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임인배 한나라당 의원과 김원웅 열린우리당 의원은 국적법 개정안을 통해 무국적 독립유공자의 국적회복을 추진한 바 있다.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원도 무국적 또는 외국국적 보유상태로 사망한 독립유공자 및 그의 직계비속의 국적에 관해 심의·결정하는 국적심사위원회를 법무부 산하에 설치하는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하지만, 이들 법안이 제출된지 1년이 지났음에도 법안심사소위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잠자고 있다. 광복 60주년을 기해 추진한 ‘독립유공자의 국적회복’은 왜 방치되고 있는 것일까.
이들 국적법 개정안은 독립유공자 및 그의 후손들이 국적회복 과정에서 겪는 혼란을 근원적으로 막기 위한 법률안이다. 이를테면, ‘독립운동에 기여한 조선인으로서 일제 때 무국적 상태로 있다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사망한 자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자로 본다’는 조항을 국적법에 신설하는 것이다.
법안심사소위 논의조차 없어
하지만 지난해 국회 법사위에선 이들 국적법 개정안은 ‘법적 해석’의 이유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독립유공자로서 무국적자이거나 외국 국적을 보유한 상태로 사망한 독립유공자 등은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나 국적법 등의 해석 및 대법원 판례 등에 의해 이미 우리 국민이므로 이들에 대한 국적법은 부적절하다는 판단에서다. 이들의 후손 역시 우리 국민인 독립유공자의 자손이므로 대한민국 국적자로 해석된다.
이러한 이유로 이번 정기국회에서도 다뤄질 지는 미지수다. 법사위 한 관계자는 “처리해야할 민생 법안에 견줘 우선 순위에서 밀려났다”면서 “이번 정기국회에서도 국적법 개정안 논의는 일정에 없다”고 밝혔다.
현행 국적법은 국적 취득자로 ‘출생할 당시에 부 또는 모가 대한민국 국민인 자’로 규정하고 있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사망한 사람의 국적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 현행법은 생존하는 자연인의 국적 취득만을 규정할 뿐, 사자(死者)에 대해 국적을 부여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을 돕고자 하는 취지도 이러한 법해석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유공자 후손 입증의 문제”
법무부측의 견해는 현행 국적법 개정이 아닌 대법원규칙 및 호적예규를 개정하거나, 해외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 자손들의 귀화와 관련 절차를 간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입법의 문제가 아닌, 독립유공자 후손이라는 사실의 입증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추상적인 법 해석론으로 인해 국적을 회복하려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고통을 겪고 있다. 국적회복을 위해 유공자 자손들이 법원과 보훈처를 수십 번 출입해도 모자랄 정도다. 항일투사의 자손들이 대접을 받기는커녕, 사기꾼으로 몰리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해외에서 사망한 단재 신채호, 석주 이상룡, 여천 홍범도, 부재 이상설, 노은 김규식 등 200∼300명에 이르는 독립유공자들이 무국적, 무호적자로 방치돼 있다.
# 독립운동가 엄익근 선생 손자 엄근학씨 인터뷰
“조부의 국권회복 투쟁, 손자가 이젠 국적회복 전쟁”
엄근학(53)씨는 중국 교포다. 그의 신분증은 외국인 등록증이다. 그렇다 해도 불만은 없다. 작년 5월 등록증을 발급받기까지 그는 ‘불법체류자 합동단속’을 피해 가슴을 조려야 하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국적회복을 위해 법무부와 보훈처를 상대로 1년여의 긴 싸움을 통해 얻은 결과다.
3·1운동 이후 중국으로 몸을 피해 독립군 군의관으로 활동한 엄익근(1890~1950·1982년 서훈) 선생의 손자인 엄씨. 지난 9월28일 만난 그는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찍은 할아버지 사진을 펼쳐 보이며, 삼대를 이어온 통한의 가족사를 끄집어냈다.
엄익근 선생은 3·1운동 이후 조직된 ‘청년전지공작대’에 가입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쫓겨 중국으로 몸을 피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그는 40년 광복군이 창설된 뒤 ‘왕인석’이라는 가명으로 독립군 2지대 군의관으로 활동했다.
그의 부인이자 엄씨의 할머니인 윤을남(1894~1943)씨는 아들 윤희(1916~1987)씨의 강제 징집을 피해 43년 중국으로 피신했다. 엄씨는 윤희씨의 장남이다.
남편이 떠난 뒤 엄씨의 할머니는 아들의 강제징집을 피해 중국 헤이룽장성으로 피신한 뒤 귀국하지 못했다. 그 사이 엄익근 선생은 독립군 동료였던 송영집(1910~1984·1990년 서훈)씨와 결혼해 광복 이후 귀국했다.
중국 연변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엄씨는 연변 초등학교에서 국어와 음악을 가르쳤다. 하지만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무역업을 하고 있는 막내동생의 도움으로 98년 한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돈 없는 조선족 교포, 게다가 불법체류자 신분인 그가 구할 수 있는 직업이란 뻔했다. 새벽 4시반부터 시작되는 건설현장 공사판 막일이 그것이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임금 수준과 대우는 둘째치고라도 ‘불법체류자 합동단속’은 공포 그 자체였다.
이런 와중에 시간이 날 때마다 광복회나 보훈처를 찾았으나, 중국 교포 사기꾼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밝히는 서류가 없었기 때문이다. 팔 걷어 붙이고 국적회복에 나선 때는 2004년. 영월엄씨 종친회, 선친 엄윤희씨가 졸업했다는 서울 매동초등학교 등을 찾아 헤맸다. 중국 거주지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엄씨 삼형제의 호적관계 서류를 만들어 공증을 받아, 법무부와 보훈처에 국적회복신청서를 접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중국 기관이 발행한 문서를 인정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
엄씨는 숱하게 법무부와 보훈처를 드나들었고, 결국 지난해 5월 외국인 증명서를 발급 받았다. 그리고 2년여의 긴 싸움 끝에 국적회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래서 일까. 단칸 월세방에서 부인과 함께 과년한 두 딸과 생활하고 있지만 ‘희망’이 보인다.
엄씨는 “국권회복을 위한 할아버지의 독립투쟁이 오늘날 그 후손들의 국적회복 투쟁으로 둔갑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라며 “훨씬 많은 항일투사 후손(중국 교포)들이 한국 국적 취득을 희망하고 있다”고 했다. <미>
이금미 nicky@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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