웠다.
최근까지 롯데의 ‘다걸기 전략’은 말 그대로 대박이다. 팀 성적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롯데를 본보기로 제2, 제3의 외국인 감독 탄생도 머지않은 분위기다. 이런 가운데 국내 지도자들도 조금씩 로이스터 감독의 능력을 인정하고 나섰다.
국내 감독 “로이스터 잘한다”
현역 사령탑인 김성근(SK)·이광환(우리)감독은 모 일간지와 인터뷰를 통해 롯데의 저력이 감독에게서 나오고 있음을 인정했다.
김 감독은 “롯데는 감독의 역할이 큰 것 같다”고 평했다. 이 감독도 “로이스터 감독의 지도 방식은 미국식 자율야구에 기초를 두고 있다. 나머지 팀들도 자율과 시스템화에 앞장서 선진화 돼야한다”고 말했다.
국내 지도자들이 지적하는 로이스터식 조련법의 비결은 ‘동기를 부여해 의욕을 이끌어내는 능력’이다. 시즌 초반이라 성급한 판단은 무리지만 ‘로이스터호’가 제대로 순항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들고 온 선물보따리를 다 풀지 않았다. 가깝게는 지난 8년 동안 쥐지 못한 ‘가을잔치’ 초대권이고 궁극적으로는 ‘야구도시’로 명명될 부산의 우승이다. <만년 꼴찌> 롯데 자이언츠를 ‘플레이오프 진출 가능성 90.9%’의 명문으로 변신시킨 그의 마법은 현재 진행형이다.
#<로이스터 감독 프로필>
성명 : 제리 로이스터 (Jerry Royster)
출생 : 1952년 10월 18일
직업 : 프로야구팀 감독
학력 : 새크라멘토 고등학교
소속 : 부산 롯데 자이언츠
데뷔 : 1972년 LA다저스 입단
경력 : LA 다저스 트리플 A 라스베가스 감독
밀워키 브루어스 감독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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