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 붕괴 대비한 임시정부 추진 막전막후
북한 내부가 심상치 않다. 특히, 최근 탈북한 고위 인사들이 만주 일대에서 임시정부를 추진했다는 사실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만큼 김정일 정권에 대한 내부 반발 속도가 빨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임시정부를 추진했던 인사들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여 있는 김정일 정권의 운명을 비관적으로 내다보고 있는 듯하다. 임정 추진 구성원들은 대부분 북한 노동당 고위 간부, 군 장성 등 북한 내 지도부 출신이다. 이들은 외연 확장을 위해 한국, 러시아 등 일부 세력과 접촉을 시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중요 정보가 유출됐고, 결국 비밀 조직이 와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북 전문가들은 10여명의 주요 인사 중 일부는 러시아로 도주하고 일부는 북한으로 압송됐다고 밝혔다. 물론, 잔여 세력들은 계속해서 임시정부 추진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도 들리고 있다. 이들의 움직임이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는 것은 북한 핵실험 사태의 배경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핵실험 진위여부를 떠나, 북한이 내부를 단속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북한 김정일 정권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올해 초 만주지역 내에 임시정부수립을 추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가운데 내부 이탈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핵실험 발표 배경을 두고 국내에서 설왕설래가 되풀이됨에 따라 그 실마리를 찾는 단초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 11일 학계와 탈북자 단체 등에 따르면, 1960년대를 전후해서 탈북한 군 장성, 당 간부 등 10여명이 지난 연말부터 본격적으로 임시정부수립을 추진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실체는 아직까지 ‘오리무중’이다. 지난 4월 이후 이와 관련된 첩보가 단절된 것으로 미뤄 중도에 실패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러시아 접촉 외연 확장 노려
이들 비밀 조직이 임시정부 수립을 감행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노동당 간부 출신 K씨 등 주도세력들은 국제적으로 고립화되어 가고 있는 김정일 정권 이후를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대량 탈북자 사태 등 유사시 발생할 북한의 급박한 변화를 사전에 대비하려 했던 것이다. 이들의 움직임이 ‘무리수’가 아닌 이유는, 북한 유사시를 대비한 시나리오가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호주머니 속에 항상 들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외교 전문가들은 “중국과 미국의 경우 북한 정권 교체에 대한 원론적인 입장이 비슷하다”고 진단하고 있다.
중국은 최근 들어 인민군을 국경지역에 배치하는 한편, 동북공정을 통해 만주 지역 지배를 공고하게 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왔다. 어찌 보면, 북한과 가까운 중국이 가장 적극적인 대비 태세를 준비해 왔다고도 볼 수 있다.
임시정부 추진 세력들과 관련된 첩보 또한 국내 정보기관과 대북 전문가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로 통할 정도였다.
서강대 김영수 교수는 “지난해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일부 탈북자들이 임시정부수립을 추진했던 것으로 안다”면서 “하지만, 주요 세력들이 와해되면서 중단된 것 같다”고 전했다.
동국대 윤명철 교수도 “김정일 정권에 반대하는 일부 탈북 고위인사들이 만주 일대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다”고 밝혔다.
임시정부 추진 세력들은 지난 한 해 동안 북한 정권과 단절된 상태에서 한국, 러시아 등 주변국 핵심 인사들과 접촉해 외연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당 간부 출신 K씨 등은 은밀하게 입국한 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와 만났다. 하지만, 황 전 비서의 경우 임시정부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북한 소식에 정통한 한 탈북자는 “지난해 말로 기억된다”면서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탈북자 김 모씨가 중재를 서 황장엽 선생님이 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이들은 “북한 내부에 중대 사안이 터질 것을 대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대량 탈북 사태 등에 대책을 세워야 한다”면서 황 전 비서의 동참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황 전 비서는 ‘반대’ 입장을 전달하고 이들을 돌려보냈다.
임시정부 추진 세력의 움직임이 포착되면서 한국, 미국, 중국, 러시아 등이 높은 관심을 갖고 지켜봐 왔던 것으로 소식통들은 전하고 있다.
<일요서울> 취재진은 황 전 비서의 입장을 듣기 위해 인터뷰를 추진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경찰 파견 경호팀장 A씨의 “말씀을 드려 보겠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의례적 답변만을 들었다.
현재로선, 임시정부가 계속해서 추진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주요 조직이 와해되면서 이와 같은 시도는 잠정 중단된 상태라고 보는 시각이 중론이다.
이들이 실패한 주요한 원인으론 러시아가 거론되고 있다. 김 교수는 “임정 추진 세력들이 러시아를 우호세력으로 착각한데 그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일부 대북 전문가들은 임시정부 추진 세력들이 한국과 러시아 등을 접촉하며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10여명의 주요 인사들은 관련 국가에서 정보가 유출되면서 북으로 압송됐거나, 러시아로 탈출하는 상황을 맞고 말았다.
김 교수는 “임시정부수립을 추진했던 세력 중 일부는 러시아로 탈출하고 일부는 북으로 끌려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비록 이들의 움직임이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간주될지라도, 북한의 현재 상태의 일면을 비춰주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북한 핵실험과 관련, 내부 단속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분석이 빠지지 않고 국내 언론에 회자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부 탈북자와 전문가들은 잔여 세력들이 아직도 국경 부근에서 임시정부 추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진단했다. “임시정부가 은밀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첩보가 얼마 전까지 국내로 전달돼온 것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1997년 이어 2번째 시도
한 대북 소식통은 “북한에 확고한 친중 정권이 들어서기를 바라는 중국의 입장에 따라 향후 이들의 움직임이 재연될 여지는 남아 있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했다.
물론, 현재로선 임시정부 추진세력이 중국 안에서 새로운 모색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미국도 탈북자들을 자국 내부로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한 상태다.
한편, 탈북 주요 인사들의 임시정부수립 추진은 지난 1997년 처음으로 시도됐지만 실패한 전례가 남아 있다.
김대현 dhkim@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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