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회장의 脈을 잇는 현대가의 적장자
정주영 회장의 脈을 잇는 현대가의 적장자
  • 정혜연 
  • 입력 2005-03-11 09:00
  • 승인 2005.03.1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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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1년 3월 25일 오전 8시. 종로 청운동 자택을 나선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영정은 서서히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선영으로 향했다. 장례행렬이 내려오는 청운동 자택 골목길 700여m에는 고인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키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과 현대그룹 임직원들이 정주영 회장의 영정 앞에서 고개 숙여 예의를 표했으며 손수건으로 젖은 눈가를 훔치거나 흐느끼는 시민들도 눈에 띄었다.

이렇게 우리나라 재계의 큰 별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마지막 가시는 길은 간소하게 치른다는 원칙에 따라 노제도 지내지 않은 채 조용하게 치러지고 있었지만, 이날 정 명예회장의 영정을 든 채 유독 침울한 표정으로 장례행렬의 맨 앞에 선 삼십대 초반의 한 젊은이에게 집중된 세인의 이목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그 젊은이는 바로 정주영 명예회장의 장손이자 현대·기아자동차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인 정의선씨. 평소 언론에 자주 소개되지 않아 낯익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정 명예회장의 영정을 들고 있는 그가 현대가의 장자임을 예측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성급한 사람들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영정을 모시고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청운동 자택을 나서는 정의선씨의 모습에서 현대그룹의 미래를 조심스럽게 찾아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명예회장님의 영정을 들고 나오면서 큰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장자로서 사명감이라고나 할까요? 할아버님이 일궈놓으신 집안을 잘 이끌어 가려면 내가 아버님을 더욱 잘 모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할머님께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할아버지가 평생 기업을 일구시느라고 바쁜 관계로 할머님은 적적한 시간을 보내시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사실 일에도 성공하고 집안 일에도 완벽하기는 힘든 일이지요. 아버님인 정몽구 회장님이 워낙 효자이시긴 하지만 나도 장손으로서 할머님을 더욱 잘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잠시 그때를 생각하는 듯 멀리 창 밖을 바라보다 무겁게 입을 연 정의선 사장. 그는 자신이 현대가의 장자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또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대단한 듯 보였다.

장자로서의 책임감 진 30대 젊은이

정의선 사장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인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이지만 정 명예회장의 큰아들인 몽필씨가 슬하에 딸만 둘을 남기고 작고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주영 가의 장손이 되었다. 특히 현대그룹의 모기업인 현대건설이 매각되고, 현대그룹이 해체되는 등 혼란스런 상황에서 현대정신의 맥을 잇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차기 경영인으로 거론되는 정의선 사장의 부각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전의 정주영 명예회장은 자신의 손자들에게 대단히 엄격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예를 들어 손자나 손녀를 안아준다거나, 특정의 손자들에게 애정을 보이는 태도를 삼갔다는 것.

이는 어느 한 손자를 편애한다는 주변의 오해를 사전에 막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교적 전통과 보수적 가문의 풍토를 중요시한 정 명예회장의 장손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을 것이란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정 사장은 아직도 고 정 명예회장에 대한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할아버지와 함께 찾았던 강릉. 테니스도 하고 산에 함께 오르면서 보았던 고정 명예회장의 일거수 일투족은 하나하나 기억 속에 소중히 입력시킨 듯 아직도 생생하다고. 하지만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평소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입으로 나열하기보다는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부친과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그런 할아버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정 사장은 고 정 명예회장을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면서 정 명예회장의 기업인으로서의 장점을 하나하나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할아버지의 용인술 복제하고 싶어

정 사장이 얘기하는 할아버지의 장점은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소탈하고 검소한 점. 그리고 과감한 추진력을 성공으로 연결하는 치밀한 계획성이다. 기업의 오너로서 때로는 엄한 상사로, 그리고 때로는 자상한 형님처럼 솔직하고 진실되게 임직원들을 대하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용인술은 정 사장이 하루 빨리 복제하고 싶은 부분이라고. 이처럼 정 사장은 부단히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이어져 오는 오너로서의 능력을 습득하기 위해서 요즘도 다방면으로 많이 생각하고 노력하고 있다.국내 최고의 기업을 일군 오너로서, 그리고 1970년대 경제성장의 주역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재계의 거인’으로 존경받았던 고 정주영 명예회장도 인간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할아버지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과묵하고 엄한 표정 속에 숨어있는 손자 사랑의 마음을 눈치 채는 특별한 재주가 그에게 있었던 것일까. 정의선 사장에게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할아버지로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인물이면서, 기업인으로서는 그가 반드시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산일 수도 있을 듯 싶다.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손자로서 현재 일선에 나선 현대가의 경영 3세대는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인 정의선 사장과 정몽근 회장의 장남인 정지선 현대백화점 부회장, 작고한 정몽우 씨의 장남인 정일선 비앤지스틸 사장 등을 꼽을 수 있다.

