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첫번째 유엔 사무총장 지구촌 평화 해결사로 나서다
한민족 첫번째 유엔 사무총장 지구촌 평화 해결사로 나서다
  • 김현 
  • 입력 2006-10-20 14:56
  • 승인 2006.10.20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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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UN사무총장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지난 9일 한반도 역사상 유례없는 유엔 사무총장 자리에 올랐다. 쾌거다. ‘태극’브랜드 가치를 드높인 일종의 국가적 대경사인 셈이다. 그러나 이를 ‘외교승리’로 장담하기에는 이르다는 평가다. 반 장관이 맡아 할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역할은 이제부터가 시작이기 때문이다. 분단국가의 현실적 난제를 등에 업고 가야하는 심적 부담감은 말할 것도 없다. 반 장관의 해결 과제는 첩첩산중이다. 첫 출발선에서 주어진 우선 과제는 북핵문제 ‘해법 찾기’다. 더구나 5대 상임이사국의 원만한 조절 역할과 유엔의 재정난 해결 등도 그의 몫이다. 무엇보다 반 장관은 국제사회 갈등을 조정하는 ‘파수꾼’으로 나서야한다. 반 장관은 과연 어떤 인물이고, 향후 사무총장으로서 요구되는 역할론은 무엇인지 알아봤다.

‘국제무대’ 외교수장 발휘 기대

유엔 사무총장 단독후보로 지명되던 지난 9일 밤 11시 10분경. 반 장관은 기뻐했다. 지난 1961년 미얀마의 우탄트 사무총장 이후 두 번째 아시아출신 유엔사무총장으로 기록되는 날이어서 더욱 그랬다. 그러나 심적 부담은 커보였다. 반 장관은 이날 기자회견 내내 승리를 자축하는 모습보다는 오히려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아른거렸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바로 그날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해 한반도가 패닉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불안한 출발이었다. 탁월한 외교능력의 소유자라는 평판도 이 순간만큼은 잠잠했다. 이날 북한의 핵실험 강행은 ‘외교승리자’라는 그의 타이틀에 재를 뿌린 격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핵문제해결은 그에게 최우선 과제임과 동시에 첫 시험대나 다름없게 된 셈이다. 물론 당장 해결할 수 있는 현안은 아니다. 북핵문제는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 등의 평화안정에만 국한된 이슈거리는 아니라는 얘기다. 반 장관이 유엔본부 수장(首長)이 된 이상, 거시적인 안목을 갖고 해결해야할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기대치는 높다. ‘우물 안 외교수장’이라는 타성을 벗고, ‘국제무대’에서 점프력을 발휘해 사고전환적인 외교능력을 보여 줄 것을 사람들은 기대한다.
이에 대해 국방외교통인 한나라당 송영선의원은 가장 시급한 과제로 장기적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꼽았다. 송 의원은 “전 세계의 외교수장이 되는 만큼 중·일 관계와 소원해진 한·미 관계를 되돌리는 외교력을 국민들은 기대할 것”이라며 국내적인 외교와도 불가분의 관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송의원의 이같은 주문은 북핵문제를 둘러싼 국제화 시도가 미국의 네오콘(신 보수주의자)의 사정거리 안에 들면서 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탈레반’ 논쟁에 한국이 스스로 휘말려들었다는 판단 때문으로 풀이된다.

서울 단칸방서 뉴욕 사무총장 공관으로
그가 유엔 사무총장으로 지명되기까지 36년간의 외교관 경험은 그의 궤적에서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반 장관은 지난 2월 유엔 사무총장 출사표를 던진 뒤로 약 7개월간 그만의 ‘반기문식(式)’ 인맥관계 노하우를 선보였다. 일각에서는 ‘설명회’(IR)를 그의 숨겨진 선거전략 으로 평가한다. 그만의 풍부한 전략 노하우와 억제된 추진력 등은 유엔의 수장이 되는 데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이제 ‘21세기 신(新) 브랜드’ 국가가치를 드높일 일만 남은 셈이다.

