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에서 각각 과기부 장관을 지낸 정근모 명지대 총장은 한국 과학계의 산증인이자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고등과학원과 카이스트의 산파이기도 한 정 총장은 어릴 때부터 ‘수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한 그는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23살의 젊은 나이에 박사가 됐다. 미국에서 20년간 생활하며 승승장구했지만 과학자도 ‘국가와 민족’이 우선이라는 신념아래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대학 교육과 후학양성에 힘썼던 정 총장은 최근 들어 주위에서 정계 입문을 자주 권유받고 있다. 현재는 이와 관련, 기도하며(그는 기독교 장로다)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지난 9일 오전 명지대 총장실에서 정 총장을 만났다.
경기중·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한 수재. 고등학교를 4개월만 다니고 서울대학교 차석 입학. 스물 네 살 때 미국 플로리다대학교 조교수 역임.
정근모 명지대 총장의 과거 경력은 그 시작부터 확실히 예사롭지 않다. 그는 이에 대해 “공부를 잘 했다기 보다는 그저 시험을 잘 보는 능력은 있었던 것 같다”며 겸손해했다. 그는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에서 각각 과기부 장관을 지냈고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 사장, 한국과학원(KAIST) 부원장 등 화려한 공직 경험을 자랑한다.
교회 장로인 그는 사회봉사활동도 적극적으로 해 왔다. 한국 사랑의집짓기운동(해비타트) 이사장인 그는 지난 11년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1100세대의 집을 지었다.
최근 정 총장에게 대선 출마를 권유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 동안 공직을 수없이 거쳤지만 단 한 번도 당적을 가지지 않을 정도로 선을 그었던 그에게
새로운 결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현재 기도 중에 있으며 응답이 나오면 순종할 것”이라며 “우리 나라에도 지도자는 하늘이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경선에는 안 나갈 것”이라면서 “국가와 민족이 필요하다고 해 징집한다면 그건 고려해 볼지도 모르겠다”고 여운을 남겼다.
다음은 정 총장과의 일문 일답.
- 방학 기간이다. 최근 근황은.
▲ 학교 시설 보수도 하고 연구와 관련된 일도 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다.
- 미국통이라는 말이 있던데.
▲ 미국에서 20년을 살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미국 국가조찬기도회 멤버들과 친분이 깊다. 거기에는 적지 않은 국회 지도자와 행정부 지도자들이 나온다.
- 교회 장로로서 아프간 피랍 사건에 대한 입장은.
▲ 미국의 정책이 테러리스트들과의 전쟁이기 때문에 바뀌기는 힘들 것이다.
미국과 동등한 주권 국가로서 우리 정부가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특사를 파견하고 파키스탄과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단지 거기 간 사람들은 인류애로써 간 것이기 때문에 훌륭한 분들이다. 결코 칭찬을 받기 위해서나 공적 때문에 간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 남북정상회담이 조만간 있을 예정이다. 개최 시기가 적절하다고 보나.
▲ 남북은 장기적으로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협력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가 한국 사랑의집짓기운동(해비타트) 이사장인데 북한 동포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고 싶다. 우리 남쪽에서도 올해만 5곳에서 56세대를 짓고 있다. 과거 6·15 남북정상회담 때 당시 명예이사장이었던 이희호 여사를 통해 이런 의사를 북에 전달했다.
이후 금강산에서 회의를 갖기도 했는데 북측의 요구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우리 시스템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다.
- 남북간 정상 대화는 해야 한다고 보나. 지금 시점에서 비판도 없지 않은데.
▲ 반드시 해야 한다.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 얘기하는데 그건 각 당마다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정치도 중요하지만 우선 순위는 국가와 민족이다. 어느 정당이든 나라를 위해 생각해야 한다. 저처럼 교육과 사회봉사, 과학을 하는 사람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남북 관계에 대해 ‘퍼주기’라고 매도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과거 정부에서 일부 잘못된 것은 있을 수 있다. 현금 제공은 사실일지 모르겠지만 이런 건 조심해야 하고 나도 반대 입장이다. 요즘 한나라당도 남북문제에 대해 정책을 바꿨다. 인도주의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 ‘남북문제’와 관련, 특별한 구상이 있다면.
▲ 북한에서 고생하고 있는 동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우리 남한의 동포들이 북한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무감각한 것은 용납하기 힘들 정도다.
