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선수 시절부터 수차례의 인터뷰를 해왔던 기자로서는 당장 전화기를 들어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빡빡한 스케줄이 잡혀있을 게 뻔했기 때문에 당분간은 시간을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입국한지 이틀이 지난 24일, 어렵게 전화 통화를 시도했다. 최홍만의 핸드폰 연결음은 마이클 잭슨의 ‘beat it’이었다.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경쾌하고 톡톡 튀는 리듬이 평소 그의 이미지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동안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감상한 후에야 겨우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행히 그는 기자를 기억하고 있었고, 반가운 인사를 건네며 안부를 물어왔다. 하지만 전화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사장님께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편하게 전화통화를 주고받던 예전과는 다른 상황. 그만큼 그는 전화 통화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톱스타’가 됐다는 의미였다.
파죽의 6연승… 그리고 첫 패배
“다시 생각해도 아쉽죠…. 더 잘 할 수 있었는데….”본야스키와의 경기를 마친 소감에 대해 최홍만은 그렇게 대답했다. 전화기 속 그의 목소리는 무척 덤덤했지만 여전히 경기에 대한 미련은 떨치지 못한 듯 느껴졌다.그도 그럴 것이 지난 3월 데뷔전 이후 첫 패배. 데뷔와 동시에 6연승이라는, ‘K-1 새내기’라고는 믿지 못할 기록을 세우다 처음 무릎을 꿇은 것이어서 더욱 아쉬움이 남을 터.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 자로서 충격은 만만찮았을 것이다. “한 번 해볼만하다고 생각했었죠. 본야스키와 체격조건이 비슷한 스파링파트너를 상대로 몰아붙이는 연습을 하면서 나름대로 전략도 있었어요. 본야스키가 로킥에 강하기 때문에 특별히 하체강화에 주력했죠. 또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상대에게 조금 약한 모습이 있는 것 같아서 제 특기인 복싱기술과 스트레이트로 몰아붙이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경기하면서 연장전에 갈 것으로 생각해 힘을 비축해 뒀었는데 예상외로 3라운드에 끝나 아쉽네요.”그제서야 최홍만은 억울함을 호소라도 하려는 듯 숨겨뒀던 전략을 술술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번 경기에 그가 얼마나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만큼 최홍만으로선 물러설 수 없는 한판이었던 셈. 그러나 상대는 만만치 않았다. 본야스키는 2년 연속 이 대회를 석권한 명실상부한 K-1의 최강자. 지난 3월 K-1 무대에 첫 발을 내디딘 최홍만의 상대로선 벅찼던 게 사실이다. 경기는 예상대로 최홍만의 ‘펀치’와 본야스키의 ‘킥’ 간의 싸움이었다. 1라운드 시작부터 최홍만은 본야스키의 필살기인 로킥을 그대로 허용했다. 2라운드, 3라운드까지도 그는 본야스키의 로킥과 하이킥에 시달려야 했다. 본야스키보다 25㎝나 더 큰 키와 긴 팔을 이용해 원투 스트레이트를 날리며 밀어붙여 보았지만 이렇다 할 유효타는 없었다. 잽싼 본야스키를 잡기에 최홍만은 너무 느렸고 정확한 얼굴 가격도 이뤄지지 못했다. “머리가 좋은 선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니킥을 쓰려고 했는데 본야스키가 그럴 기회를 주지 않고 미리 막더라구요. 2라운드부터 본야스키를 코너에 몰아넣고 편치를 퍼부으려고 수차례 시도했지만 정타를 피하면서 교묘하게 빠져나가더군요. 경기를 오래해서 그런지 참 영리한 것 같아요. 그것도 실력이죠.”
조금 느려도,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싶다
그는 본야스키를 ‘머리가 좋은 선수’라고 평가했다. 그만큼 그와의 경기에서 배운 점이 많다는 의미였다. 일단 디펜딩 챔피언과의 한 판 승부는 냉정한 프로의 세계를 경험하게 했다. 무수한 경기 경험과 연습, 자신만의 필살기 등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앞으로 링 위에서 대적할 수많은 ‘고수’들을 누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상처를 겪어야 하는지도 절실히 느끼게 됐다. “이번 시합하고 나서 얻은 게 너무 많아요. 일단 자신감이 생겼구요, 본야스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았죠. 졌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다음번에 또 다시 붙는다면 그땐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그는 본야스키와의 경기를 통해 ‘연습’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했다.
사실 최홍만이 이번 경기를 치르기까지 제대로 훈련을 했던 시간은 고작해야 5개월. 3월 데뷔전 이후 지금까지 많은 경기를 치렀지만 실질적인 기술을 익히고 연마하는 데 제대로 쏟아 부은 시간은 그 정도뿐이라는 소리다. 6연승이라는 성적을 거두긴 했지만 실제 ‘내공’이 쌓여 얻어진 결과라고 생각지는 않는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러가지 기술을 연마하고 익혀서 ‘내 것’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럴만한 시간이 충분히 없었어요. 시간은 없는데 대회 출전은 계속 잡혀있으니 별 수 없잖아요. 팔이 기니까 주로 ‘복싱’ 기술에만 주력한 게 사실이에요. 사람들이 이것 배워라, 저것 배워라 옆에서 계속 말들을 하는데 실질적으로 5개월이란 시간 동안 그 많은 것들을 모두 제 것으로 만들긴 쉽지 않거든요. 저도 그래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그 속을 누가 알겠어요….”최홍만은 짧았던 훈련시간이 꽤나 아쉬웠던 모양이다.
