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한화갑 민주당 전대표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의 표정은 예전보다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때 아닌 눈발이 날리던 지난 8일, 붉은 스웨터 차림으로 기자를 맞은 한 전대표는 월출산, 지리산, 아차산, 계룡산 등 주말마다 산행에 나선다며 최근의 근황을 소개했다.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그의 열정어린 목소리는 되살아났다. 범여권 통합신당 논의, 동교동계의 부활, 남북정상회담 가능성 등 주요 화두에 대해 한 전대표는 맘껏 속내를 털어놨다.
특히 그는 통합신당의 성공을 위해선 사적인 감정을 모두 묻어버리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 정동영 전의장, 천정배 의원 등 분당 주도세력과도 머리를 맞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면, 동교동계의 부활에 대해선 “언론이 그렇게들 표현하지만 동교동계의 정치력은 사실상 제로”라며 “남은 것은 김대중 전대통령의 경륜 섞인 충고일 뿐”이라고 확대 해석을 일축했다.
몸은 멀어졌지만 마음과 고민은 여전히 정치권에 머물고 있었다.
한 때 리틀 DJ로 불렸던 한화갑 전대표는 주요 정치화두에 대해 작심한 듯 거침없는 답변을 쏟아냈다. 그는 범여권 통합신당 논의와 관련 “민주당을 빼고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면서 “큰 줄기를 위해선 과거 분당 주도 세력과도 손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과의 정통성만 이어질 수 있다면 당 해체도 가능하다는 게 그의 말. 한 전대표는 또 “통합 성사 후 정권을 잡으면 좋지만 못 잡아도 다음에 요구하면 된다”면서 좀 더 먼 길을 보고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한 전대표와의 일문일답.
- 최근 근황은.
▲주중에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신문을 보고, 명상도 한다. 주말에는 산행에 자주 나선다.
- 동서협력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데.
▲일종의 교양강좌를 매주 목요일마다 하고 있다. 미국 국회의원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어 폭넓은 교류를 하자는 취지에서 2003년 설립했다.
- 민주당이 단일지도체제 유지를 결정했다. ‘집단체제’ 주장도 만만치 않았는데.
▲어느 조직이든 찬반이 있기 마련이다. 다만 해소하는 방식이 민주적이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어느 분이 대표가 돼도 대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헤쳐나가리라 본다.
- 노무현 대통령이 탈당한 뒤, 통합신당 논의가 한창이다.
▲민주당이 지금 통합기구를 만들어 거기서 다루고 있다. 이젠 관여를 안하니까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대표로 있을 때 구상한 것은 노 대통령의 탈당을 전제로 했다. 노 대통령이 탈당하게 되면 속된 말로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당이 아니다. 그래야 민주당하고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장이 생길 수 있었다. 두 당이 통합을 하든지 양당이 다 해체하고 신당을 창당하든지 자유롭게 결정할 문제다.
- 이제는 열린우리당과 통합논의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물론이다. 노 대통령이 탈당을 하지 않으니까 열린우리당에서 탈당하는 사람들하고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교섭단체를 구성하자는 게 예전 구상이었다. 민주당 의원들이 민주당 당적을 가지고 교섭단체에 가 창당 준비를 하고, 준비가 끝나면 민주당을 해체하면 되는 것이었다. 단 거기에는 민주당의 정통성과 역사성, 정체성을 그대로 이어가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열린우리당 탈당파와의 합의 또한 가능하다. 이것은 역대 야당의 정통성과 호남이라는 확실한 지지 기반이 있는 민주당만 가능한 일이다. 한나라당을 제외한 어떤 정당도 민주당의 자산을 공유하지 않으면 국민들에게 정통성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민주당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 또 다른 선택 가능성은.
▲다수인 원외가 이 방안을 합의해 주지 않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아예 통합을 포기해 민주당 홀로서기를 추진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국회의원들만 빠져나와 신당에 참여하는 방법이다.
원내 합의로 신당에 참여하든지, 민주당을 그대로 지키든지, 아니면 원내가 나와 신당에 합류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 정동영 전의장, 천정배 의원 등 ‘분당주도세력’들과도 함께 할 수 있나.
▲과거에는 분당에 직간접으로 책임있는 사람들하고는 통합 논의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까 이건 화해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면 안된다 싶어서 이제는 누구든지 좋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달라진 상황이 있다. 분당 주도 세력들이 이제는 실패했다고 자인하고 있다. 그 사람들은 다음 선거(총선) 때 국민이 평가해 줄 것이다.
- 통합신당 과정에서 노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은.
▲민주당의 자산 중에는 노 대통령 당선을 통한 정권재창출도 포함된다. 과거 분당같은 우여곡절이 있다 하더라도 통합이 된다면 같이 협력해야 할 대상은 현정부다.
- 의원직을 잃어 섭섭하지 않은가.
▲큰 흐름 속에서 개인적인 문제 가지고 왈가왈부하면 오히려 내가 더 작아 보인다.
- 김한길 의원 등 열린우리당 탈당파는 별 지지를 못 받고 있다.
▲민주당에서 분당해 실패했는데 또 실패를 자인하고 전철을 밟으니 지지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한번 단추를 잘못 끼니 계속 그런 것이다. 방법이 잘못됐다.
- 민주당 입장에서 연말 대선의 의미를 꼽는다면.
