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의 권위있는 시사주간지 ‘타임’도 한국의 인사들 중 이건희 회장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꼽았다. 국내 인사들 중 이 리스트에 오른 사람은 이 회장이 유일하다. 물론 한 시사주간지의 자체 분석이라고 폄하할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주간지의 그같은 분석에 그리 반대의견을 갖고 있지 않는 듯하다.그의 위력은 해외에서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곧바로 국내 모든 언론이 야단법석을 떠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최근 그가 이태리의 밀라노에서 ‘디자인혁명’을 선언하자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재벌기업에서는 갑자기 광고문안이나 자사제품의 디자인을 혁명한다며 수선을 떨어댔다.
마치 ‘우리도 알고 있었다’는 듯 움직이는 경쟁기업의 모습을 보면 약간은 측은함마저 들게 한다. 또다른 경쟁기업은 다분히 삼성을 겨냥해 ‘1등, 1등’을 잠꼬대처럼 되뇌기도 한다.이 회장의 위력은 그가 잠시 ‘칩거’라도 하면 세인들 사이에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 아니냐” “그가 무슨 무슨 구상에 들어갔다더라”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모습에서도 느껴진다. 그의 대수롭지 않은 발언을 놓고도 언론에서 백가쟁명을 해대는 것을 보면 그의 위력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이쯤되니 이 회장 역시 불편하긴 마찬가지이다. 어디 가서 말 한마디도 속시원하게 할 수 없고, 행동 하나에도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다. 괜한 구설수에 오를까봐 십수명의 경호원과 홍보요원들이 주변을 애워싸고 있다.
국내든, 해외든 그가 어떤 발언을 하면 곧바로 요원들이 진위설명에 진땀을 흘려야 하는 게 삼성과 이건희 회장의 현실이다.비단 이 회장만 불편한 게 아닐 것이다. 직계가족은 물론 방계가족들까지 조심조심이다. 아들이 회사에 입사해도 문제, 사위가 회사에 입사해도 문제, 딸들이 결혼을 하건 승진을 하건 투자를 하다가 실패했건… 꿈쩍거리기만 해도 세상 사람들은 ‘호떡집에 불난 모양’으로 왕왕거린다. 이것을 듣기좋은 소리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포장하지만 본인들과 가족들은 아마도 ‘생지옥’이 아닐까.그런 그가 최근 다시 한번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가 회장직을 맡고 있는 삼성전자를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의 이사직에서 모두 사임키로 했기 때문이다. 삼성 구조조정본부에 따르면 이 회장은 지난달 31일 삼성에버랜드 이사직(등기이사)에서 물러난 것을 시작으로 올해 안에 삼성물산, 삼성SDI, 삼성전기, 제일모직 등 나머지 6개 계열사의 등기이사에서 순차적으로 물러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 이사직만 유지
C구조본이 밝힌 이유는 이러했다. “여러 경영여건을 감안해 이 회장이 삼성전자를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 이사를 수행하지 않기로 했다. 삼성전자 경영에 매진해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이 회장은 그룹의 오너로 역할 면에서는 변하는 게 없다.”삼성전자를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의 이사직을 물러나긴 하지만 과거와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이 삼성측의 설명이다. 삼성그룹의 회장으로서, 기존에 가진 지분구도면에서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이란 얘기인 것이다.삼성 구조본의 부연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회장의 갑작스런 이 거취결정에 당연히 세인들의 다양한 분석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역할과 거취에서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굳이 ‘생뚱맞게’ 다른 계열사의 이사직에서 물러날 이유도 없을 것이고, ‘등기이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과거와 똑같은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그 또한 이상하다. 안해도 될 일을 굳이 강행하는 배경이 당연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이쯤해서 눈치빠른 독자들은 몇가지 궁금증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왜 이 회장과 삼성이 갑자기 그같은 결정을 내렸을까 하는 점이고, 두 번째는 이 회장이 삼성전자를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의 이사직에서 물러난 뒤 그룹내에 어떤 경영변화가 생길 것인가 하는 점이며, 세 번째는 그같은 결정 이후 이 회장의 행보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또다른 궁금증이 있다면 이 회장의 이런 결정이 앞으로 현대자동차나 LG, SK그룹 등 오너들이 여러개 계열사의 이사직을 동시에 맡고 있는 다른 재벌기업 오너들의 거취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점이다.
