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家 ‘불도저 정신’ 잇는 뚝심의 여장부
현대家 ‘불도저 정신’ 잇는 뚝심의 여장부
  • 정혜연 
  • 입력 2005-09-20 09:00
  • 승인 2005.09.20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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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8월5일 새벽. 그녀는 남편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통곡했다. 그리곤 한동안 실신했다. 깨어나서도 그녀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천장만 바라보았다. 오장육부를 면도날로 도려내는 아픔. 그것은 그녀의 고통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울고 또 울었다. 무엇이 남편을 사지로 내몰았단 말인가. 그렇게 그녀는 남편을 떠나보냈다.그런지 2년이 흐른 지금, 그녀는 또다시 통곡하고 있다. 남편이 겪었던 고통과 비애와 한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왜 남편이 수없이 많은 밤을 뜬 눈으로 지새며 뒤척였는지를…. 지금 그녀는 남편이 너무나 그립다. 그리고…. 현정은, 그녀에게는 이런 수식어들이 붙는다.

‘현대그룹 창업주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다섯째 며느리이자 고 정몽헌 전 현대아산의장 부인.’ 이 수식어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것이고, 그녀 자신도 이 수식어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시아버지와 남편이 목숨을 걸고 추진했던 대북사업의 바통을 이어받았다.그러나 지금 그녀는 흔들리고 있다. 현 회장은 남편이 죽은 지 정확히 2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지난 8월,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을 일선에서 퇴진시켰다. 김 부회장이 누구던가. 남편 정몽헌 회장과 함께 대북사업을 이끈 사람이었다. 남편은 마지막 남긴 유서에서도 김 부회장에게 “대북사업을 성공시켜달라”고 당부했었다. 그런 사람을 그녀는 대북사업에서 사실상 물러나게 했다. 그녀는 국민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고백문에서 이같은 결단을 ‘읍참마속’이라고 했다. 딱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렇지만 현 회장의 결단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왔다.

그 여파는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을 송두리째 흔드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김 부회장의 퇴출에 대해 북한은 ‘금강산 관광 절반 축소’라는 조치를 취했고, 백두산관광사업을 국내에 있는 다른 기업에 맡기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가뜩이나 대북사업으로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관광축소 조치는 현 회장으로 하여금 더 이상 대북사업을 해야 할 메리트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현정은 회장은 여장부인가, 아마추어 경영인인가. 현 회장은 1955년 생으로 올해 만 쉰살이 됐다. 그는 현대상선 회장을 지냈던 현영원씨와 김문희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현 회장의 외할아버지는 전방그룹의 창업주인 고 김용주 회장이다. 전방그룹은 지난 1930년대에 설립돼 1960년대에 메리야스 용품에 이용되는 원사와 청바지 등 의류용 직물을 생산했던 대형 면방업체다.

부친 현영원 현대상선 회장은 원래 신한상선 오너인데, 그가 현대그룹과 사돈을 맺은 직후 회사를 현대상선에 흡수시켰다. 그의 어머니 김문희씨 역시 평범한 가정주부는 아니다. 현대엘리베이터의 대주주이기도 한 김문희씨는 용문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현 회장의 백그라운드를 보면 사업가의 피와 기질을 물려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1월생인 탓에 또래의 친구들보다 일찍 학교에 입학했다. 1972년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현 회장의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는 어느 조직에서든 별로 튀지 않는 성격의 조용한 학생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가 나온 이화여대에는 아직도 그를 기억하는 은사들이 많다. 워낙 뛰어난 학습능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란다. 현 회장을 지도한 이동원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가 전하는 얘기다. “현 회장은 내가 가르친 수많은 학생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학생이다.

부유한 집 딸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 교수는 현 회장의 결혼소식이 전해지기 전까지 그의 가정환경에 대해 몰랐다고 덧붙였다.) 그는 수업시간에 유난히도 눈이 반짝이는 학생이었다. 한 번은 학부생들에게는 조금 버거운 리포트를 요구했는데, 현 회장이 내가 원했던 모범 답안을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 혼자 생각에 (현 회장이) 교수를 하면 참 잘 할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현 회장이 학창시절부터 무척 꼼꼼하고 성실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현 회장의 이런 평범한 학교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집안 어른들의 주선으로 현대그룹과 혼담이 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1976년. 현 회장은 학부를 졸업한 이후, 대학원에 진학한 해에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5남인 고 정몽헌 의장과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1년 뒤, 현재 그에게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는 맏딸 지이(현대상선 과장)씨를 얻게 된다. 하지만 그는 미리 일어날 일을 예견하고나 있었을까.