▲정당의 원래 목적은 정권을 잡는 것이다. 이번에 통합을 하는 건 정권을 다시 잡기 위해 통합하는 이유가 당연히 있다. 하지만 정권을 못 잡아도 국민들에게 인정받고 당세가 확장되면 그 다음에 정권을 노리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정권을 못 잡으면 우리는 죽는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정권을 잡으면 좋고 못 잡으면 이 다음 기회에 달라고 국민에게 요구하면 된다. 과거에는 정권을 한 번 놓치면 죽는다고 생각했다. 권력이 또 다른 권력을 만들어 냈고 국민이 정권을 결정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들 수준이 정치보다 높다.
- 현재는 한나라당이 월등히 앞서간다.
▲지금처럼 가면 대통령 선거를 할 필요가 없다. 한나라당 지명대회가 대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다. 통합이 되면 후보들이 전부 나와 경쟁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후보를 결정하면 된다. 그렇게 한나라당과 대결하면 가능하다고 본다. 현직 대통령과 경쟁하는 게 아니라 달라진 후보와 경쟁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 한나라당에서 ‘검증론’이 한창인데.
▲흠결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다 약점이 있다. 모든 정치적 경쟁이 선의의 경쟁을 말하지만 누구든지 상대방 약점을 찾는 일부터 먼저 시작한다. 때문에 검증은 피할 길이 없다. 우리 역대 지도자들도 다 그런 과정을 거쳤다.
- 손학규 전지사의 범여권 합류 가능성은.
▲오고 가는 것은 국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못 받을 것이다. 손 전지사가 그런 사정을 잘 알 것이다. 이인제 효과도 있지 않나. 당선되는 것이 중요하지 떨어지고 몇 등 했다는 건 중요한 게 아니다.
- 오는 4월 과거 지역구에서 김대중 전대통령의 아들인 김홍업씨의 무소속 출마설이 나오고 있다.
▲당의 입장이나 저나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김홍업씨가 무소속으로 나가면 공천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다. 공천을 하자니 김 전대통령에 대한 한국적인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고 공천을 안 하자니 텃밭에서 스스로 정당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김씨가 민주당 공천을 받아서 나가는 것이지만 민주당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무소속 출마를 결정했다고 들었다. 김씨가 결정할 일이지만 거기에 상응해 민주당이 대처할 것이다. 나로서는 인간의 도리를 해야 한다고 마음을 굳히고 있다. 반대에 나설 수는 없는 일이다.
- 4월 재보선에서의 연합공천이 이야기되고 있다. 국민중심당의 심대평 대표는 이를 반대했는데.
▲통합이 되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고 연합공천하고 싶으면 후보 안 내면 된다. 심 대표가 나한테 전화해 민주당이 후보 안 내주길 바란다고 했다. 그럴 것이라고 하니 고맙다고 하더라.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연합공천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 정치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 이해찬 전총리가 북한을 방문했다.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은.
▲북핵문제가 해결되면 충분히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필요한 일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한나라당이 이에 대해 반발하고 있는데 과거 한나라당이 집권할 때 북한 문제를 얼마나 선거 때마다 이용했나. 한나라당은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다.
남북문제 해결을 위해 갔다면 오히려 찬성해야 맞는 것이다. 한나라당한테 불리하니까 반대한다고 하면 이건 당리당략이다. 한나라당이 정말 집권할 생각이 있다면 ‘그래 해라, 한나라당 같으면 이런 걸 북에서 가져올 수 있다. 너희도 가져오라’고 주장해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당이든 유리한 국면을 조성해 선거에 써먹으려고 한다. 그걸 포기할 사람이 어디 있나.
- 2000년처럼 오히려 선거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그 때는 북한에서 먼저 발표를 제안했다고 들었다. 정부가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
- 최근 ‘동교동계 부활’이 이야기되고 있다.
▲언론에서 그렇게 말들을 하는데 사실상 동교동의 정치력이라고 한다면 김대중 전대통령의 경륜 섞인 충고 빼고는 없다. 지금 현역 정치인 중 동교동 직계가 누가 있나. 나도 이렇게 돼 버리니 이젠 종자도 없어졌다. 동교동 1세대 중 권노갑 김옥두를 비롯, 대통령 아들까지 다 국회에 없다. 여기서 동교동이 무슨 정치를 도모하겠나. 동교동의 정치력은 지금 제로 상태다. 박지원 전비서실장도 복권이 안 됐기 때문에 정치활동은 할 수 없다.
- 고건 전총리가 불출마를 선언하며 중도 낙마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끝까지 갈 것인가 하는 생각을 중간에 많이 했었다. 지금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딱 감이 오는데 정말 그렇게 가더라. 그래서 ‘밥상론’도 얘기했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될지도 모른다”고도 했었다.
- 노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개헌이 꼭 되리라는 확신은 서지 않는다. 한나라당이 반대하기 때문에 국회 통과가 어려울 듯 싶다. 노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2007년 개헌 스케줄’을 언급했는데 그 때 너무 늦는다고 생각했다. 2005년에 개헌을 해야 하고 안 되면 국회에 연구기구라도 두자고 했는데 언론에 보도가 잘 안 되더라. 그래도 개헌은 국민들 생각이 중요하기 때문에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 앞으로의 정치 진로에 대한 고민은.
그 문제는 사면 복권 돼야 가능한 문제다. 아직까지 현실 정치에 대해 뛰어드는 것은 어렵다. 민주당은 잘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김승현 okkdoll@dailysun.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