먼저 첫 번째 의문.이 회장이 이번 결정을 내린 것은 공식적으론 “삼성전자의 경영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이같은 설명은 어딘가 허술해 보인다. 왜냐면 이건희 회장이 계열사 이사직을 겸임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회장의 이력을 보면 삼성그룹 계열사에 처음 입사한 것이 1966년(당시 동양방송 입사)이고, 게열사 이사가 된 것은 1968년이었다. 당시 그는 동양방송과 중앙일보의 이사가 됐다. 그후 1987년 이병철 회장이 작고한 뒤 그룹회장에 오를 때까지 삼성물산 부회장 등 여러개의 계열사를 거쳤다. 물론 당시에도 일부 계열사의 이사를 겸직했었다. 그룹 회장이 된 이후 그의 이사 겸직은 늘었다. 물론 그가 이사로 겸직한 계열사는 주로 삼성그룹의 모태기업들이었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삼성물산, 제일모직, 신라호텔, 삼성에버랜드, 삼성전기 등 지금까지 그가 이사를 겸직하고 있는 회사가 바로 그 계열사들이다. 이들 계열사 중 이 회장이 상근이사를 맡고 있는 곳은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두 곳 뿐이다.
물산 등 6개사서 퇴진
그러면 왜 지금 시점에 이 회장은 이사직을 물러나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몇가지 분석이 있다. 아들인 이재용 상무에게 그룹경영권을 넘기기 위한 수순밟기라는 시각과 투명경영을 앞세우고 있는 정치권과의 거리좁히기라는 시각, 그리고 그룹경영보다는 외치를 위한 사전정지작업이라는 시각이다. 이 중 가장 유력한 분석은 경영권 이양을 위한 수순밟기라는 부분인데, 이는 그가 다른 계열사에 앞서 그룹의 지주회사로 서서히 부상하고 있는 삼성에버랜드의 이사직에서 먼저 물러난 점 때문이다. 삼성에버랜드는 이재용 상무가 최대주주로 있는 회사이다. 아직 이 회사에 이 상무는 등기임원이거나 경영진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회장이 퇴진함에 따라 내년쯤 이재용 상무가 빈자리를 채우지 않을까 하는 전망이 삼성그룹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 회장이 삼성전자 이사직만 유지할 경우 다른 계열사 경영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하는 부분도 관심사다. 삼성그룹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잘라 말하지만 재계의 시각은 다르다. 등기이사일 때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점에 대해 삼성측은 “주요 계열사의 대주주이기 때문에 경영참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현재 이 회장이 가진 다른 계열사의 지분율이 대부분 5%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영향력은 미미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계열사들의 지분율이 낮은데 다른 계열사의 지분을 등에 업고 전체 계열사를 지배하려고 하면 이는 또다른 문제를 발생시킨다. 시민단체 등이 “지분율도 낮고, 등기임원도 아니면서 계열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재벌 총수 거취 영향
그렇다고 그가 이사직을 유지하기로 한 삼성전자가 지주회사가 되기에는 너무 위험성이 크다. 현재 외국인 지분이 60%대에 가깝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호지분을 포함하더라도 왠지 전체 계열사에 대한 지배력은 불안한 상황이다. 물론 외국인 지분이 어느날 갑자기 돌변해 이 회장을 축출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은 0%이다. 그렇다고 이 부분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다. 현재 삼성전자의 그룹내 위상이 절대적이긴 하지만 기업은 유기체와 같다. 언젠가 삼성전자도 위험에 처하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해가 지지 않는다며 세계를 호령하던 소니신화도 지금은 낡은 퇴물처럼 스러지고 있으니 말이다.여기서 세인들의 이목은 이 회장의 이번 결정이 ‘앞으로 어떤 큰 일을 하기 위해 단안을 내린 게 아닐까’하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다.
이 부분도 사실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회장은 올해 나이가 한국 나이로 64세이다.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경영 일선에서 예전처럼 활발하게 호령하기에는 적잖은 편이다. 게다가 그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외부의 손짓도 적지 않다. 전경련 회장을 맡아달라, 고위 공직을 맡아달라, 정치에 입문하라는 등 갖은 유혹이 있어왔다. 지금 이 회장은 98년부터 맡아온 장애인복지체육회회장과 96년부터 맡은 IOC위원직 이외 다른 직함은 없다. 그의 입장은 ‘외부의 어떤 영입제의도 거절한다’는 것이다. 한국 재계의 거물들이 모두 나서 전경련을 맡아달라고 2년째 머리를 조아렸지만 그가 완강히 거절해온 터다. 그렇다고 그가 한국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비중에 비춰 이같은 제안들을 모두 거절만 하고 있을 순 없는 일이다. 때문에 일각에선 그가 계열사 이사직을 떠나 새로운 일을 맡지 않을까하는 전망도 하고 있다. 물론 이는 호사가들의 근거없는 예상일 뿐이다.
김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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