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황태자 ‘다시 감옥으로’
비운의 황태자 ‘다시 감옥으로’
  • 홍성철 
  • 입력 2004-09-21 09:00
  • 승인 2004.09.2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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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부 시절 ‘소(小)통령’으로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남용했던 김영삼(YS) 전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또다시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지난 97년 기업체 등으로부터 60여억원을 받고 세금 10억여원을 포탈한 혐의로 구속, 5개월여의 옥살이를 한 이후 7년여 만이다.조동만 전 한솔그룹 부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20억원)한 혐의로 검찰에 소환된 현철씨는 10일 밤 자해소동을 벌이며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에 반발했지만 법원은 다음날(11일) 영장을 발부했다. 현철씨는 지난 4·13 총선때 무소속으로 출마, 정치 재기를 노렸지만 결국 중도하차했다. 또 지난 6월에는 고객관계관리(CRM) 전문기업인 ㈜코헤드를 설립해 벤처사업가로 왕성한 활동을 벌여왔지만 또다시 조동만 게이트에 연루된 혐의로 구속되는 불운을 맞이하게 됐다.

‘소통령’과 ‘황태자’. 문민정부 시절 현철씨를 지칭했던 수식어다. 아버지인 YS를 대신해 국정을 좌지우지했을 정도로 그는 당시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했다.현철씨가 정치권에 첫 발을 내디딘 시기는 지난 87년 대선 때. 증권회사를 다니던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현철씨는 87년 대선을 한달여 남겨둔 11월에 직장생활을 접고 YS 선거캠프로 뛰어 들었다. 막상 선거판에 뛰어들긴 했지만 그에게는 특별히 주어진 일도 없었고, 그가 아니면 당장 안 되는 일 또한 없었다. 스스로 일거리를 찾아서 해야 할 처지였다.결국 현철씨는 중앙조사연구소라는 여론조사기관을 만들어 부친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전국 방방곡곡을 그때처럼 정신없이 누빈 적도 없었다”고 현철씨는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

87년 대선은 민주화 세력들의 염원이었던 김영삼-김대중 후보간의 후보단일화가 깨지면서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하지만 현철씨는 다음 대선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한국 민주화 경로에 대한 다양한 책들을 읽으면서 나름대로의 논리와 사고를 키워갔다. 이 과정에서 현철씨는 민주화의 도정에서 관리 능력, 특히 일시적 혼란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관리 능력의 유무야말로 민주화가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에 있어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또한 ‘역사적 대타협(historical compromise)’에 대해 읽으면서는 “역사적 대타협을 통한 여러 사회 정치 세력들의 연합이야말로 민주화로 가는 과도기에 있어 어떤 면에서는 가장 일반적이고도 가능한 방법”이라는 타협의 정치적,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도 했다.현철씨의 이러한 민주화 공부와 논리 정립은 92년 대선을 앞두고 단행된 3당 합당의 이론적 근거로 작용했다.

현철씨는 당시 노태우 정권으로부터 3당 합당을 제의 받은 YS에게 역사적 타협의 논리를 설파했고, 결과론이지만 YS는 3당 합당을 통해 92년 대선에서 승리했다.현철씨도 92년 대선 과정에서 사조직을 총괄하는 사령탑을 맡아 자신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 대선 승리의 일등공신이 됐다. 집권에 성공한 YS는 현철씨를 자식이기에 앞서 훌륭한 참모로 활용했다. 공식 라인 보다 현철씨를 통해 올라온 보고를 더 신뢰했고, 내각을 비롯한 요직 인사 문제도 현철씨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현철씨가 문민정부 시절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던 정황들이다.하지만 ‘절대권력은 절대 망한다’는 정치 속설을 입증하듯 현철씨 또한 자신이 행사했던 권력의 부메랑으로 좌초되는 신세가 된다. 한보 사건과 메디슨 특혜 의혹 등 각종 대형 비리사건에 현철씨의 이름이 오르내렸고, 결국 97년 한보게이트가 터지면서 그는 몰락했다.

97년 5월 특가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실형(2년)을 선고 받은 현철씨는 이후 5개월간의 옥고를 치른뒤 보석으로 풀려났다. 당시 현철씨의 구속및 실형은 현직 대통령 아들에 대한 초유의 사법처리라는 오명으로 기록되기도 했다.보석으로 풀려난 후에도 억울함을 강변했던 현철씨는 이후 사면·복권으로 피선거권이 회복되자 호시탐탐 정치재기를 노렸다. 지난 2002년 8·8 재보선 때 마산합포 지역 출마를 준비했으나 시민단체 등의 거센 반발로 무산됐고, 지난 4·15 총선 때는 고향인 거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결국 중도에 사퇴하고 말았다.그렇다고 마냥 주저 앉을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 였을까. 그는 정치 재기 실패라는 좌절을 딛고 지난 6월 기업 마케팅을 지원하는 고객관계관리 전문기업 코헤드를 설립, 벤처사업가로 변신을 시도했다.

현철씨가 사업가로 변신하자 정치권 일각에서는 그가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하지만 현철씨는 사업가 변신과 관련해 “정치권에서 쌓은 유권자 조사 등과 관련된 노하우를 기업 마케팅 지원업무와 접목시켜 비용을 절감시킬 수 있다는 판단하에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며 정치와 사업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정치권에서 배운 노하우를 사업과 연결시킨 것뿐인 만큼 사업가 변신과 자신의 정치 인생은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아니 어쩌면 제2의 정치 인생을 위한 정지작업으로 사업을 시작했을 것이란 분석도 적지 않았다. 정치와 돈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만큼 기회만 노리고 있을게 아니라 자금확보 차원에서 사업을 시작했을 것이란 관측. 이러한 관측에는 정치지향적인 현철씨의 야망과 재기의 꿈이 투영돼 있다.하지만 현철씨의 이러한 재기와 야망은 조동만 사건이 터지면서 와르르 무너질 위기에 처하게 됐다.현재 검찰이 현철씨에게 적용한 혐의는 정치자금법 위반. 검찰은 현철씨가 97년 수사 및 재판 당시 작성한 ‘재산권 양도각서’를 찾아냈다.

이 양도각서에는 ‘조씨에게 맡긴 70억원의 권리를 국가와 사회에 환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당시 공판조서에도 현철씨 돈으로 추정됐던 50억원은 사조직인 ‘나라사랑운동본부’의 활동잔금이라고 기재돼 있다. “조씨로부터 받은 20억원은 70억원에 대한 정당한 이자였다”고 해명하고 있는 현철씨 주장의 모순점과 자금의 불법성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인 셈이다.11일 전격 구석된 현철씨가 쉽게 풀려나지 못할 것이란 관측을 뒷받침하는 잣대이기도 하다. 97년 5월 비리 혐의로 구속, 같은해 11월 항소심에서 보석으로 풀려난 이후 7년여만에 또다시 영어의 몸이 된 현철씨. 그의 몰락은 단순한 개인적 비리 차원을 떠나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자 한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했던 ‘황태자’의 말로라는 점에서 씁쓸함을 더해주고 있다.

홍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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