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린 아이언 샷과 퍼팅 감각
지난달 29일 대회가 열렸던 제주도 중문 골프장. 최종라운드 마지막 샷을 남겨둔 박지은의 모습에 8,000여 갤러리의 시선이 집중됐다. 마지막 18번홀(파5). 핀 1.2m 지점에 공을 떨군 박지은의 표정은 흡족해 보였다.17번 홀까지 6타나 줄이며 합계 15언더파를 기록하고 있던 박지은으로선 사실상 우승을 확정했다는 뜻이기도 했다.앞 조에서 맹추격을 펼치던 애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이 이미 5언더파를 보태 합계 11언더파의 공동2위로 홀아웃한 상황이었기 때문. 강수연과 골든이 나란히 파 세이브로 홀아웃한 뒤 맞은 박지은의 마지막 퍼팅. 미끄러지듯 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스탠드를 꽉 메운 갤러리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합계 16언더파. 박지은이 시즌 2승을 확정짓는 순간이었다.
또 진정한 세계 톱랭커가 됐음을 의미하는 우승이기도 했다.그간의 부진을 털어내고 고국에서 승리를 맞이한 박지은은 세상 누구보다 환한 웃음을 선보이며 기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날 승리는 신들린 아이언 샷과 퍼팅이었다. 첫 홀에서 핀을 크게 오버해 3퍼트로 보기를 범해 불안하게 출발했으나 이후 17개 홀에서 무려 8개의 버디를 낚는 무결점 샷을 선보였다. 특히 매 아이언 샷이 핀 2~3m에 적중할 정도로 빼어났다. 그의 장기인 드라이브 샷의 장타력도 최고 수준이었다는 평. “선수생활을 하면서 오늘처럼 샷 감각이 좋았던 적은 없었어요. 프로암대회에서 홀인원을 기록했던 것이 승리의 신호였던 걸까요?(웃음) 소렌스탐이나 (안)시현이가 추격해오는 것을 알았지만 전혀 불안해하지 않았죠. 단지 한샷 한샷 집중해서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아마 생애 최고의 경기로 기억될 것 같아요.(웃음)”
부지런한 노력파
강남에서 유명 갈비집을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의 딸로 초등학교 6학년 때 미국으로 골프 유학을 떠났던 박지은은 아버지의 아낌없는 지원 속에 미국필드를 누볐다. 1992년 주니어 경기 출전을 시작으로 1994년부터 1997년까지 미국 주니어랭킹 1위를 차지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특히 1995년에는 US여자오픈골프선수권대회에 최연소(16세)로 출전하여 63위에 올랐고, 1996년 11개 대회에서 연속하여 우승하면서 미국주니어골프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선수’가 됐다. 박세리와 함께 또 한명의 예비 월드스타로 주목받았던 박지은. 물론, 자존심 강한 그는 프로에서도 화려한 성공을 자신했다.
그러나, 박지은의 행운은 여기까지였다. 상황은 역전되고 만다. LPGA무대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프로데뷔이후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고, 미국 전역을 떠도는 고된 투어생활의 외로움과 팽팽한 긴장감은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던 박지은의 눈물을 뿌리게 만들었다.더구나, 김미현이라는 또 다른 한국선수가 혜성처럼 등장하면서 박지은은 점점 더 관심권 밖으로 멀어졌다.박세리와 김미현이 모두 어려운 집안사정을 극복하고 스타가 됐다는 점도 박지은에겐 부담이었다. 결국 이들과 비교당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주위의 수군거림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럴수록 연습에 매진해 정상을 차지하는 것만이 길이라고 생각했다. 비거리를 늘리기 위해 야구 방망이를 매일 휘둘러 가며 연습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젠 지독한 승부근성과 연습 덕에 ‘장타’ 하나 만큼은 어느 선수 부럽지 않다. 1m67cm 키에 55kg. 다소 작은 체구지만 드라이버 샷을 캐리로만 250야드 이상 날린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피닉스에서 열린 스탠더드 레지스터 핑 토너먼트 드라이버 장타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한 것도 놀랄만한 일화중 하나다.
당시 대회는 로라 데이비스 등의 유명 선수들도 참가한 경기. 결과는 로라 데이비스에 이어 2위. 그러나 놀랍게도 박지은은 300야드나 되는 거리를 기록했다. 당시 박지은의 나이는 17세였다. 그로부터 3년 후 박지은 선수는 US 여자오픈에 참가, 데이비스에 버금가는 장타력을 소유한 투어프로로 자리 잡았다. 평균 비거리 263.4 야드라는 대회기간중의 공식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당시, 차 순위의 장타자와는 무려 9야드의 거리격차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박지은의 한 측근은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지만 성실하고 근면한 아이”라며 “어떠한 경우에도 교만하지 않고 승부만을 생각하는 성격이다. 슬럼프에 빠졌을 때도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고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졌던 것이 결국 위기를 극복하고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 같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징크스는 없다!”
박지은에게 이번 우승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그동안 발목을 잡아왔던 몇 가지 ‘징크스’를 단박에 날려버렸기 때문. 2000년에 프로로 데뷔한 박지은은 데뷔 시즌 어렵지 않게 첫승을 신고했지만 이후 매 시즌 1승밖에 거두지 못하는 징크스를 이어갔다. 지난해 ‘톱10’에 19번이나 진입하며 절정의 감각을 보였지만 더 이상의 우승 운은 따르지 않았다. 장타와 공격적인 플레이로 ‘메이저 우승후보’로 꼽혔지만 지난 네 시즌 동안 인연이 없었다. 특히 시즌 2승과 메이저 첫승의 기회를 노렸던 지난해 맥도널드LPGA챔피언십에서는 ‘여제’애니카 소렌스탐에게 연장전에서 무너졌다.지난 4월 나비스코챔피언십 우승 이후엔 6개월 동안 6번이나 2위를 기록하며 ‘준우승 징크스’에도 시달려야 했다.
매번 뒷심부족으로 우승기회를 내주곤 했던 박지은이었다. 미국 아마추어 무대를 휩쓸었던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소렌스탐과 박세리보다 늘 한수 아래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동안 ‘준우승 단골’이라는 불명예 때문에 마음앓이를 한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번 대회를 계기로 스트레스를 훌훌 털어버릴 수 있게 됐어요. 특히 고국에서 우승과 시즌 2승을 동시에 기록해 더욱 뜻 깊죠. 믿고 응원해 준 많은 팬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박지은은 2주전 삼성월드챔피언십에서 뼈아픈 역전패를 안겼던 소렌스탐을 꺾고 시즌 2승을 거뒀다는 점에서 이제는 얼마든지 승수를 쌓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동안 우승과 인연이 없었던 불운을 고국 무대에서 털어낼 수 있었던 것도 그에겐 너무나 큰 기쁨이다. 박지은은 이번 대회를 계기로 골프뿐만이 아닌 전 국민의 ‘히로인’이 됐다. 각종 포털인터넷 사이트에서 인기 검색어 1위를 기록했고, 그의 팬 카페는 가입자가 폭주하는 등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급작스런 인기에 대해 당황해하는 분위기. “조금 얼떨떨하네요. 1등이란 게 이래서 좋은건가봐요. 2등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거든요. 물론 저처럼 2등을 자주하면 모를까(웃음). 이젠 징크스 같은 거 절대 없을 거예요. 적어도 5승까지는 해야죠.(웃음) 이제 시작인걸요!”
정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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