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보선 ‘출마’ …차기대선 역할론 ‘급부상’
재보선 ‘출마’ …차기대선 역할론 ‘급부상’
  • 홍준철 
  • 입력 2006-03-07 09:00
  • 승인 2006.03.07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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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 나이에 국회의원에 출마해 32세로 최연소 배지를 달게 된 강삼재 전 신한국당 사무총장(54세·현 한나라당 상임고문). 마산에서 내리 5선을 하면서 잘 나가던 그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시련이 시작됐다. 안풍사건으로 무려 4년9개월간 식물인간처럼 지내다 지난 10월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나면서 긴 악몽에서 깨어났다.강 전총장은 ‘천당과 지옥을 오고간 느낌’이라고 회고하면서 무죄 판결이후 정치 재개를 공식선언했다. 더불어 그는 중앙당에 자신의 역할과 관련해 ‘백지위임’을 한 가운데 3월 결심설도 점차로 가시화되고 있다. 곧 있을 5·31 지방선거에서 역할론이 나오고 있고 마산갑 보궐선거에 나설 것이라는 말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이에 정가에선 민자당과 신한국당 등 집권여당에서 두 번의 사무총장을 지낸 바 있는 강 전총장의 정치적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동교동계로 정치입문

강삼재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은 경희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감방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후 1976년에는 경남신문에 입사 80년까지 기자생활을 하다 28세의 젊은 나이로 11대 총선에 출마했다. 당시 강 전총장은 당선자와 불과 3천표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선거운동도 15일이란 짧은 선거운동기간을 감안하면 놀라운 득표력이다. 그는 차기 국회의원선거에서 신한민주당으로 마산에 출마해 32세라는 젊은 나이로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내리 4선을 하면서 민주당 대변인, 민주당 사무총장, 신한국당 사무총장, 한나라당 부총재를 역임했다. 이 과정에 집권여당의 살림과 조직을 총괄하는 사무총장을 두 차례나 맡았다.강 전총장은 YS의 핵심 상도동계 인사로 알려져 있지만 정치 입문은 동교동계로 시작했다.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한 계기는 12대 총선을 앞두고 김상현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의 권유 때문이다.

돈 한 푼 없었던 강 전총장은 김 의장이 ‘돈 걱정은 하지말라’는 전폭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제12대 전국 최연소 당선자가 됐다.정치 입문은 동교동계로 시작한 것이다. 이를 언짢게 본 YS는 당시 다른 당의 현역의원을 입당시켜 복수공천을 통해 강 전총장을 공천에서 탈락시키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강 전총장이 동교동계에서 상도동계로 말을 바꿔 탄 것은 지역 여론때문이었다. 지역 주민들은 강 전총장을 DJ 사람으로 여기면서 ‘속았다’는 말들이 강 전총장을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때문에 강 전총장은 김상현 의장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해 양해를 구했고 동교동계에서 3개월만에 상도동맨으로 변신했다.이후에도 DJ는 강 전총장에게 용돈도 주고 집과 자동차도 사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강 전총장은 이를 거부했다. DJ가 97년 대선에서 대통령이 된 이후 2001년 1월 안풍사건이 터졌을 때 강 전총장은 이런 DJ와의 연으로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안풍 사건’으로 급추락

DJ가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정치인 강삼재는 시련기를 맞이했다. 그는 2001년 1월 ‘안풍사건’에 연루돼 불구속 기소되면서 4년9개월간 긴 법정투쟁에 휩싸이게 된다.그는 2003년 1심재판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이 선고되자 국회의원직과 한나라당 부총재직을 사임하고 정계를 은퇴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2심(2004년 7월)과 3심(2005년 10월)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서야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하지만 강 전총장에게 4년여의 시간은 긴 악몽의 터널과도 같은 세월이었다. 안풍사건이란 김기섭 전 안기부(현 국정원) 운영차장이 1995년 안기부 예산 중 1,192억원을 강삼재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을 통해 신한국당(현 한나라당)에 불법지원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쟁점은 ‘이 돈이 안기부 예산이냐, 김영삼 전대통령이 과거 조성한 정치자금이냐’였다. 재판과정에서 1,192억원은 안기부 계좌에 예치됐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이었음이 드러났다.

