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진검승부 … 최후의 승자는
치열한 진검승부 … 최후의 승자는
  • 홍성철 
  • 입력 2004-10-25 09:00
  • 승인 2004.10.25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대선이 보름여 앞으로 다가왔다. 선거일(11월2일)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조지 부시 대통령과 존 케리 민주당 대통령 후보간의 지지율은 여전히 오차범위내에서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다. 이런 추세가 지속될 경우 이번 대선은 지난 2000년 대선때보다도 더 박빙의 승부가 연출될 것이란 게 현지 언론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부시 대통령은 TV 토론에서는 졌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빙의 우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나 당락을 결정할 선거인단수에서는 여전히 혼전에 혼전을 거듭하고 있는 분위기다. 초박빙의 승부를 펼치고 있는 미국 대선을 보름여 남겨둔 시점에서 부시와 케리 두 후보가 걸어온 정치경력 및 인생역정을 점검해 봤다.

조지 W. 부시

조지 W. 부시는 잘 알려진대로 현직 미국 대통령(제43대)이다. 부시는 미국내 명문가 후손으로 코네티컷주 뉴헤이번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미국 제41대 대통령을 지낸 조시 부시(George Bush)와 바바라 부시다.부시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석유사업을 하던 텍사스주 미들랜드에서 성장했다. 아버지의 출신교인 매사추세츠주의 명문 필립앤더버 학교를 나온 후 예일대학교에 진학했다. 68년 졸업 후에는 텍사스주 공군 방위군에 입대, 중위로 제대한 후 75년 하버드대학교에서 MBA(경영관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사업에서도 부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석유 사업 분야에 손을 댔다.

미들랜드로 돌아간 부시는 석유와 가스 탐색을 주업무로 하는 ‘부시 탐색회사’를 설립했던 것. 사업이 한창 바쁘게 돌아가던 중 연방의회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공화당 후보인 켄트 핸스(Kent Hance)에게 6%의 표차로 패배했다.선거 패배후 부시는 다시 사업에 매진했지만 80년대 초 석유값 하락으로 그의 탐색회사는 경영난에 허덕이게 된다. 하지만 부시는 사업 수완을 발휘, 회사를 스펙트럼사와 합병한 후 회사에 상당한 이익을 남기고 매각한다.부시가 다시 정치권에 뛰어든 것은 80년대 중반. 86년 대통령 후보로 나선 아버지의 든든한 참모로 또 연설 초안자로 대선에 참가한 것.

이후 그는 아버지의 가장 충실하고 유능한 참모역을 수행했다.대선 참여로 정치 감각을 익힌 부시는 93년 텍사스 주지사 선거에 출마, 민주당 후보인 앤 리처즈(Ann W. Richards)를 35만표 차로 누르고 당선된다. 주지사 시절 그는 유능하고 인기 있는 정치인으로 거듭났고, 민주당 의원이 우세했던 주 의회와도 원활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97년 텍사스주의 세법을 재조정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함으로써 공화당은 물론 진보주의자들의 반감을 사기에 이른다. 결국 그의 법안은 의회에서 부결됐고, 그에게 적지않은 시련을 안겨줬다. 부시는 이러한 시련을 딛고 이듬해(98년) 11월에 치러진 주지사 선거에서 다시 승리함으로써 텍사스주 최초의 재선 주지사에 등극한다.

재선 주지사로 정치적 입지를 다진 부시는 99년 6월 공식적으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것을 선언한다. 당시 존 맥케인 상원의원이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했으나 부시는 2000년 3월 소위 ‘수퍼 화요일’의 승리를 계기로 공화당 후보에 지명됐고, 11월 치러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인 앨 고어를 누르고 제43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아버지 조지 부시에 이어 부시의 대통령 당선은 미국의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와 제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에 이은 미국 역사상 두 번째 부자(父子) 대통령이라는 또 하나의 진기록을 남겼다.

존 F. 케리 후보

부시 대통령과 맞붙는 민주당 후보는 존 F. 케리 상원의원. 국내에서는 현직 대통령인 부시에 비해 케리의 인지도가 다소 떨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하지만 케리 후보 역시 부시 못지 않은 명문가 후손에 다양한 정치 경험을 쌓아왔다. 케리는 자신의 정치적 고향을 매사추세츠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가 태어난 곳은 미국 콜로라도 덴버다. 유년시절 유럽과 미국의 12개 도시를 옮겨 다니며 자랐기 때문에, 매사추세츠에 거주한 기간은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는다. 소년 시절 그는 집을 떠나 스위스나 미국 뉴잉글랜드의 기숙학교에서 7년을 보냈다.

상류층 자제들만 입학할 수 있는 귀족적인 사립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젊은 신사로 성장한다. 고교 졸업후에는 부시와 같은 예일대학에 진학, 학내 엘리트 비밀결사단체인 해골단에 가입해 서클활동을 경험하기도 했다. 청년 시절 재클린 케네디의 이복 여동생과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고, 나라간셋 만에서 자신의 우상이자 영웅이었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직접 모는 요트를 함께 타기도 했다. 케리는 잘 알려진대로 장교로 입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경험도 있다. 그는 베트남전 참전으로 최고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지만 절친한 친구들이 전장에서 전사하고 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한 미국의 폭격을 목격한 것을 계기로 반전운동가로 변신한다.

미군의 잔학행위를 고발하는 등 케리의 적극적인 반전 활동은 그를 전국적 인물로 부상시키는 동력이 됐다.케리는 주로 외교안보와 경제, 환경분과 위원회 등에서 상원의원 활동을 했다. 특히 전문 분야인 외교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 의정생활 20여년을 주로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초선의원 시절에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을 궁지에 몰아 넣으며 미국 정계를 발칵 뒤집은 이른바 ‘이란 콘트라 사건’을 파헤친 주역으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케리는 또 민주당 주류계보를 잇는 진보 정치인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는 의정활동을 하며 군비 확장에 반대표를 던진 군비 축소론자였고, 공기와 수질 보호, 지구 온난화 등을 촉구한 대표적인 친환경 정치인이다. 또 미국 자본주의 체제에서 소외된 여성, 유색인종, 빈민,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안 마련에도 적극적이었다.

케리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낙태권을 옹호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케리의 이러한 성향을 가리켜 중도 좌파라고 표현하기도 했다.케리는 자신의 육체적 한계에 도전하는 모험적인 인물로도 유명하다. 60살의 나이에 호리호리한 체격이지만 지금도 윈드서핑, 비행기 조종, 오토바이 질주 등 위험한 스포츠를 즐기고 있다. 케리는 또 재혼한 부인 테레사 하인즈 케리가 미국의 격주간지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 400대 갑부 명단’에 올라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테레사 여사는 케리와 재혼하기 전 사별한 전 남편인 ‘케첩 재벌’ 하인즈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아 총 7억5,000만달러의 재산(389위)을 보유한 것으로 포브스는 지난 9월 발표했다.케리가 부시와 박빙의 승부를 펼치고 있는 배경에는 테레사 여사의 물적·정신적 내조가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란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홍성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