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은반요정’김·연·아

‘피겨요정’ 김연아가 2007년을 빛낸 최고의 스포츠스타로 선정됐다. 지난 12월 9일 여론조사기관인 한국갤럽은 전국의 만 19세 이상 성인남녀 1071명을 대상으로 ‘올해 한국을 빛낸 스포츠 선수’를 묻는 설문조사를 했다. 결과 김연아는 남녀노소 모든 계층에서 한결같은 지지를 얻어 ‘국민 여동생’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세계적 은반요정’으로 우뚝 선 김연아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봤다.
김연아(17)가 피겨스케이트를 처음 접한 것은 여섯 살이 되던 해인 1996년 7월. 그 때 유치원생이었던 연아는 어머니 박미희(49)씨 손에 이끌려 언니 애라(21)씨와 함께 집 근처 과천시민회관 실내 빙상장에 놀러갔다. 그 전까지만 해도 여섯 살 어린소녀는 그저 얌전하고 수줍음 많은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그러나 수줍음 많고 말수도 적었던 연아는 어찌된 영문인지 얼음 위에만 서면 활달해졌다. 어느 때보다 즐거워하는 연아를 위해 박씨는 단체 피겨스케이팅 강습을 받게 했다. 점점 집에 있는 시간보다 빙판위에 서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배우는 속도도 남들보다 월등히 빨랐다.
7개월 남짓한 단체강습과정이 모두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강습지도자였던 유종현(39) 코치가 박씨를 붙들어 세웠다. “연아가 피겨에 재능이 있으니 한 번 키워보자”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 였다.
6세 ‘피겨신동’ 김연아
김연아의 성장세는 눈부시게 빨랐다. 개인교습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1바퀴 점프를 구사하더니, 금세 2바퀴 점프도 익혔다. 피겨스케이트를 시작한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연아를 ‘피겨의 신동’이라 불렀다.
그러던 1999년 드디어 ‘일’이 터졌다. 제4회 전국소년체전에 참여한 연아가 중·고교 선배들을 제치고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그 때 그녀의 나이는 열 살.
그 후 연아의 부모는 큰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딸의 기술수준을 더 발전시키기엔 국내 시스템에 한계가 따랐기 때문이다. 선진국에 해외연수를 보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때부터 박씨는 평균 1500만원이나 드는 두 달간의 해외연수를 매년 빠짐없이 보냈다.
가족의 헌신으로 선진국인 캐나다와 미국에서 맞춤형교육을 받은 김연아는 기술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열두 살 무렵엔 이미 5종류의 트리플점프를 마스터하기도 했다.
김연아의 수준이 올라갈수록 부모는 딸에게 ‘올인’했다. 박씨는 집안일을 남편에게 맡기고 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곁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딸이 강습을 받을 땐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피겨대회가 있는 날이면 이를 녹화해 집에서 수백차례 테이프를 돌려보기도 했다.
국제대회 연이어 우승
국제대회론 처음 슬로베니아에서 열린 트리글라브트로피대회에 나간 연아는 노비스(13세 이하)부문에서 당당히 우승을 거머쥐었다.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리는 교두보를 마련한 셈이다. 그 때 그녀는 초등학교 6년생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03년
골든베어대회 노비스 부문에서 또 한 번 우승을 차지했다. 연아는 한국피겨의 미래로 떠올랐다.
김연아의 눈부신 활약상에 대해 김혜경 빙상연맹 국제이사는 “연아가 몸매가 가늘고 다리가 길어 체격조건에서 서양 선수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태극마크를 단 김연아의 삶은 그야말로 피겨스케이트 중심으로 돌아갔다. 태릉선수촌과 빙상장, 집을 오가며 훈련만 하기에도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오전엔 태릉선수촌에서 다른 국가대표 선수들과 함께 훈련했고, 오후엔 김세열 코치와 경기도 과천빙상장에서 개인훈련에 몰두했다.
학교는 김연아의 삶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하지만 부모도, 본인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른 또래 아이들과는 삶의 목표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김없이 찾아온 사춘기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김연아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왔다. 매일같이 거듭되는 훈련에 점점 이골이 나기 시작했다. 모든 게 무의미했고,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런 연아의 마음가짐은 2004년 2월에 열린 종합선수권대회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다른 선수들보다 표현력이나 기술력이 매우 뛰어났지만 그뿐이었다. 우아한 몸동작과 시원한 점프와는 달리 그녀 표정은 시작부터 끝까지 잔뜩 굳어져 있었다.
대회가 끝나고 그 해 여름 연아는 주니어그랑프리대회 연습을 위해 캐나다 토론토 마리포사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짧은 훈련을 마치고 9월 초 한국에 돌아온 연아는 처음 주니어그랑프리대회에 나가게 됐다. 나이제한에 걸려 자격을 얻지 못했던 터였다. 첫 출전인 만큼 5위 안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김연아는 주니어그랑프리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한국피겨선수가 이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랑프리 우승 뒤 연아는 다시 자신감을 얻었다. 사춘기도 그렇게 끝나갔다.