어린시절, ‘영어신동’으로 유명
반 장관은 어릴 적부터 ‘영어신동’으로 통할 만큼 외국어 구사능력이 남달랐다. 그는 적십자사와도 인연이 깊다. 충북 음성에서 출생한 그는 1962년 충주고 3학년 시절, 미국 정부가 주최한 영어웅변대회에 출전해 입상하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는 이 때 인생에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계기를 부여받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평생의 동반자’(소울 메이트)와 그의 ‘비전’이었다. 인연의 배필이 된 지금의 부인 유순택 여사를 처음 만난 것도 바로 이 시절이기 때문이다. 반 장관은 당시 충주여고 학생회장이던 유 여사와 충주고와 충주여고 학생단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첫 대면했다. 그 뒤 영어 웅변대회 입상으로 미국 방문 길에 오르던 환송식에서 유 여사는 충주여고 대표로 반 장관에게 꽃다발과 복주머니를 만들어 안겨준 것이다. 그가 외교관의 꿈을 키운 것도 미국 적십자사 주선으로 이 때 워싱턴에서 존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면서부터다.

인생의 자양분은 모친(母親)
그러나 반 장관의 인생에 후덕한 자양분을 공급해 준 인물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그의 어머니인 신현준(85)씨다. 신씨는 늘상 “타인과 다투지 말고 덕을 베풀고 살라”는 교육 방식을 고수하며 아들을 챙겼던 것이다. 반 장관이 ‘적(敵)이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겸손한 태도와 주변인과도 폭넓은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도 다 반 장관 어머니의 교육에서 기인했다는 얘기다.
1970년 제3회 외무고시에 합격한 반 장관은 그 이듬해인 1971년 유 여사와 결혼해 월세 10만원의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의 지론은 간단하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외교관으로 36년 동안 살아오면서 그는 줄곧 선두를 달렸다. 그러나 결코 타인의 가슴에 상처주지 않는 언행을 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더구나 부드러운 인상이다. 2004년 외교부 장관에 올라 북핵문제, 주한미군 감축 문제, 이라크 파병 문제 등 국제적인 이슈가 보도될 때마다 누구보다 바빴던 인물이다. 그는 이 때 장관답지 않은 그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학자적 외모가 대중들에게 약점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특별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던 셈이다. 샤프하면서 냉철한 인상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그는 외모와는 달리 대중들에게 탁월한 외교술을 선보였다. 반 장관이 대중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평소 지인들의 애경사를 꼼꼼히 챙기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작 지난해 반 장관의 장녀 결혼식에는 몇몇 지인들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외교부 직원도 결혼 사실을 몰랐을 정도다. 당시 예식장 입구에는 ‘부조를 정중히 사양합니다’란 문구까지 붙이고 부조금도 받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김선일 피살 사건’으로 한 때 대인기피증
보수와 진보 양쪽을 저버리지 않는 균형 잡힌 그의 업무 능력과 철저한 일처리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3대 정권으로까지 이어지는 ‘롱런’의 발판이 됐다.
하지만 그에게도 고비는 있었다. 2004년 6월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해 살해된 ‘김선일씨 피살 사건’을 계기로 그에게 쏟아진 비난의 화살은 대인 기피증으로까지 몰고 가게 했다. 이 때 국내 주요언론들은 취약한 외교 인프라와 외교협상 부재 등의 비판을 가하며 ‘장관 책임론’을 들고 나왔다. 정치권과 진보단체에서는 반 장관의 외교협상은 “미국의 부시형 공개 경고와도 닮았다”며 ‘친미적 외교장관’이라는 공격적 비난이 잇따랐다.
반 장관은 당시 이라크 무장단체들에 피랍된 김선일씨를 구하기 위해 알자지라 TV동경 특파원을 자신의 사무실에 불러 영어로 협상했다. 그러나 결국 김선일씨가 피살되자 모든 책임은 반 장관의 몫이 됐다. 무엇보다 비슷한 시기에 피랍된 일본인은 무사히 석방돼 당시 일본의 협상채널(민간구호 활동과 종교적 접근 등)과도 비교됐다.
반 장관은 이로 인해 한동안 사람과의 만남을 꺼려했다. 그는 당시 “너무 매도당해 사람 만나기가 무섭다”며 “최근 일련의 사태로 대인기피증이 생겨 사람을 만나지 않고 있다”고 말할 만큼 심적 고생이 심했던 것이다.

