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도 가식이라 오해, 조심 또 조심”

네덜란드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서 뛰고 있는 이천수(27). 한국 축구 최고자원으로 손색없지만 상대적으로 평판은 그리 좋지 않다. 특히 지난해는 갖가지 구설수로 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해외이적을 요구하며 소속팀 훈련을 거부했고 네덜란드로 떠나선 두 달 만에 갑자기 귀국, 갖가지 추측에 시달렸다. 더구나 새해 벽두부터 술자리 폭력시비에 휘말리기까지 했다. 새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허정무 감독이 “국가대표는 모든 선수의 모범이 돼야 한다”며 그의 이름을 명단에서 빼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천수의 반응은 훨씬 담담하다. 물론 ‘무모한 배짱’이 아니다. 숨겨왔던 속마음을 풀어놓고 좀 더 자유로워 졌다는 표현이 맞을 듯싶다. 다시 한 번 축구화 끈을 질끈 동여매며 이천수는 지금까지의 ‘당돌함’이 내성적인 속내를 감추기 위한 갑옷에 불과했다고 고백했다.
“저를 믿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지난 3일 오후 후원사 계약 체결식에서 기자들과 만난 이천수는 어렵게 운을 띄웠다. 지난달 31일 불거진 ‘술자리 폭행설’을 해명하는 자리였다.
그는 그날 네덜란드에서 귀국, 서울 청담동 나이트클럽에서 친한 선수들과 연예인들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
하지만 다른 일행과 시비가 붙었다. 이 사건은 곧장 ‘이천수 폭력 사건 연루’란 제목으로 모 스포츠일간지에 대서특필됐다. 자극적인 보도와 달리 그는 곧장 자리를 뜬 것으로 알려져 한 바탕 소동으로 끝났지만 그는 꽤 상처를 받은 눈치다.
“매일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닌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줄 안다. 그 선입견 때문에 가슴앓이도 많이 했다”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는 발이 꽤 넓은 편이다. 축구계와 연예계를 통틀어 그만한 ‘마당발’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 한 지인은 “쉬는 날 새벽 3시에 불러내도 달려나오는 게 이천수다. 술이 세지는 않아도 의리하나 만은 끝내주는 친구”라며 엄지를 추켜세운다.
그만큼 챙겨야할 사람도, 일도 많은 ‘비즈니스 맨’의 위치랄까. 차범근이나 박지성 같은 ‘수도승’을 최고로 여기는 한국에서 그는 신선함과 동시에 거슬리는 존재다.
“태안 봉사활동 하고 싶었다”
갓 스무 살 때인 2002년엔 무서울 게 없었다. 월드컵 8강 진출을 이룬 이탈리아전에서 ‘전설’ 말디니의 뒤통수를 걷어차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자신감이 넘쳤던 것.
하지만 “한국엔 존경할만한 선배가 없다”는 한마디로 여론의 멍석말이를 당한 뒤 그는 ‘입천수’, ‘혀천수’ 등의 조롱거리로 추락했다. 바로 ‘이천수 언론 공포증’의 시작이다.
“사람들 선입견만큼 무서운 게 없더라. 한국에 오자마자 태안에 봉사활동을 가려고 소속사에 제안을 했다. 도시락 싸들고 일을 거들면서 위로하고 싶었다. 최요삼 선수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조의도 표하고 싶었는데 마음에 걸리는 게 너무 컸다. 내가 그러면 ‘이천수 또 쇼 하
네’란 말이 나올 게 뻔했으니까. 진심도 가식으로 비칠까봐 너무 두렵다.”
지난 5일 이천수는 5박 6일의 짧은 휴가를 마친 탓에 폭설로 방제작업이 멈춘 충남 태안에 갈 수 없었다. 또 하나 사람들의 날선 비난이 그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가 된 것도 인정해야할 부분이다.
“아파도 약 먹고 뛰는 것 좋아”
그는 지난해 11월 유럽진출 두 달 만에 ‘도둑입국’해 갖가지 추측에 시달린 사정도 속 시원히 털어놨다. 울산현대에서 한 시즌을 소화하고 휴식 없이 네덜란드로 날아간 게 독이된 것이다. 계속 남아서 훈련했다간 오히려 몸을 망칠 것 같았다. 무작정 팀단장과 감독을 찾아가 “2주 만 휴가를 달라”고 솔직히 요청했다.
물론 팀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단지 휴식을 위해서인 만큼 인터뷰를 자제해 달라는 팀의 당부를 받아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죽을 만큼 몸이 힘들었다. 뛰어도 내가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는 것 같더라. 뭔가 보여주고 싶어도 불가능한 몸을 끌고 움직이느니 국내에서 쉬고 다시 시작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지난해 7월 아시안컵을 치르며 극심한 감기몸살에도 약기운에 그라운드를 밟았던 그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다.