주니어그랑프리 4차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연아는 그랑프리 파이널에 나갈 자격을 얻었다. 이 대회에서 연아는 처음 동갑내기 아사다 마오를 만났다. 마오는 주니어그랑프리대회에 등장한 뒤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준 적 없는 막강한 선수였다. 이날 대회에서도 마오는 쇼트 1위, 프리 1위로 총점 172.83을 얻어 우승했다. 연아는 쇼트 2위, 프리 3위로 2위(총점 137.75)에 머물렀다.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
2005년 6월 연아는 김세열 코치와 함께 미국 콜로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반기에 열리는 세계 주니어그랑프리와 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선보일 안무를 짜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연아는 안무전문가인 톰 딕슨-카타리나 딕슨 부부를 만나 쇼트프로그램 안무를 새로 짰다. 또 프리스케이팅 안무를 더 세련되게 가다듬는 연습을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차례 그랑프리시리즈에 나간 연아는 모두 1위를 차지하면서 주니어 랭킹 1위로 파이널에 진출하게 됐다. 또 결승에서도 174.12점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지난해 준우승에 이어 1년 만에 거둔 쾌거였다.
그러나 아사다가 불참한 가운데 거둔 ‘반쪽짜리 우승’이었다.
시니어 그랑프리 데뷔
주니어그랑프리 파이널대회를 마치고 2006년 3월 연아는 다시 한 번 세계무대를 재패하기 위해 출국했다. 연아와 마오의 승부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 대회를 끝으로 성인무대에 도전할 연아에게 마오는 반드시 뛰어넘어야할 벽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대회를 앞두고 가장 중요한 스케이트화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연아는 자신의 발에 맞지 않는 스케이트화 때문에 오른쪽 발목에 인대가 늘어난 상태였다.
2006년 3월 10일 오전, 세계선수권대회가 시작됐다. 출국 전까지 발에 맞지 않는 스케이트화로 고생한 연아는 스스로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연아는 이 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다. 마오는 큰 실수를 연거푸하면서 2위에 머물러야만 했다.
주니어대회의 화려한 막이 내리고 연아는 그해 5월 캐나다 토론토로 훈련을 떠났다. 연아는 이곳에서 세계적 피겨안무가 데이비드 월슨의 지도 아래 프리프로그램을 새로 짰다. 또 예술성 있는 동작을 중심으로 맹훈련을 거듭했다.
석 달동안의 짧은 훈련이 끝났다. 그러나 주니어 때부터 줄곧 그녀를 괴롭혀 온 부츠문제와 그로인한 부상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게다가 허리통증까지 겹쳐 연습량이 충분치 못했다.
2006년 11월 시니어대회가 열렸다. 그녀는 쇼트 62.68점, 프리 105.80점으로 종합 3위에 올라 무난한 시니어 데뷔전을 치렀다. 시니어그랑프리 2차 대회에서 3위를 한 연아는 떨어진 체력을 보강하는 데 중점을 뒀다. 그리고 두 번째 시니어대회를 위해 파리로 날아갔다.
4차 대회에서 연아는 쇼트 63.04점, 프리 120.23점을 얻어 총 184.54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시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그로부터 한 달 뒤 김연아는 시니어그랑프리 파이널 출전을 위해 러시아로 떠났다. 그러나 허리통증으로 물리치료를 받던 연아에게 장시간 비행기 탑승은 쉽지 않았다.
힘든 여정이 끝나고 드디어 개최지인 러시아에 도착했다.
2006년 12월 16일 대망의 시니어그랑프리 파이널대회가 열렸다. 점프에서 약간의 실수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수준 높은 연기를 선보였다. 결과 쇼트 65.06점, 프리 119.14점으로 총 184.20점을 얻어 우승을 차지했다. 게다가 동갑내기 마오와 11.68점이란 큰 점수 차로 역전해 우승한 것이어서 더욱 뜻 깊었다. 이로써 연아는 한국빙상 100년 역사를 다시 쓰며 세계 최정상급
선수로 자리매김 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올 3월 27일, 연아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위해 다시 캐나다 토론토로 훈련을 떠났다.
그는 여기서 브라이언 오셔 코치와 점프부터 세부동작까지 전체적인 연기에 점검을 받으며 감각을 익혔다.
연아는 매일 오전 8시부터 하루 3차례 훈련에 매진했다. 또 러닝과 근력훈련 강도를 높여 체력보강에 힘썼다. 그 때문인지 허리통증이 재발하면서 몸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2007년 3월 24일 세계피겨선수권대회가 개막했다. 그러나 연아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허리부상에 이어 꼬리뼈부상으로 허리에 테이핑을 하고 진통제를 먹어야만 했다. 몸과 마음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연아는 대회 첫날 지금까지의 쇼트 중 최고연기를 선보였다. 빠른 속도감과 힘이 넘치는 스케이팅, 정열적인 스템, 파워풀한 점프 등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경기가 끝남과 동시에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그러나 체력이 바닥난 둘째 날 점프에서 2차례 실수가 있었다. 결과 총 186.14점으로 종합 3위, 동메달에 그쳐야만 했다. 하지만 김연아가 한국 스포츠의 불모지로 여겨졌던 피겨스케이팅을 세계에 알렸다는 데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계 정상을 향한 연아의 진화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란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김 연 아 프로필
▶생년월일 - 1990년 9월 5일
▶출 생 지 - 경기도 부천
▶신체조건 - 163cm, 43kg
▶출신학교 - 군포 신흥초→도장중→수리고
▶가족관계 - 김현석(부)·박미희(모)씨의 2녀중 막내
▶혈 액 형 - O형
▶취 미 - 인터넷 서핑
▶좋아하는 선수 - 샤샤 코헨(미국)
<자료제공 : 은반요정 김연아 팬카페>
박지영 기자 pjy0925@dailysun.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