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의원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정치에 뜻이 있어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하긴 했으나 졸업이 다가오자 막상 마땅히 갈만한 직장이 없었다”며 “당시 정외과 출신으로 시험에 응시할 만한 곳은 동아일보, 한국일보, 그리고 KBS 아나운서직 세 군데 정도였다”고 회상했다.김 의원은 “유학을 갈까도 생각해보고 농촌 부흥운동에 흥미를 느끼고 농대 대학원에 진학하려고도 생각했지만 집안이 기울어 유학은 입 밖에도 못 내고 농대 대학원도 3학년 학사편입을 해야 한다기에 억울해서 포기를 하고 말았다”며 “결국 택한 곳이 동아일보였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내 나이 40이 넘자 그동안 많았던 잡념이 없어지고 스무살 청년 때 가졌던 여러 가지 삶의 방향이 하나로 잡히는 것 같았다”고 회상하는 김 의원은 “어렸을 때부터 꿈꾸었던 정치, 그것도 큰 인물이 되어 큰 정치를 한번 해보고자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열정이 나이 40이 넘자 밖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며 “처음 정계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무소속으로 출마할 수 없다는 생각과 유신독재 말기였던 당시 상황 속에서 ‘유신헌법’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야당인 신민당의 공천을 받아 내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그 결과 신민당 정읍 공천을 따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그리고 첫 선거당시 상황에 대해 “나와 함께 출마한 사람은 당시 현역 국회의원이었던 장경순씨와 김택하씨였다”며 “돈이 많았던 그들과 비교해 총재산이 120만원 밖에 안됐지만 많은 사람들의 눈물겨운 애정 덕에 10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막 시작한 정치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두 가지 큰 교훈을 얻었다”는 김 의원은 “하나는 오해받는 짓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밝혔다.그리고 첫 번째 교훈의 배경으로 1979년에 일어난 YH 사건으로 발생한 김영삼 의원 제명안에 대한 김영삼 진영 쪽의 제명반대서명운동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을 들었다.김 의원은 “그 때 나는 그쪽이 옳다고 보고 내가 누구보다도 앞장을 서서 김영삼 총재를 지키는 쪽에 서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도장을 찍는 것은 안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반대했다”며 “김영삼 총재의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서명을 하라는 전화가 빗발쳤다.
그러나 나는 ‘도장을 찍으려면 처음부터 찍든지, 도장 찍는 행위가 옳지 않다고 했으면 끝까지 안 찍든지 해야지 지금 넘어가는 것은 투항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한 번 정한 입장에 대해서는 설사 불이익이 있더라도 고집스럽게 지켜내는 원칙이 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때 내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을 하지 않지만 당시 내 행동은 일반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살만했다고 생각한다”고 회고했다.이어 “두 번째 교훈은 일명 ‘백두진 파동’을 통해서 얻었다”는 김의원은 “이 때 이철승씨와 김영삼씨 간에 당권 경쟁이 벌어졌는데 백두진 씨를 두고 여론은 받아들이지 말라는 쪽으로 돌아갔다. 김영삼 씨는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는데 반해 이철승 씨는 애매한 입장을 보였다. 나는 이철승 씨에게 백두진 씨를 분명히 반대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당권이 위험하다고 충고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그 때부터 이철승 씨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그 뒤 나는 ‘역사란 이렇게 하나의 사건으로 큰 방향이 달라질 수 있구나. 민심을 따라야만 정치인의 생명은 유지되고, 민심을 등진 정치인은 하루살이처럼 순식간에 정치무대에서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또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에 대해서 김의원은 “정계에 진출하여 김대중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김영삼 씨와 이철승 씨의 당수경합 때였다”며 “당시 선생은 대학의 큰 강당과 같은 실내 연설은 할 수 있었지만 옥외연설은 금지되어 있었는데 축제 당일 나는 현역국회의원으로 배정된 자리를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드리고 내가 연설할 때가 되자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은 김대중 선생의 연설을 듣고 싶어 할 것입니다. 김대중 선생의 연설을 듣겠습니다’라며 마이크를 넘겼고, 결국 이 사건으로 군수는 해직되고 70 노인이었던 동학제 추진위원장은 옥살이를 겪었다.