그 때 영국 뉴캐슬 유나이티드 관계자가 자신을 보러왔다는 이유로 이를 악물었던 것.
“아파도 약 먹고 뛰는 걸 좋아 한다”고 할 만큼 악바리인 그가 휴식을 선택했을 땐 이유가 있었다.
이천수는 지난 3일 네덜란드 진출 뒤 첫 기자간담회에서 솔직히 고백했다. “그라운드 안에서 패기 넘치는 모습은 내 성격과 다르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나에게 쏟아진 왜곡된 시선이 많이 힘 들었다”는 것.
“소심하고 여린 속내 감췄다”
그가 유독 구설수에 휘말리고 있지만 유럽 선수들에 비해선 약과다. 2000년 술에 취해 파키스탄학생을 폭행한 웨스트햄의 리 보이어나 지난달 29일 식당에서 폭력사건을 일으켜 구치소에서 새해를 맞은 뉴캐슬의 조이바튼, ‘도박 마니아’를 자처한 마이클 오웬 등은 한국이라면 일찌감치 선수생명이 끊겼을 사람들이다.
일부 팬들은 이천수의 거침없는 입담과 밤나들이(?)는 애교에 가깝다고 대신 항변할 정도다.
이천수는 “있는 그대로 나를 봐줬으면 한다. 살면서 단 한번 남을 괴롭힌 적도 없는데 이렇게 포장이 됐을 뿐이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한편 평판이 안 좋은 최근에도 후원계약을 맺어준 업체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거짓말이든 진실이든 (나쁜 얘기가) 한번 나오면 사람들은 사실로 믿어버린다. 하지만 온갖 소문에도 나를 믿어주는 이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들을 위해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혼? 아직 여자 없어요”
2006년 동갑내기이자 미스코리아 출신 탤런트인 김지유와 1년간의 열애를 끝낸 이천수는 화려한 싱글이다. 그녀와 헤어진 뒤 다른 여배우와 핑크빛 소문이 나돌긴 했지만 정식으로 교제한 것은 아니다.
많은 선수들이 안정을 위해 이른 결혼을 서두르지만 이천수는 느긋하다. 결혼에 대한 질문에 그는 “여자가 없다. (김)도훈이 형이 얼마 전 네덜란드에 왔는데 전성기엔 결혼하지 말라고 했다. 체력에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라”며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 축구에만 전념해 네덜란드
성공신화를 쓰겠다는 뜻이다.
50명의 예비 엔트리를 발표한 ‘허정무 호’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도 개의치 않는다.
그는 5일 출국장에서 “허정무 국가대표팀 감독은 나에게 처음 태극마크를 달아주신 분이다. 또 네덜란드(PSV 아인트호벤)에서 선수생활을 하신 선배기도 하다. 당장은 소속팀에서 입지를 다지고 더 열심히 하라는 배려로 알겠다”고 말했다. 아직 예비명단이고 대표팀 승선의 문은 열려있는 만큼 조바심내지 않겠다는 것.
‘당돌한 아이’는 어느새 청년으로 자랐다. 2003년 스페인에서의 실패를 곱씹으며 다시 도전한 네덜란드는 기회의 땅이다. 수많은 억측과 편견으로 상처 입은 이천수의 부활은 이제 시작이다.
#이천수, 네덜란드 언론과도 불편한 관계?
이천수의 월드컵 예비엔트리 제외 사실에 네덜란드 언론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스포르트 위크’와 ‘부트발 코우란트’, ‘부트발 인터내셔널’ 등 현지언론들은 지난 6일 “이천수가 2010년 남아공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 예선 예비엔트리(50명)에서 제외됐다”고 앞 다퉈 보도했다.
이들 매체는 ‘이천수가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 출전 못할 수도 있다. 새 대표팀을 맡은 PSV출신의 허정무 감독이 정신력 문제로 그를 뽑지 않았다’고 전했다. 덧붙여 ‘그의 정신력은 페예노르트에서도 문제가 됐다’고도 지적했다. 이들은 지난 11월 이천수가 휴가를 이유로 2주간 팀을 떠난 것을 놓고도 비난에 가까운 논조를 선보인 바 있다.
튀는 행동과 말로 한국에서도 ‘미운털’이 박힌 이천수가 네덜란드 현지언론과도 ‘불편한 관계’에 빠진 것은 아닌지 팬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수영 기자 sever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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