진보세력, 친미(親美)파로 낙인
그는 2006년 1월 미국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공동성명을 통해 한·미간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해 친미파로 각인됐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이와 관련, “3년간 줄다리기를 해온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둘러싼 한·미간의 합의는 결국 미국의 승리이고, 반 장관을 승자의 반열에 세웠다”고 비판했다. 반면 “패자는 판을 잘못 읽는 노무현 대통령과 새로운 전쟁위험에 내몰리게 된 대한민국 국민들”이라고도 했다.
이대훈 참여연대 협동처장은 반 장관에게 ‘신(新)외교’ 정책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 처장의 주문은 반 장관이 그동안 ‘균형적 실용주의’ 외교정책 노선을 펼쳤다는 평가에 대한 반발심이었다. 특히 진보세력들은 이라크 파병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윤리와 실리간의 균형이 가장 중요하다”며 “민의를 우위에 둔 신외교 노선을 표방해 달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 장관은 노 대통령이 바라는 자주적 외교와 관련국과의 긴밀한 협조 유지 등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외교 정책을 꾸준히 주장해왔다.
그의 외교노선은 청와대와의 관계 설정에서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반 장관은 “외교부의 역량이 미치지 못할 때 대통령이 명쾌한 지침으로 앞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노대통령과 철저히 ‘코드’를 맞추면서 보수진영을 서운케 하지 않는 그만의 방법론을 택한 것이다. 결국 청와대가 외교 결정권을 갖고, 외교부가 이를 단순 집행하는 외교노선을 추구한 셈이다.

첫 난관 북핵 해결, 조정자 역할 주목
반 장관을 두고 ‘적(敵)’이 없는 사람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차기 유엔 사무총장으로 세계무대에 오른 이상, 적(敵)없는 그의 길에 난관은 봉착했다. 그 첫 번째 벽은 바로 북핵 문제해결이다. 그의 역량과 축적된 외교술로 험난한 국제사회의 룰을 유지토록 막강한 힘을 발휘해야한다. 특히 이스라엘-팔레스타인-레바논 중동지역의 분쟁 등에도 귀를 기울려야한다. 국가적인 이해관계를 따지는 5대 상임이사국의 관계 조절도 어려운 과제다. 일본 언론이 주장하듯 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부재도 넘어야할 산이다. 벌써부터 해외언론들은 자칫 반 장관이 미국의 위세에 눌릴 것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만년 역사상 한반도에서 첫 탄생한 유엔 사무총장. 그가 과연 지구촌 분쟁 해결사로 평화사절단 대열에 올라설 수 있을지 국제사회의 눈이 그에게 쏠리고 있다.



# 부시, “굿럭(good luck)”…코멘트로 반 장관 지지
미 부시 행정부는 일찌감치 반기문 장관을 지지하고 있었다. 지난달 28일 유엔 사무총장 3차 예비투표를 끝마친 다음에도 부시 행정부는 함구한 상태였지만 이미 승리는 반 장관 쪽에 쏠려있었다. 미국 주요언론들도 반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확정을 기정사실화했다.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3차 예비투표를 마친 이튿날 29일 반 장관을 지지했고, 뉴욕타임즈도 “반장관이 차기 유엔 사무총장에 성큼 다가섰다”고 전했다.
반 장관은 이 때 이미 미국 행정부로부터 동북아전문가로 평가받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반 장관에 대한 부시 대통령과 라이스 국무장관의 지지발언이다.

美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나는 물론이고 부시 대통령이 반기문 장관을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라.” (2005년 11월 경주 한미 정상회담 자리에서)
“(반기문 장관) 축하한다. 지지할 것이다.”(2006년 7월 28일 쿠알라룸푸르 ARF)

조지W 부시 대통령
“반 장관에게 행운을 빈다.” (2006년 9월 15일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 자리에서)
“적절한 사람이다. 잘 지켜보겠다.” (2006년 9월 15일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 오찬 자리에서)
<현>

김현  rogos0119@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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