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삼수의 한 충청권 맹주로 푼다”

대선에서 삼수의 쓴 잔을 마신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가 4·9총선에 출사표를 던졌다. ‘서울 출마설’이 나돌았지만 최종 선택지역은 선영이 있는 충남 예산·홍성이었다.
선진당은 이 총재와 심대평 공동대표를 ‘쌍두마차’로 내세워 충청권에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대선에 세 번이나 출마했던 이 총재가 지역맹주로 정치적 생명을 이어가려 한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2002년 대선 패배 뒤 이 총재는 눈물을 흘리며 정치권 은퇴를 선언했다.
그로부터 5년 뒤 그는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겠다”며 다시 정치권에 돌아왔고 세 번째 대권에 도전했다. 총선출마 역시 말 뒤집기는 거듭됐다.
이 총재는 지난해 말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총선출마 여부를 묻는 질문에 “총선출마는 생각지 않는다”고 강조하며 “한 알의 밀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총선출마에 부정적이던 이 총재가 충남행을 택한 데엔 어려움에 놓인 당의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이 총재 쪽이 신당을 만들 때만 해도 포부는 적잖았다. 한나라당에 대한 ‘견제심리’가 작용하고 통합민주당이 갈팡질팡한다면 원내 제2당 자리도 가능할 것이란 판단이었다.
‘미스터 쓴 소리’로 통했던 조순형 의원 입당은 천군만마와 같은 호재거리였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고 현실은 냉혹했다.
지난 달 말 공천신청자 뚜껑을 열어본 당 지도부는 예상치 못한 인력난에 시름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전국 공천경쟁률은 2.25 대 1에 그쳤다. 당지지율도 3%대 안팎으로 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비례대표후보가 유력했던 이 총재와 조 의원 등을 향해 자연스럽게 지역구출마 압박 목소리가 높아졌다.
낮은 당 지지율로 고전하던 서울, 수도권, 충북도당 등에서 특히 요구의 강도가 심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 총재 쪽도 ‘지역구 출마’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昌, ‘제2의 JP’ 노린다
여러 지역을 놓고 출마를 고민하던 이 총재는 지난 4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예산·홍성출마 결정소식을 알렸다.
그는 이 자리에서 “현재로선 충남 예산에서 출마하는 게 당의 총선전략상 중요하다고 해 따르기로 했다”면서 “국회의원 한 번 더 해보자는 게 아니다. 신보수정당의 성공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지난 세월 꾸준히 지지해 준 고향 분들에 대한 보답의 뜻도 포함 된다”고 출마 배경을 밝히며 “서울지역출마도 고민했지만 이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심 대표는 이 총재의 충남출마에 대해 “우리 당은 충청권에서 확고한 지지 바탕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하며 “이 총재가 중부권바람을 일으키면 다른 유력인물들이 수도권에서 화답할 것”이라고 총선전략을 설명했다.
선진당 관계자는 “설 이후부터 이 총재가 충북, 대전, 충남을 잇달아 방문하며 상당한 공을 들였다”고 말하면서 “충청권에서 탄탄한 지지를 받지 못하면 전국정당 꿈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당이 놓인 입장을 대변했다.
이 총재가 지난날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만큼의 위상을 충청권에서 얻어야 앞으로의 정치행보를 기약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말 바꾸기 달인”
이 총재의 충청권출마에 가장 발끈한 곳은 한나라당. 그가 가는 곳마다 “한나라당 독주를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눈에 거슬렸지만 충청권 전체에 대한 위기감도 적잖았다.
지난 대선 때도 “한때 당의 최고 어른이었다”며 날선 칼날을 자제하던 한나라당도 이번만큼은 작심한 듯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이제 대한민국의 맹주가 아닌 충남 맹주가 되겠다고 나서는 이회창씨는 지금이라도 정계에서 은퇴하고 국민 앞에 석고대
죄 해야 한다"면서 “이 총재 출마로 충남의석을 많이 차지하려는 모습이 정말 처연하기조차 하다”고 비꼬았다.
김대은 부대변인도 “대선불출마에서 출마로, 총선불출마에서 출마로 말 바꾸기에 달인이 돼 버린 염치없는 행동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하다”고 거들었다.
“충청당도 필요”
한나라당 비판에 선진당과 이 총재 쪽의 반박논리도 분명하다. ‘영남당, 호남당은 있어도 되고 충청당은 없어야 한다는 건 오만의 극치’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선진당 고위관계자는 “어느 정당이든 지역기반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다만 배타적인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과거 정치행태는 사라져야 한다”고 맞받아쳤다.
이 총재의 총선출마를 놓고 한편에선 JP와 비교하는 시각이 많다. 자민련과 JP, 충청권으로 이어졌던 삼각구도를 이 총재가 재현하려 한다는
것.
이 총재는 선진당의 제1야당 목표와 관련, “보수를 추구하는 선진당이 한나라당을 견제하는 세력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제1야당이 되는 방법은 쉽게 말해 (총선에서) 표를 많이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충남출마도 이런 전략적 사고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다.
그는 또 “교섭단체에 실패할 경우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며 20석 이상 획득을 자신했다.
‘투 트랙 총선전략’
이 총재는 총선전략을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구상하고 있다. 충청권을 중심으로 지역선거에서 이겨 많은 당선자를 배출해야 하지만 정당명부제 투표를 위해 당지지도를 높이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
이를 위해 이번 총선에서 온 몸으로 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과거 충청권의 맹주였던 JP는 4년 전 17대 총선을 앞두고 ‘지는 해’란 비판이 나오자 “지기 전에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고 마지막 의지를 내비쳤다. 하지만 탄핵역풍으로 결과는 참패였다. 그리고 그는 정계은퇴를 선언해야만 했다.
대권에서 세 번 실패한 뒤 또 다른 꿈을 키우고 있는 이 총재의 도전이 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사제지간 대결, 이회창 VS 홍문표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가 충남 예산·홍성지역에 출마하기로 함에 따라 한나라당 홍문표 의원과의 대결도 피할 수 없게 됐다.
홍 의원은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 총재를 보좌하는 등 과거 두 사람 사이는 ‘정치적 사제’ 지간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다.
탄핵역풍이 드세게 불었던 2004년 17대 총선에서 홍 의원이 한나라당 출신으론 유일하게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총재의 존재가 적잖은 힘이 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홍 의원은 이 총재가 정계에서 은퇴해 있을 때 그의 정계복귀를 촉구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두 사람은 지난 대선에서 이 총재가 독자출마를 선언하면서부터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으로 전해진다.
이 총재 출마에 대해서도 홍 의원 쪽은 불만이 적잖다. 그는 “(이 총재를)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지역엔 힘 있는 여당의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구태정치의 모습으로 지역정치를 한다는 건 참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이 총재 쪽은 “당선을 자신하므로 특별한 부담은 없다”면서 “애초부터 급이 다르지 않느냐”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나타냈다.
이 곳 선거구는 농촌지역으로 보수성향이 짙은데다 지난 대선에서 이회창 총재 지지율이 압도적일 만큼 텃밭으로 불린다.
‘외나무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된 두 사람의 경쟁에서 누가 최후승자가 될지 관심이 모아진다.
김승현 기자 okkdoll@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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