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우리말 편지’ 쓰는 성제훈 농학박사
날마다‘우리말 편지’ 쓰는 성제훈 농학박사
  • 김종훈 
  • 입력 2007-11-02 15:43
  • 승인 2007.11.02 15: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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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만큼 우리말 사랑하는 훈남

“다비하면 도복한다”가 무슨 말일까? “거름을 많이 주면 작물이 쓰러진다.”는 말이다. ‘다비’ 즉, 거름을 많이 주면, ‘도복’ 즉 작물이 쓰러진다는 한자말. 이 용어를 농민 중 몇 명이나 이해할까? 성제훈 박사는 하루에도 수차례 용어 관련 전화로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기 힘들단다. “방송이나 신문에서 ‘~가 비리에 연루됐다’는 말을 자주 쓰는데 연루의 순 우리말은 뭘까?” 그의 질문과 답변은 계속됐다. “연루는 일본어 렌루이(連累:れんゐい)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국립국어원에서는 ‘관련’으로 쓰도록 권장하고 있지요. 하지만 굳이 한자말 ‘관련’을 쓸 필요가 있을까요. 못된 일이나 범죄에 관계하다는 뜻의 ‘버물다’라는 순 우리말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비리에 연루된 기업인’이 아니라 ‘비리에 버물린 기업인’이라고 하는 언론사가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는 숨겨진 우리말을 찾아내고 전파하는 한글학자일까? 아니다.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그저 농촌에서 태어나 자랐고,
농과대학을 나와 농업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농학이 좋아 교사생활을 접고 1998년 전남대 농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후 시험을 거쳐 농촌진흥청의 연구원이 됐다.

우리나라의 농업발전을 위해 연구에 몰두해온 농촌진흥청 연구원인 성 박사는 지난 5년 동안 국내외 3000여명에게 매일 자신의 이메일로 ‘우리말 편지’를 보내고 있다. 지난 9일(한글날)에는 한글학회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우리말 지킴이’로 공인받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우리말 책 펴내,
인세 전액 사회기부


지난 22일 그가 근무하는 경기도 수원의 농촌진흥청 뒤뜰에서 만났다. 농촌진흥청 주변은 넓은 벌판 저수지 등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기자가 주변 경치가 좋다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 설명을 한다.

“정조대왕이 아버지인 사도세자 묘(융릉)에 가려면 당시 길이 꼬불꼬불했던 터라 좀 편하게 가려고 국도 1호선을 만들었지요. 또 아버지 묘를 지킬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화성을 짓고 저수지까지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때가 되면 융릉에 가서 밤과 대추, 배 등을 공손하게 올렸는데 지금의 수원시 율전(밤)·조원(대추)·이목(배나무) 등 3개동이 바로 이런 연유에서 유래됐습니다.”

우리말 지킴이답게 우리역사에도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농촌진흥청에서 어떤 일을 할까. 연구개발국 연구관리과에 근무하며 원예연구소, 농업대학 등 8개 연구소 연구원들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획을 하고 기반여건을 조성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첨단농법 연구에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이다.

농학자인 그가 우리말 지킴이가 된 계기가 궁금했다. 어떤 계기로 한글 공부를 시작하게 됐는지 묻자 “농학자는 농민들의 농사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실제로 농학 책을 보면 대부분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많아 정말 내가 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많았어요. 그래서 좀 더 농민들이 이해하기 쉽게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죠.”라고 말했다.

어느 농부가 전화를 걸어와 “당신이 쓴 글 중 ‘다비(多肥)하면 도복(倒伏)한다’는 말이 어떤 뜻이냐”라고 물었다. 성 박사는 “벼가 비료를 많이 주면 잘 쓰러진다는 뜻이다.”고 답변했다. 답변을 들은 농부는 “쉽게 쓰면 될 것을”하면서 전화를 끊었단다.

이후 제대로 된 한글로 농민에게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에 우리말 관련책자 20여권을 사서 공부를 시작했다. 우리말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그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틈틈이 재미있는 우리말을 전해주었다.

그렇게 아름아름 소개하다 보니 이메일을 신청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나중엔 ‘우리말 편지’라는 형식의 이메일을 전국 각지로 보내게 됐다.

감사의 편지도 자주 받는다는 그는 “지난 18일 국정감사를 받으러 국회에 갔었는데 질의 도중 한나라당 이계진 의원이 갑자기 성 박사도 이 자리에 참석했느냐고 묻더니 국감현장에서 우리말을 알리는데 앞장서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말 한마
디지만 이럴 때 보람을 느낍니다.”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는 해외에 나가있는 주재원 중 한 아주머니가 편지를 보내와 “아이들이 외국인 학교에 다니다 보면 한글을 잊어버리기 쉬운데 아이가 성 박사 때문에 한글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감사 편지를 받았을 때 뭉클한 무언가가 느껴졌다고 한다.

그가 우리말 편지를 쓰는 시간은 매일 오전 8시30분. 그는 매일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수시로 우리말 관련 책들을 본다.

책상에도 본연의 업무를 소홀히 한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우리말 관련 책들을 모두 반대로 뒤집어 꽂아 놓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복습을 시키는 치밀함도 있지 않는다. 3~4년 전에 보낸 편지도 다시 보내서 퀴즈를 내고 맞힌 사람에게는 농민
들이 직접 생산한 고구마 등을 사비로 사들여 원산지 등을 표시 선물한다는 것.

지난해에는 한 출판사의 제안으로 그동안 보낸 편지를 묶어 ‘성제훈의 우리말 편지 1,2’라는 두 권의 책을 펴냈다.


국정감사장에서도 칭찬 받아

성 박사는 “출판사가 제안을 해서 수익금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전액 기부하라고 했습니다.”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식과 성품을 두루 갖춘 학자중의 학자이다. “얼마 전 편지를 한통 받았는데 편지 내용 중 잘못된 표현을 바로 잡아주시던 걸요.

저는 이럴 때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잘못도 감추지 않는다. 그는 또 TV자막을 보면 틀린 표현에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한다. ‘비포장도로’라는 표현이 있는데 ‘흙길’이라고 바꾸면 더 아름답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또한 ‘코스모스’의 순 우리말로 ‘살살이’이가 있다면서, 가을에 살살이꽃이 활짝 피었다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성 박사는 전라남도 해남 출신. 전남대에서 농기계학을 전공하고 1998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오이 생육장애의 비파괴 진단법 개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슬하에 1남1녀.

김종훈  fun@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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