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노 골리앗’ ‘후지산’ 밟고 정상 등극
‘테크노 골리앗’ ‘후지산’ 밟고 정상 등극
  • 정소현 
  • 입력 2005-04-04 09:00
  • 승인 2005.04.0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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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19일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25)의 테크노 댄스가 펼쳐졌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최홍만의 트레이드마크 세리머니. 하지만 그의 세리머니 장소는 씨름판이 아닌 사각 링이었다. 돌연 일본 종합격투기 K-1 진출을 선언한 뒤 처음 갖는 데뷔전(‘2005 K-1 월드그랑프리 서울대회’)에서 최홍만은 당당히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누구도 우승을 기대하지 못했던 탓에 그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결승전 연장끝에 승리 판정이 나오자 두팔을 번쩍 들고 포효했다. 그리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어쩌면 그 눈물은 씨름판의 천하장사에서 사각 링의 파이터가 되기까지 그간의 마음고생을 대변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부모님은 1m60㎝… 난 돌연변이?그는 스스로를 ‘돌연변이’라고 부른다. 아버지가 1m60㎝, 어머니가 1m62㎝, 두살 위인 형이 1m70㎝인 집안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가 씨름선수가 된 건 우연이었다. 고향인 북제주군 한림읍의 한림중 졸업을 앞둔 1997년 어느날. 교내 씨름 서클 멤버였던 그는 마침 협재해수욕장에 훈련하러 온 동아대 씨름부와 친선 축구경기를 했다. 지역 씨름동호회원들과 팀을 만들어 골키퍼를 맡았다. 그때 동아대 씨름부와 동행한 부산 경원고 씨름부 조태호 감독의 눈에 띄었다.당시 키는 1m80㎝에 불과했지만 손발이 유난히 크고 순발력이 좋아 씨름에 제격이라고 판단한 조감독은 그를 경원고로 스카우트했다. 사실 최홍만은 원래 운동선수가 될 생각이 없었다. 기계 만지는 걸 좋아해 엔지니어를 꿈꿨다.

하지만 조감독의 추천이 워낙 강력했다. 민속 씨름을 좋아했던 아버지(최한명·55)도 흔쾌히 찬성해 결국 모래판에 뛰어들게 됐다. 고교시절 3년은 그를 골리앗으로 만들었다. 한창 클 나이에 실컷 먹고 실컷 뛰는 씨름선수 생활을 하면서 1년에 꼭 10㎝씩이나 컸다. 졸업식 땐 2m10㎝가 됐다. 그후에도 8㎝가 더 자랐다. 천부적인 신체조건은 때로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너무 큰 키 때문에 맞는 침대도, 기성복도, 신발도 없어 특별 주문을 해야 했다. 흡사 항공모함 같은 370㎜의 신발, 5XL의 티셔츠. 속옷은 일본 스모 선수용만 입는다. 방에 들어서면 머리가 천장에 닿아 수그려야 하고 택시를 탈 때에도 큰 차종만 골라 타야 했다.

나를 스타로 만들어준 모래판

그러나 2m18㎝, 166㎏의 거대한 체격조건은 그를 ‘씨름판 데뷔 첫해 천하장사 등극’이라는 영광을 가져다주는 결정적 무기가 된다. 비록 거대한 체구 때문에 순발력이 부족하고, 뒤늦게 운동을 시작해 여타 선수보다 기초체력이 처져 감독의 꾸지람을 듣기 일쑤였지만 타고난 승부근성은 그 빈틈을 꼼꼼히 채워나가기에 충분했다.최홍만은 프로 입단 1년만에 씨름판 정상(2003년 천하장사)을 차지하며 최장신 씨름꾼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김영현을 또 다시 꺾고 설날장사의 주인공이 됐다. 2003년도에 김영현을 이겨 41대 천하장사에 오른 게 운이 아니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를 튀게 하는 또 다른 매력은 뛰어난 ‘스타’ 기질. 패션 감각에 말재주까지 좋아 주변 사람들을 항상 즐겁게 한다. 항상 머리칼을 화려하게 염색하는 이유를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어차피 너무 커 사람들 눈에 띄는 것, 아예 확 튀어보자는 생각이죠.”어떨 땐 회색, 어떨 땐 금색. 액세서리도 좋아해 팔찌·귀고리·목걸이는 늘 하고 다닌다. 최홍만은 춤도 무척 즐긴다. 씨름판에서 이기면 선보이는 테크노 댄스는 이미 그의 트레이드마크 세리머니가 됐을 정도다. 그가 씨름판의 돌풍을 일으키는 주역으로 떠오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좌절 그리고 새로운 도전

