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시즌인 요즘 증권가를 중심으로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의 ‘차기 대통령 후보설’이 심심찮게 나돌고 있어 눈길을 끈다. 한때 개미투자자들 사이에선 ‘박현주 따라 하기’가 투자의 정석처럼 여겨졌다. 개미들은 심지어 동호회까지 만들어 ‘미래가 사면 무조건 대박이 터진다’는 기이한 속설까지 퍼트리며 박 회장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런 현상은 대선시기인 요즘 한발 더 나아가 ‘18대 대통령은 박현주 회장’이란 추대설로 이어졌다. ‘박현주 신화’가 증권계를 넘어 정치권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경제대통령’을 기대하는 유권자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더해지면서 ‘박현주 추대설’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차기 경제대통령으로 거론되고 있는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봤다.
‘한국 증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1세기 한국 금융시장을 이끌어갈 뉴리더’ ‘여의도의 칭기즈칸’. 박현주(49)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불과 10년 만에 자본금 100억원의 미래에셋을 국내 자본시장의 최강 기업으로 이끌었다. 그는 또 발 빠른 해외진출로 국내 금융회사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메이드 인 파이낸스코리아’를 가능하게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부모의 올곧은 교육방침
광주시 광산구 평동에서 태어난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 집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1988년 광주시에 편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평동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박 회장의 아버지 또한 평범한 농사꾼으로 혼례 때 새 옷을 사 입을 돈이 없어 이웃사람 것을 빌려 입었다고 한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가 ‘박현주 신화’를 일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부모의 올곧은 교육방침 때문이었다. 그의 부친은 아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여러 번 전학을 시켰다고 한다. 때문에 박 회장은 동네친구들이 다니는 평동초등학교가 아닌 집에서 10리 길이나 떨어진 송정리 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높다고 해서 그의 부모가 자식을 ‘왕자’처럼 떠받들어 준 것도 아니었다. 박 회장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그의 부친은 제법 큰 농사를 짓는 중농이 됐다. 하지만 아들에게 제대로 된 운동화 한 켤레 사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단 하나. 동네 다른 아이들도 안 신는 운동화를 내 자식에게만 신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부모는 다른 학부모와 달리 박 회장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 책읽기를 권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박현주 신화’를 일구게 된 원동력이 됐다. 그 또한 공개 석상을 통해 여러 번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일례로 박 회장은 고등학교 시절 그에게 큰 힘이 돼줬던 <제3의 물결>을 19번이나 거푸 읽었다고 한다.
갑작스런 부친 타계
중학교를 수석 졸업한 박 회장은 우수한 성적으로 광주제일고에 입학했지만 예기치 않았던 불행과 맞닥뜨리며 곧 공부와 담을 쌓게 된다. 합격통지서를 받던 날 건강했던 부친이 갑작스레 세상을 등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수재’ 소리를 듣고 자랐던 박 회장이었지만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은 어린 그에게 큰 혼란을 가져왔다. 자연히 공부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고등학교도 전교생(760명) 가운데 698등으로 졸업했다.
부친의 급작스런 타계와 관련, 박 회장은 “사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고 삶의 근본은 무엇인지, 선악은 무엇이며,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회의하게 됐다. 삶 자체가 의심스러운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느냐”고 회고했다.
부친의 죽음에 충격 받아 의사가 되겠다며 이과를 지망했던 박 회장은 재수 도중 문과로 방향을 바꿨다. ‘조직을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된 것이다.
일련의 아픔을 뒤로한 채 1978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박 회장은 대학원 진학과 더불어 공인회계사 자격시험을 준비했다. 이 또한 회계사가 되겠다는 것보다 회계사무소(조직)를 차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주식에 눈을 뜬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수업시간에 자주 거론되던 주식이 현실 경제에선 어떻게 작용되는지 알고 싶었던 박 회장은 그때부터 서울 명동 증권가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는 것만으론 ‘2%’ 부족했다. 결국 그는 모친이 붙여준 1년 치 학비와 생활비를 주식에 몽땅 투자했고, 이익도 냈다.
마침내 대학원생이었던 1984년엔 서울 회현동 코리아헤럴드빌딩 18층에 20평 남짓한 사설투자자문사인 내외증권연구소도 세울 수 있었다. 여직원도 한 명 두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26세.