현 회장은 여느 재벌가의 며느리들처럼 ‘안주인’이라는 달콤한 자리에 결코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첫 딸을 출산한 이후에도 대학원을 다니며 결국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남편인 고 정 의장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뉴저지주에 있는 페어리 디킨스 대학원에서 다시 한 번 인간관계(Human Development)학이라는 분야를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현대’라는 거대한 벽은 그에게 그룹의 경영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처음 외부에 포착된 것은 지난 1992년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대선에 출마했을 때였다. 당시 고 정 명예회장의 일곱 며느리들은 모두 시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선거운동에 나섰는데, 현 회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간혹 언론에는 고 정 명예회장의 생일잔치 얘기가 나오곤 했는데 이 때에도 현 회장의 모습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가의 여느 며느리들이 그러하듯 지극히도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현 회장은 ‘현대’와 관련되지 않은 분야에서는 조금씩 사회적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83년부터 1998년까지 걸스카웃 연맹 국제분과위원을 맡았고, 1999년부터는 대한적십자사 여성봉사 특별자문위원도 맡은 것.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현 회장은 현대가의 안주인, 며느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외부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것은 청천벽력 같은 남편의 죽음 때문이었다. 지난 2003년이었다. 그 해 8월, 고 정 의장이 뜻밖의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현 회장은 그의 ‘미망인’으로서 세인들의 애처로운 시선을 받았다. 당시 고 정 의장의 죽음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었던 만큼 그에게 쏟아지는 세간의 시선속에는 안쓰러움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불과 두 달 뒤, 그는 세상을 놀라게 하고 말았다. 남편인 고 정 의장의 뒤를 이어 현대그룹의 수장이 되겠다고 천명했기 때문이었다. 2003년 10월, 현정은 회장은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에 올랐다. 하지만 그가 경영 일선에 나선다는 소식이 모두에게 반갑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당장 그의 시숙부인 정상영 KCC명예회장이 딴지를 걸고 나섰기 때문이다. 결국 현 회장은 취임한 지 3주만에 KCC와의 경영권 분쟁에 휩싸였고, 세상에 ‘숙부의 난’ 중심에 선 여인으로 각인되고 있었다. 처음 현정은 회장의 태도는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그의 어머니이자, 현대엘리베이터의 대주주인 김문희씨가 경영권 전쟁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했을 정도였다. 현정은 회장과 정상영 명예회장의 경영권 분쟁은 6개월 지속됐다. 그즈음 현 회장은 변하고 있었다. 지난 2004년 3월. 현대엘리베이터의 주총에서 주주들은 고 정 의장의 삼촌이 아닌 부인의 손을 들어줬다. 현 회장이 명실공히 현대엘리베이터의 대표이사로 거듭난 것. 이후 현 회장은 여성 경영인으로서의 특성을 살리며 경영인으로의 행보를 걷고 있다. 때로는 직원들에게 책과 삼계탕을 선물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때로는 냉혹한 경영자로. 그런 현 회장이 최근 칼을 뽑아들었다. 대북사업의 핵심인 김윤규 부회장을 그룹에서 퇴출시킨 것. 현대그룹에서는 이런 모습에 ‘오너의 단호함’과 ‘여성 경영인의 부드러움’을 모두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녀에게 이번 사태는 경영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남편이) 목숨까지 걸었던 사업인데, 이쯤이야….” 그녀에게 대북사업은 그냥 사업일 뿐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정의로운 경영인’으로 거듭나느냐 마느냐 하는 부분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는 듯하다.

# 몸 숨기던 재벌家 안주인서 여장부로 변신하기까지 2년 - 기자가 만나본 현정은 회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확 변했다. 불과 2년 전인 지난 2003년, 현 회장은 그동안 세파에 전혀 시달리지 않은 듯한 가정주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에 그의 이런 모습은 눈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는 듯하다. 기자가 현 회장을 직접 만난 것은 지난 2003년 11월이었다. 당시 현 회장은 시숙부인 정상영 KCC명예회장으로부터 그룹 경영권을 위협받고 있을 때였다. 현 회장은 이즈음 ‘현대그룹의 국민기업화’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후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고 정몽헌 회장이 작고한 후 경영에 직접 나서기까지의 과정, 시숙인 정상영 명예회장에 대한 느낌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하지만 정작 현 회장은 이 질문에 대해 단 한마디의 대답도 하지 못했다. 현 회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옆 자리에 앉은 강명구 전 현대택배 회장 등이 마이크를 잡아챘기 때문이다. 현 회장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라도 듣고싶은 기자들로서는 난감하기 그지 없는 상황.현 회장은 기자회견이 끝난 후 급히 그룹 비서실 직원들에 둘러싸여 회의장을 빠져나갔고, 기자는 그의 말 한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한 쪽에 있던 현 회장은 “정상영 명예회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무척 당혹스러워보였다. 이어 되돌아온 현 회장의 답변. “저는 아무 할 말이 없어요”라며 현 회장은 발걸음을 뒤로 하고 얼른 강명구 전현대택배 회장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이후 그는 1층 정문에서 그를 기다리던 기자들마저 따돌리고 한 일식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떨어지면 깨질세라 수많은 직원들에 둘러싸여 있던 전형적인 한국 여인상. 수장에 어울릴지 내심 걱정도 됐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었다. 불과 2년 뒤, 현 회장은 달라졌다. 기자들의 질문은 물론, 스스로 자신을 PR하는 모습도 터득해가는 듯 보인다. 한 집안의 평범한 어머니인 그가 여장부로 변신하는데는 남다른 속사정이 있으리라. 그 스스로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몸을 숨겨서는 안된다”고. 그렇게 변하는데 걸린 세월은 2년이었다.

정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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