강 전총장과 김 전운영차장은 1심에서 각각 징역 4년과 5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으나, 2심과 3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안풍 사건은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낙방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하지만 이 후보의 대선 실패보다 강 전총장에게는 ‘안기부의 국고수표를 김영삼 전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는 진술로 심적인 고통을 더 받아야 했다.당시 변호를 맡았던 정인봉 변호사(현 한나라당 인권위원장)는 “당시 1심에서 900여억원의 추징액과 징역형이 떨어졌을 때 눈앞이 깜깜했다”며 “강 전총장은 법원이 한나라당 9개 시도지부 부동산 가압류를 수용하는 등 당에 부담을 주자 고향에 있는 자살바위에 올라 자살을 4번씩이나 기도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결국 강 전총장의 변호인단은 ‘전장에서 실탄을 쏘지도 못하고 죽을 수는 없다’며 중앙일보에 ‘YS가 돈을 건넸다’는 말을 흘렸다. 재판부도 강 전총장에게 ‘YES’냐 ‘NO’냐를 강요했고 강 전총장도 2심 재판때 ‘YS에게 돈을 받았다’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YS에 ‘울고 웃고’

강 전총장은 안풍사건으로 인해 심적 고통을 겪었던 주된 원인은 주군인 YS를 밟고 살아야했기 때문이다.검찰이 안풍사건관련 내사를 벌이던 순간에 강 전총장은 YS를 찾았다. 1997년 대선이 끝난 직후 YS를 찾은 그는 “(안풍사건관련) 최근 수사기관에서 저에 대한 조사를 한다고 하는데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취임도 하기전에 이렇게 하는 것은 너무 하는 게 아니냐”고 불만을 터트렸고 YS는 “내가 무슨 힘이 있나”라고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이후 강 전총장은 안기부 자금의 출처 관련 진실을 밝히느냐 마느냐를 두고 4번이나 자살을 기도하는 등 절박한 상황에 놓였을 때 YS가 심적 고통을 덜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4년여 넘게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YS는 단 한번도 강 전총장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강 전총장과 측근들은 말했다.그러던 YS가 지난해 11월 말 강 전총장이 안풍 사건에서 무죄판결이 나자 상도동 자택으로 불렀다.이 자리에서 YS는 강 전총장에게 “몇 년 만이고 고생 많았다”며 “과거는 잊고 새출발하라”고 반갑게 맞이했다. 이에 강 전총장도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며 서먹해진 둘 관계는 예전의 ‘정치적 부자’관계로 싱겁게 복원됐다.

“긴 악몽에서 깨어난 기분”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은 후 정가에서는 강 전총장이 언제 어떻게 정치선언을 할 것이냐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강 전총장도 ‘3월 중대 결심설’을 흘리면서 정치재개를 암중모색하고 있다. 그는 지난 23일 경남도지사 불출마 선언과 함께 정치재개를 공식선언했다.그는 이 자리에서 “백의종군 자세로 정권창출을 위해 앞장 서겠다”며 “다가오는 5월 지방선거와 2007년 대선에서 승리를 위해 매진하겠다”고 피력했다.일단 강 전총장은 자신의 역할론을 중앙당에 백지위임하는 자세를 보였다. 5선에 집권 여당 최장수 사무총장으로서 갖는 정치적 무게감도 쉽게 못 움직이게 만들고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하지만 정가에선 마산갑 김정부 의원의 부인이 구속되면서 보궐선거 가능성이 높아져 마산 출마설이 대두되고 있다.

또 맹형규 전의원의 지역구인 송파갑 출마설도 나오고 있다.이와 관련, 강 전총장의 한 측근은 “김정부 의원의 마산갑의 경우 대법원 판결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총장이 미리 언급하는 것은 적절지 않다”며 “아직도 기간은 남아 있다”고 여유를 보였다. 이어 그는 “강 총장은 경남도지사 불출마를 선언했지만 송파나 마산에서 출마를 하지 않겠다는 말은 안하고 있다”며 “일단 당에서 강 총장을 어떻게 쓸 것인지 입장정리가 나오고 출마와 관련해서도 선교통정리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출마를 한다면 마산쪽으로 더 기울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현재 한나라당 상임고문으로 등재돼 있는 강 전총장이지만 지방선거에서 활동할 직함은 갖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측근들은 지방선거에서 강 전총장에게 역할을 주려면 당에서 공식적인 직함부터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 안풍사건 담당 정인봉 변호사 회고“YS, 다이어리에 수백억씩 수표 넣어 건네”