이 일이 김대중 전대통령과는 더욱 친밀하게 지내는 계기가 되었고 김 전대통령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밝혔다.이후 “5공청산을 마무리 짓는 노태우 전대통령과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총재 간의 청와대 회담의 결과인 1989년 12월 15일의 대타협이 있은 후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90년 벽두에 민정, 민주, 공화 3당의 통합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회상하는 김 의원은 “3당합당은 권력장악욕에 기초한 야합이라고 생각한 평민당은 의원총사퇴와 즉각적인 총선실시를 당론으로 정하고 대여투쟁에 돌입, 당시 나는 이와 관련해 평민당 원내총무직을 사임하고 김대중 총재 정치담당특보로 있으면서 정치분야 대정부질문에 나서게 됐다”고 언급했다.그리고 이때 “이기택, 김정길, 노무현, 장석화 의원 등 3당합당을 반대한 통일민주당 인사들과 박찬종, 이철 의원 등 무소속 인사들은 독자적인 제2야당인 민주당을 출범시켰다”고 말했다.
특히 “16대 대통령 선거 결과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자 온 국민은 21세기에 선출된 첫 대통령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는 그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정치권도 이를 보조해줄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했고 새천년민주당도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2002년 12월 31일 개혁특위 위원 30명을 확정하고 본격적인 당 쇄신에 착수, 국민참여통합신당 주비위원회를 만들었고 10월 13일 역사상 처음으로 발기인대회를 개최하여 창당작업을 본격화했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밝혔다.그리나 열린우리당의 초대 의장직을 맡았던 김의원은 서해종건에서 불법 대선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으로 인해 검찰조사를 받는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범죄혐의가 입증되지 않는다는 검찰 발표로 이 위기를 무사히 넘겼고, 지난 4·15 총선에서도 전북 정읍에서 한솥밥을 먹던 민주당 윤철상 전 의원과 당의 명운을 걸고 대결을 벌여 17대 국회에 무난히 입성해 ‘국회의장 후보 0순위’에 올랐다.사실 김 의원은 노 대통령의 ‘정치적 스승’으로 불린다. 1996년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시절부터 함께 해 온 두 사람은 97년 국민회의 합류 과정에서 행보를 달리할 뻔했다. 당시 독자적으로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려던 노 대통령을 찾아가 간곡히 만류하고 DJ캠프로 합류시킨 이가 김 의원이다. 노 대통령은 이후 김 의원의 정치적 결정을 따르기로 약속했다고 한다.국회의장에 선출될 경우 김 의원 역할은 대통령의 정치적 스승이라는 ‘조언자’에서 현실적인 ‘조력자’로 바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최근 우리당 지도부와 청와대를 찾아 만찬하며 노 대통령에게 ‘여야 대화의 복원’을 강조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대통령이 야당 의원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며 야당 의원과의 ‘스킨십’도 촉구했다. 당적을 떠나 여야를 아우르는 국회의장직은 노 대통령의 대화정치를 돕기에 최적의 자리로 평가된다.
부인 윤정심 여사와의 사이에 1남을 두고 있는 김 의원은 ▲전주고등학교 졸업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제 10대~17대 국회의원 ▲평화민주당 원내총무 ▲김대중 총재 정치특보 ▲국회 교육체육청소년위원회 위원장 ▲국제의회연맹(IPU)평양총회 한국대표 ▲민주당 사무총장 ▲민주당 수석부총재 ▲5·18광주특위 위원장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국민통합추진회의 상임대표 ▲노사정위원회 위원장 ▲새정치국민회의 상임고문 ▲제16대 국회의원(통외통,교육위 위원)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정치고문 ▲새천년민주당 개혁특위 위원장 ▲국민통합신당창당 주비위원회 위원장 ▲열린우리당 상임의장 ▲노무현대통령 정치특보 ▲열린우리당 최고상임고문 등을 역임했다.
김종민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