그것은 비단 본야스키와의 경기에서 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6연승을 거둔 지난날의 승리 역시 아쉬움이 남는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진정한 파이터’의 면모를 갖추고 싶다는 최홍만 개인적인 욕심이자 각오이기도 했다.“연습과 경험 앞에선 타고난 ‘신체조건’도 무색해지는 것 같아요. 제 덩치가 너무 커서 상대방 기선제압 하는 것은 유리하지만, 꾸준히 연습하고 실력을 쌓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이빨 없는 호랑이’가 되는 거니까요. 그런 점에서 세미 쉴트는 좋은 모델이 될 것 같아요. 쉴트 역시 2m가 넘는 거구인데도 불구하고 킥과 펀치 등 다양한 공격기술로 상대를 끊임없이 몰아붙이고 스피드 역시 수준급이잖아요. 저 역시 스피드, 킥 기술 등을 보완해서 제대로 된 ‘골리앗’이 돼야죠. 조금 늦더라도 말이에요.”
난 여전히 링 위에서 맞는 꿈을 꾼다
K-1 무대에 서기 위해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지 벌써 일 년.3월 데뷔전 이후 9개월 동안 총 7번의 경기를 치르고 앞으로 더 많은 시합을 앞두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링 위가 낯설다. 상대 선수의 전력을 파악하면서 그들이 선보이는 강력한 기술에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지난 경기에서도 그는 본야스키의 로킥이 무서웠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매서운 펀치와 다리를 가격하는 킥의 공포를 생각하면 겁부터 나는 게 사실이다.그는 지금도 링 위에서 실컷 얻어터지는 꿈을 꾼다고 했다.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잠에서 깨는 버릇도 여전하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 이젠 그런 ‘공포’를 즐긴다는 것. “무섭죠. 누군가랑 단둘이 맞붙어 치고받고 한다는 게…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저도 그만큼 맞아야 하니까 그게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근데 지금은 그걸 즐겨요. 그만큼 제가 K-1에 빠져 있다는 의미죠. 늘 그것만 생각하고, 늘 그것만 상상하고… 그러니까 꿈에도 나오는 거고…. 처음에는 모든 것이 두려웠는데 이젠 그런 것들이 좋게 받아들여져요. 제게는 아주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현상인 셈이에요.”최홍만은 올해 ‘K-1 다이너마이트 대회’만을 남겨두고 있다.
‘다이너마이트 대회’는 한 해를 정리하는 의미로 매년 12월 31일 열리는 K-1의 종합 이벤트. 그러나 그의 출전 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그의 소속사 측에 따르면 K-1 측이 제시한 상대를 보고 결정할 예정이라고.“출전여부는 아직 미지수지만 일단 승패에 연연하지 않아요. 만약 대회에 나간다면 정상급 파이터들과 맞붙고 싶어요. 지더라도 제 기량향상에 도움이 되는 선수를 경험하고 싶거든요. 내년부터는 정말 쟁쟁한 선수들과 링 위에서 만날 텐데, 지금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승’보다 ‘실력’을 쌓는 거예요.” 최홍만…. 그는 분명 성숙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들떠서 ‘최고가 되겠다’고 외치던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2006년 그랑프리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 모습을 기대하겠다는 기자의 말에 “지금은 무조건 노력해야 할 때”라며 “실력이 쌓이면 승리는 자연히 돌아오게 된다”는 겸손하고 의젓한 답변도 내놓는다.
최홍만은 언제나 ‘impossible is nothing!’이라는 표현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적어 놓는다. 그리고 매일 되새긴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그것은 최홍만 스스로에 대한 각오이자, 새로운 도전에 대한 가능성, 그리고 확신을 의미한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된다. 2006년 어느 날… 혹은 그 후라 하더라도…덩치만 ‘골리앗’이 아닌, 실력까지도 ‘골리앗’인 모습으로… 링 위에서 진짜 ‘승리’의 트로피를 들고 테크노 세리모니를 펼칠 그의 모습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 인터뷰 최홍만 아버지 최한명씨“자신과 싸워 이기는 진정한 스포츠맨 되길…”
최홍만이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지난 11월 22일. 제주에 살고 있는 그의 아버지 최한명(55)씨는 아들의 입국 소식에 사뭇 들떠있는 모습이었다. 비록 본야스키와의 경기에서 패배한 것에 아쉬움이 남은 듯 했지만, 의젓하게 잘 싸워준 아들이 마냥 대견한 모양이었다. “대견하죠. 이겼으면 좋았겠지만 매번 이길 수 있나요. 상대가 그만큼 강했던 것일 테고, (최)홍만이가 또 그만큼 부족했던 거겠죠. 이번 기회를 통해 더 많은 걸 배웠으면 그걸로 된 거죠.”최씨는 아들이 K-1 데뷔 이래 처음 패배를 겪은 것에 대해 자신을 다지는 발판으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충고도 덧붙였다. “운동도 좋지만, 스포츠맨으로서의 윤리적인 면 · 도덕적인 면 모두 갖춘 그런 선수가 됐으면 좋겠어요. 힘들었던 시간도 잊지 않고 늘 자신을 채찍질 하면서 말이죠. 자신과 싸워서 이길 때, 그게 진정한 ‘프로’니까요.”
그는 낯선 K-1무대에 잘 적응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한없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일본이라는 타지 생활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 오히려 생활력도 강해지고 성숙해져서 더없이 든든하다고. 최씨는 아들이 좋아하는 참치찌개를 끓여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말을 전했다.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 안타깝지만 그래도 아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세상 부러울 것 없다면서. “홍만아! 니 엄마가 참치찌게 맛있게 끓여놨으니까 부산 일정 마치고 언넝~ 오너라!!”
정현아 프리랜서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