강삼재 전총장이 안풍사건으로 기소되면서 꾸려진 변호인단은 처음엔 당에서 전폭적으로 지원을 했었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변호인단은 이회창 전총재 측근들만 남게 됐다. 끝까지 강 전총장과 남은 변호사들로는 서정우, 이종락, 장기욱, 이주영, 정인봉씨 등 5명이 무죄판결이 날 때까지 변호를 맡았다.한나라당 인권위원장이자 16대 국회의원인 정 변호사는 안풍사건의 실체를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고 회고하고 있다.그는 “당시 강 전총장의 얘기를 듣고 엄청난 사건임을 깨달았다”며 “실질적으로 안기부 예산의 3분1에 해당되는 1천억대의 돈을 축내고 안기부가 운영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시작했다”고 밝혔다.또 그는 1심재판이 진행되기전부터 YS에게 돈을 받았다는 진술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강 전총장이 진술을 하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다고 전했다.정 변호사는 “검찰에서 문제 삼는 안기부와 관련된 태양문화사 계좌 등 6개에 대해 우리는 전부 계좌추적을 하자고 주장했으나 재판장이 거부하는 등 옥신각신하다 급기야 1심에서 실형이 떨어졌다”며 “당시 변호인단은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입장을, 강 전총장은 YS와 의리상 못하겠다고 대응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성격

정 변호사는 재판이 진행되기 전부터 YS가 강 전총장에게 어떻게 정치자금을 건네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정 변호사에 따르면 정치자금은 주로 강 전총장이 YS에게 당무 보고를 하려고 총재실에 들어갔을 때 YS는 미리 준비한 다이어리에 백지수표를 몇 백장씩 넣어 건넸다고 밝혔다.이런 증언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강 전총장이 진술을 하지 않자 2004년 7월 2심 판결 전 장기욱 변호사가 중앙일보에 제보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당시 변호인단내에서는 강 전총장이 의리를 지키고 정계은퇴까지 한 마당에 YS의 마음이 움직여 진실을 밝힐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1심 판결이후 이런 기대감은 ‘사치스러운 생각’으로 바뀌면서 폭로하게 됐다고 정 변호사는 설명했다.강 전총장과 한 살 터울인 정 변호사는 4년 넘게 강 전총장과 지내면서 “강 전총장은 의리를 소중히 여기고 지켜 내는 몇 안되는 인사”라며 “정치 스타일도 YS를 닮아 감이나 판단력이 뛰어난 분”이라고 평했다.

또 그는 “차가운 인상이지만 첫 문을 열기가 어렵지 한번 마음을 열면 간, 쓸개도 빼주는 인간”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다음은 정 변호사가 강 전총장의 성품을 알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한 것이다.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이후 강 전총장은 담당 변호인단을 초청해 서울시내 모처에서 저녁 식사자리를 가졌다. 구두를 신고 들어가는 식당을 찾은 일행은 자리를 다 잡고 식사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강 전총장이 맨 흙바닥에서 변호인단을 향해 ‘큰절’을 하며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다. 이로인해 그동안 변호사 비용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변호를 맡았던 변호인단과 강 전총장의 껄끄러운 관계가 눈 녹듯 사라지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정 변호사는 밝혔다.

DJ와의 악연도 ‘한몫’

정 변호사에 따르면 97년 대선에서 DJ가 당선되자 강 전총장은 ‘정치적 보복’에 전전긍긍했다고 전했다. 강 전총장은 95년 43세의 최연소 집권당 사무총장으로 위세를 떨치며 그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 터지자 DJ의 20억+α설을 제기했다.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그것을 시인했고 97년 대선까지 큰 짐이 됐던 인연이 있다.이후에도 강 전총장은 DJ에게 돈을 준 기업명단과 액수, 시기를 적은 명단을 공개했고 DJ는 ‘조작되고 파렴치한 행위’라고 맹공을 퍼부은 바 있다. 여기에 정치입문을 동교동계로 시작했음에도 상도동계로 변한 것에 대해서도 DJ는 무척 서운함을 가지고 있었다며 DJ와 강 전총장의 악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홍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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