1999년 3월 1일 정몽구 회장 체제가 정식 출범한 후, 꾸준한 연구개발을 통한 품질 개선과 미국·중국 등 해외 생산거점 확보, 그리고 월드컵 마케팅을 비롯한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바탕으로 현대자동차는 ‘2010년 세계 5대 메이커 진입’이라는 장기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그리고 하나하나 그 디딤돌을 마련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정의선 사장의 입지는 더욱 무게를 얻어가고 있다. 특히 정몽구 회장의 대를 이어 현대차그룹을 이끌 후계자로 주목을 받고 있는 정 사장은 사실상 현대차그룹의 모든 일에 관여하고 있고, 행보 역시 올해에는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1970년 생인 정의선 사장은 97년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이어 99년 12월 현대자동차 구매 담당 이사로 입사해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구매총괄본부를 거쳐 2001년 3월 상무로 승진하면서 기획과 마케팅을 담당했고, 2002년 3월 현대자동차 전무와 현대카드 전무(등기이사 선임)로 승진했으며 2003년 1월 부사장으로 승진, 현재 현대·기아자동차 기획총괄본부 부본부장, 정보기술센터 부센터장과 기아자동차 기획실장직을 맡고 있다. 특히 현대카드 업무도 겸함으로써 재무·금융 분야의 경험을 쌓는 등 전문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쌓았다. 2005년 2월 기아차 사장으로 승진해 현대기아차그룹의 차세대를 향한 진군에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정의선 사장은 IT세대를 대표하는 경영인으로 꼽힌다. IT 사업의 확장 외에도 전국의 사업장을 돌며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마음을 활짝 열어 이루어낸 인적 네트워크에서 전달되는 다양한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 그의 컴퓨터에 집계된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그는 회사의 현업은 물론 주변의 환경을 파악하고, 향후 활로를 모색하는 것이다.

남의 얘기 듣기 좋아하는 조용한 성품

그는 조용하지만 광범위하고, 드러나지 않지만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그의 영역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정몽구 회장은 정 사장에 대한 주위의 평가에 대해 대단히 민감한 것으로 알려진다. 사옥 주변의 조경까지 조언할 정도로 꼼꼼한 성격의 정 회장이기에 자기 아들에 대한 관심이야 익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의 이런 뜻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특히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일구고, 정몽구 회장이 크게 꽃피운 현대자동차의 미래를 꾸려감에 있어 정 사장은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므로 매사에 더욱 신중하고 큰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사실 이러한 경영 3세대의 전면 부각은 현대가뿐만 아니라 삼성, LG, SK, 코오롱 등 대부분 국내 대기업에서 볼 수 있는 일이 됐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과거 경영 1세대에서 2세대로 이어지듯 시간의 흐름이 낳은 자연스런 현상으로, 한 기업의 생사와도 연관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전환기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 사장은 학창시절에도 조용한 학생이었다. 남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남의 이야기 듣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었다. 때문에 일찍부터 그는 유복한 자신의 환경을 과시하기보다는 자신보다 힘든 친구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아량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었다. 당시 정 사장이 다니던 오산중학교는 한 반 60명 중에 약 30명이 생활보호대상자일 정도로 그의 주위에는 환경이 어려운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는 양친이 안 계시고,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운 학생도 있었는데, 이를 보다 못한 정 사장은 그 친구와 자신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부전자전이라고 할까? 그런 면에서 정의선 사장의 이런 마음 씀씀이를 익히 알고 있던 정몽구 회장은 그의 큰 후원자였다.

그때 정 사장의 집에서 함께 먹고 자며 학교를 다니던 그 친구는 현재 미국에서 크게 성공해서 자리를 잡았는데, 요즘도 서로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다.이처럼 어려서부터 폭넓은 교우관계를 유지한 덕에 지금도 그의 주변에는 친한 친구들이 많이 있다. 삼성의 이재용 상무와 코오롱의 이웅렬 회장 등 함께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오너 3세들로부터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생활하고 있는 동창들에 이르기까지 그에겐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친구, 선후배가 없다. 바빠서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짬이 날 때마다 전화로라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관심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친구로서, 인생의 동반자로서 이들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정의선 사장의 고등학교 시절 짝이었던 SK텔레콤 조현철 과장이 권하는 학창시절의 정의선 사장모습. “정의선 사장은 휘문고 재학시절 다방면에 걸쳐 재주가 많은 친구였습니다. 공부도 잘 했지만 테니스, 수영, 스키 등 갖가지 운동에도 소질이 있었으며 특히 클라리넷을 잘 불었어요. 그래서 교내 음악서클과 합주도 몇번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간에 의리도 강하고, 리더십이 뛰어나 주위에 늘 친구가 많은 편이었어요. 저도 정 사장의 집에서 시험공부도 하고, 농구도 하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친구 여동생이었던 부인에 대한 애정각별

하지만 정의선 사장이 그 누구보다 소중하게 아끼는 사람은 바로 그의 부인인 정지선 씨다. 친구의 사촌 여동생이었던 부인은 정 사장이 어렸을 때부터 보고 지내던 사이. 고등학교 때도 서로의 안부 정도는 알고 지냈을 정도로 오랜 시간 그가 곁에 두고 지켜보던 동생이었다. 그러던 중 미국 유학시절 정 사장이 먼저 연락해서 본격적으로 만나게 됐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정 사장과 정지선씨였지만 둘 사이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바로 같은 성씨라는 것.

결국 정 사장은 이러한 문제가 좀 걸리긴 했지만 할아버지인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지선씨를 인사시켰고, 지선씨를 찬찬히 살펴보던 고 정 명예회장은 하동정씨(정의선 부사장)와 김포정씨(정지선씨)는 혼사를 가져도 괜찮다며 쾌히 승낙했다.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지선씨의 집에 전화를 걸어 일주일 후 약혼 날짜를 받아내는 대단한 추진력을 보여주었다. 고 정 명예회장이 평소 몸소 실천하던 강한 추진력이 장손의 결혼날짜를 받아내는 데도 십분 발휘된 것이다.

정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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