북한 정권과 동포들은 다르다. 북한 동포들에 대해선 최선을 다해 인도적으로 도와줘야 한다. 그러나 도와줄 때 혹시 정권 차원의 이해관계 때문에 이용당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현금을 주게 되면 무기나 핵개발에 쓸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 정계 입문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 우리나라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인식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정치도 중요하다. 정치인들만의 정치는 버려야 할 것이다.
대선 출마와 관련 질문을 받고 있는데 지금은 기도 중이다.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할 때에는 항상 기도를 한다. 응답이 확실히 나오면 순종할 것이다.
- 만약 민심이 원하면 출마할 수도 있나.
▲그 동안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았다. 워낙 복잡한 일 아닌가. 시간이 흘러 내가 꼭 해야 된다는 민심이 된다면 몰라도….
- 범여권 경선에 참여할 생각은.
▲그 쪽은 이미 20여명이나 된다. 그리고 경선에는 안 나간다. 추대라는 단어 또한 너무 무겁다. 징집이면 몰라도. 국가와 민족이 필요하다고 해서 징집한다면 그건 고려해 볼 수 있다.
- 과기부 장관을 두 번이나 지냈다.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 때 했다. 과학재단 이사장은 노태우 대통령 때와 김대중 대통령 때 지냈다.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 때 대사직을 맡기도 했다. 한국전력주식회사 사장도 역임했다.
- 교육 개혁에 대한 생각은.
▲오늘 시대는 지식기반 사회다. 산업혁명시대의 교육에 근거한 우리 교육은 아직도 구태의연하다고 본다. 지식기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뇌’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 보면 시험만 끝나면 공부한 것 다 잊어먹더라.
지식은 넘쳐 흐르는데 넘쳐 흐르는 지식 때문에 지혜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그리고 많은 지식을 취사선택하는 지혜도 부족하다.
무엇보다 세계화된 교육이 필요하다. 우리 젊은이들이 전 세계에 떳떳이 나가 살 수 있는 그런 교육이 필요하다. 이런 것과 관련, 노무현 정부가 하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그 동안의 답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답답하다.
- 교육 문제와 관련, 자신만의 복안이 있다면.
▲명지대학교에 와서 기초대학을 만들었다. 인생과 삶에 대한 기본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두 번째는 학교를 국제화, 세계화시켜야 한다는 목적 아래 국제대학원을 만들었다. 자기 분야에만 고립돼선 안 된다. 21세기는 합성과 융합의 시대다.
- 참여정부의 과학 정책을 평가해 달라.
▲노무현 대통령이 과학에 대해서는 굉장히 강조했다. 중요성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런 대통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 정책은 너무나 미래지향적이지 못했다. 참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본다.
- 우리나라 과학기술 수준은 어느정도 인가.
▲여러 분야에서 넘버원이다. 조선 기술과 생명 과학 같은 분야는 세계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체가 고른 것은 아니지만 산업 기술 쪽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 반면 기초와 원천기술이 약하다.
미래는 상당히 희망적이라고 예상한다. 사실 우리 과학기술계가 지난 40년을 이끌어 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과학자라고 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을 많이 했다.
지금도 젊고 훌륭한 과학자가 많이 나오고 있다. 어느 정부가 나오든 이 귀한 자원을 잘 길러야만 한다.
- 이명박 전시장의 ‘대운하 구상’에 대한 생각은.
▲운하 전문가는 아니지만 지식기반사회에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우리나라가 내륙 국가면 또 모르겠다. 이미 수로는 다 돼 있다고 본다. 거기에 투자할 돈이 있다면 지식혁명을 일으키는 데 투자해야 할 것이다.
제대로 된 교육시스템, 지식 경제, 새로운 첨단 분야 개척, 과학기술 중시 등이 더 시급하다. 운하 문제는 전문가들에게 다시 한 번 검토를 맡겨야 할 것이다.
#정근모 총장이 걸어온 길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 미시건주립대 이학박사, 프린스턴대학교 핵융합연구소 연구원, MIT공대 핵공학과 연구원, 한국과학원
(KAIST) 부원장,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 사장, 과학기술처 장관(12대, 15대),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호서대학교 총장
<현재>
한국사랑의집짓기운동(해비타트) 이사장, 국제해비타트 이사, 민족화합기도 대표, (사)기독학술교육동역회(DEW) 이사장, 미국국가조찬기도회 순회대사, (사)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 회장, 삼성제일교회 원로장로, 미국 국립공학 한림원 회원, 스웨덴 왕립공학 한림원 회원, 세계 원자력 한림원 회원,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라이즈업코리아운동협의회 회장, 명지대 총장
김승현 okkdoll@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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