하지만 최고의 자리에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세상은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소속팀 LG투자증권 씨름단이 해체 위기에 놓인 것이다. 씨름단 전원이 단식농성을 강행하며 대책마련에 나섰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민속 스포츠라곤 하지만 팬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에서 씨름단을 인수할 기업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유명 프로야구 선수의 연봉이 몇 십억을 호가하는 상황은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사업실패로 상처를 겪은 아버지를 마냥 바라보고 있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돈과 명예, 화려함까지 누릴 수 있는 K-1 진출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의 K-1진출 성공 가능성을 놓고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씨름선수가 지닌 강한 하체와 체중 그리고 최홍만의 키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손과 발을 사용하는 입식 타격식 격투기인 K-1의 특성상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일반적인 여론. 특히 수년간 샅바를 잡고 밀고 당기는 씨름기술에 익숙한 그가 K-1의 다양한 기술에 적응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본인 스스로의 의지였다.

아직은 젊은 나이,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최홍만은 당시 심경을 “미치는 줄 알았다”고 표현했다. 그는 씨름판을 등지고 돈만 찾아 떠난다는 수많은 비난의 소리가 너무도 괴로웠다고 말한다. 어떨 때는 잠도 못자고 멀뚱히 천장만 바라보다 밤을 새운 적도 많았다고 덧붙였다. 이젠 파이터라 불러다오!K-1 진출을 발표하고 굳은 결의로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지 거의 석 달.최홍만은 스파링 파트너 겸 트레이너인 니콜라스 페타스를 통해 기본적인 격투기 기술과 실전 스파링을 익혔다. “하루 8시간 이상씩 훈련했어요. 지옥훈련이었죠. 어휴~ 그때 생각하면 정말 끔찍해요. 배는 고파 죽겠는데, 체중 관리 때문에 맘껏 먹지도 못하고…. 이 거구가 매일 그렇게 지냈다고 생각해보세요. 워낙 낙천적인 성격인데도 타지에서의 생활은 외로움 그 자체였어요. 엄마 아빠도 보고 싶고… 혼자 몰래 울었던 적도 있는걸요….”그리고 3월 19일 결전의 날, 최홍만은 자신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진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다.

태국의 무에타이 달인 카오클라이 카엔노르싱(22)과 연장전까지 접전을 벌이며 판정승을 거둔 것. 카오클라이는 지난해 서울대회 챔피언인데다 ‘2004 K-1월드그랑프리’ 파이널 4강에 오르며 K-1의 새롭게 떠오른 강자라 의미가 크다. 특히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또 일본에서 눈물겨운 연습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던 설움을 생각하면 이번 데뷔전 우승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했다. 천하장사에 등극했을 때와 어떤 순간이 더 좋았을까? 물론 최홍만은 이 질문에 대해 “노코멘트”를 일관했다. “만약에 졌다면? 정말 한국 떠나려고 했었어요. 링에도 서지 않고, 도망 가려고 했었죠. 큰 소리 쳐놨는데 지면 창피해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요? 오죽하면 질까봐 제주도에 계신 부모님도 경기장에 오지 말라고 했을 정도였겠어요. 물론 이젠 그럴 걱정 없으니 다행이죠.(웃음)” 최홍만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훈련기간 3개월에 비해 큰 결실을 맺긴 했지만 더 세고, 더 강한 상대를 맞이하려면 좀더 준비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일단 합격점을 받긴 했지만 갈길이 너무 멀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홍만은 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지 않겠다고 했다. 씨름판을 떠나오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것들… “반드시 성공하겠노라”는 각오 또한 깊이 되새기고 또 되새기겠다고 했다.

정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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