어린 나이였지만 증권가에서도 박 회장은 유명했다. 젊은 청년이 놀라운 수익을 올리는 데다 증시예측도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증권가를 중심으로 이런 소문이 쫙 퍼질 무렵인 1986년 박 회장은 돌연 내외증권연구소 문을 닫았다. 투자자문회사 설립에 법적 근거가 없다는 점과 아직 개인사업자가 독자브랜드로 자본시장에 뛰어들 분위기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이승배 상무와의 인연
그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증권사는 박 회장을 특채하기 위해 줄을 섰다. 하지만 그는 ‘군침’나는 모든 조건을 다 마다하고 동원증권 행을 택했다. 뭣보다 좋은 상사 밑에서 일하고 싶었던 욕심에서였다. 그가 선택한 ‘사수’는 당시 증권사 최고스타였던 이승배 동원증권 상무.
동원증권 입사를 결심한 박 회장은 무조건 이 상무 집무실로 쳐들어갔다. 첫날은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둘째 날 겨우 이 상무를 만난 박 회장은 대뜸 그에게 자신을 써달라고 했다. 이 상무로선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들어볼 가치도 없었다. 그대로 내쫓아 버렸다. 그러나 박 회장의 집념을 꺾을 수 없었다. 다음날이고 그 다음날이고 계속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상무는 그를 채용하기로 결심했다.
1986년 동양증권 영업부 신입사원으로 들어간 박 회장은 45일 만에 대리로 특진하는 특유의 실력을 발휘했다. 또 코스피지수가 처음 1000선을 넘어선 뒤 곧바로 바닥을 쳐 지점근무를 꺼리던 1989년엔 박 회장 스스로 지점장을 자원하기도 했다. 노무라증권의 ‘퀵 영(Quick Young) 전략’을 벤치마킹한 그는 영업진용을 30세 전후의 패기 넘치는 젊은 인재들로 다시 짰다. 직원 수도 50명에서 25명으로 대폭 줄였다. 결국 박 회장 전략은 맞아떨어졌고, 동원증권 중앙지점은 마침내 1조4000억원이란 어마어마한 주식 약정을 맺으면서 전국 1위 지점으로 우뚝 섰다.
이른바 ‘박현주 신화’의 시작이었다. 이듬해 압구정지점장이 돼선 2년 연속 전국 증권사지점 중 약정고 1위란 전무후무한 기록도 세웠다. 1995년엔 최연소로 서울 강남본부장 겸 이사로 발탁됐다.
증권사 ‘마이다스 손’으로 절정의 명성을 날리던 1997년 6월, 박 회장은 돌연 구재상 압구정지점장, 최현만 서초지점장 등 8명의 ‘박현주 사단’과 함께 사표를 냈다. 미래에셋캐피탈 창업을 위해서였다. 교보생명, 한남투신 등에 흩어져 있던 이전 동료·부하직원들도 속속 합류했다.
동원증권에서의 마지막 몇 해 동안 박 회장 연봉은 1억5000만원을 웃돌았다. 매년 받는 인센티브도 3억~5억원 수준이었다. 이런 안정된 급여에도 그가 선뜻 사표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 벤처사업이 뜰 것이란 확신에서였다.
이에 박 회장은 1997년 7월 자본금 100억원 규모의 미래에셋캐피탈과 그해 8월 10억원 규모의 미래에셋투자자문을 세웠다.
그로부터 불과 몇 달 뒤 박 회장의 예상은 딱 들어맞았다. 1998년 나스닥이 떴고 이듬해 코스닥이 사상 최대 활황을 보였다.
‘박현주 펀드 1호’ 대박
창업 얼마 후 IMF위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미래에셋은 오히려 돈을 벌었다. 증시폭락과 금리인상, 채권가격 급등 등을 예상한 덕분이었다. 1998년 초 시중금리가 연 30%를 향해 치달았을 때 미래에셋은 운용자금 200억원을 채권에 풀 배팅했다. 경제구조상 금리가 더 오르기는 어려울 것이란 박 회장 판단에서였다. 그의 예상대로 시중금리는 20%대로 떨어졌고 덕분에 미래에셋은 50억원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이 돈을 바탕으로 그는 1998년 12월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세웠다. 같은 해 9월 증권투자회사법이 만들어지면서 국내에도 간접주식투자 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이는 ‘박현주펀드 1호’가 탄생하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500억원 규모로 출범한 ‘박현주 1호’는 발매 2시간 30분만에 마감됐다. 대성공이었다.
그의 성공신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99년엔 24억원을 투자한 다음커뮤니케이션 주가가 크게 뛰면서 1000억원에 가까운 매매차익을 챙기기도 했다. 수익률이 너무 엄청나 일각에선 “다음이 뜰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차기 경제대통령 후보설이 나도는 것도 그의 이 같은 지난날 족적과도 그 흐름을 같이 한다.
박지영 pjy0925@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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