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제보자들과의 친분을 강조하면서 “당사자중 한사람으로부터 10·26당시 김재규 전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대통령을 시해하며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토로했듯 우리도 ‘구사의 심정으로 정몽구 부자의 심장을 쏘았다’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제보자들은 이번 현대차 사건을 일종의 ‘거사’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이렇듯 내부 제보자가 한 사람도 아니고 여럿이라는 점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 크다. 검찰주변에서도 내부 제보자의 도움이 없다면 초스피드로 수사가 진행될 수 없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는 분위기이다. 실제로 현대 글로비스의 금고 비밀번호는 일주일에 한 번씩 바뀌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검찰이 미리 비밀번호를 파악해 증거물을 압수한 것은 제보자의 신분이 최소한 사장급 이상이며 현대차의 회사 기밀을 깊숙이 파악하고 있는 인물이란 사실을 입증해주는 단적인 사례이다.이로 인해 대검 중수부(박영수 검사장)는 김재록에 대한 수사가 본류(本流)이고, 현대그룹 부분은 지류(支流)라고 말했지만, 본류와 지류가 바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국면이 전환되고 있다.
검찰은 현대 본사를 압수수색한데 이어 정몽구 그룹 회장실(실패)과 정의선 기아차 사장실을 수색했으며, 이주은(구속, 글로비스 사장), 채양기(현대차 그룹기획총괄본부장), 이정대(재경본부장) 등 핵심 관련자와 실무자들을 불러 강도 높은 수사를 하고 있다. 이렇듯 현재 검찰 수사의 초점은 그룹 오너인 정몽구·정의선 부자를 향해 정조준된 상태다.한편 검찰이 현대차그룹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의 단초인 비자금 관련 정보를 내부고발자(Deep Throat)에게서 확보했다고 밝히자 현대차 그룹은 이들을 색출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내부고발자의 입장 변화에 따라 검찰 수사는 물론 향후 재판 과정에서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기 때문. 현대그룹은 정보망을 총동원, 내부고발자의 신원 파악에 나섰지만 확인이 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에서 신원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제보자 보호 차원에서 이들의 신분을 공개할 수 없지만 이들은 현대차그룹 내에서 비자금 조성 경로 뿐 아니라 사용처까지 훤히 아는 기획, 재무, 회계 등 핵심요직에서 근무한 전·현직 임원들로 전해졌다.이들은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언론 노출을 극구 피하고 있다. 때문에 이들을 잘 아는 측근 인사를 통해 현대차그룹 비자금 조성과정을 검찰에 제보하게 된 경위를 들을 수 있었다.익명을 요구한 한 인사는 “제보자들은 사적 동기보다 공익성이 강하다”면서 “현대차가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때문에 잘못된 경영 행태는 국가 경제 손실로 이어진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야 한다. 현대차는 정몽구 회장 일가의 제왕적 경영 행태가 문제이다. 잘못되어 가고 있음에도 제동을 걸 제어 장치가 없다. 현대차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공하기 위해선 오너 경영을 탈피하고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제보의 의미를 부여했다.
수사초첨 정몽구 일가로 좁혀져
지난 3월 26일 현대차그룹에 대한 전격적 압수수색을 통해 현대차의 현금흐름과 비자금 조성경로 등 비리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핵심 증거인 비자금 장부를 찾아낸 검찰은 수사 초점을 정몽구·정의선 부자를 향해 점점 좁혀가고 있다.글로비스는 비자금을 분식회계를 통해 조성했다. 글로비스의 비자금은 현재 확인된 것만 68억8,000만원(영장 기재액수)+50억원(비밀금고 보관액수)등 120억원 수준.글로비스는 국내 운수 하청업체 Y사 명의로 가짜 매입 세금계산서를 발행하는 수법으로 22억원의 비자금을 만들었다. 이는 하청기업을 이용하는 가장 고전적인 비자금 조성 방법이다.
비자금 용처 압박 수사
채동욱 대검 수사기획관은 지난 3월 30일 정례 브리핑에서 “현대차그룹 수사를 벌여놓은 만큼 김씨가 로비한 다른 기업에 대한 수사 일정은 계획보다 조금 늦어질 것”이라고 전제한 뒤 “글로비스 비자금 수사이후에는 지난 26일 글로비스와 함께 압수 수색한 현대 오토넷이 조성한 비자금을 수사하겠다”고 밝혔다.대검 중수부는 현대차 비자금 수사에 전력투구하기 위해 수사검사 상당수를 추가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이에 따라 현대차그룹 비자금 규모는 지금까지 알려진 120여억원에서 훨씬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검찰은 정몽구·정의선 부자가 최대주주로 있는 글로비스와 현대 오토넷의 비자금 조성 경위를 캐는데 수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주은 글로비스 사장과 채양기 기획총괄사장을 비롯, 이 모 부사장, 정 모 상무, 황 모 상무 등 재무통들이 연일 수사팀에 불려와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있다. 검찰은 이들을 상대로 비자금을 조성해 본사로 보내도록 지시한 라인과 집행 라인을 집중 추궁하고 있다.더욱이 검찰은 글로비스가 현대차의 아킬레스건인 후계구도와 직접 연관돼 있다는 점을 들어 압박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검찰은 현대차 후계 구도가 수사대상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현대차그룹에선 안심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용처가 밝혀지면 경우에 따라 검찰의 칼날이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사장을 직접 겨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검찰은 실제로 현대차 본사 압수수색과정에서 정사장의 집무실을 압수수색하며 개인 컴퓨터를 가져와 정밀 분석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내부고발자가 조타수 역할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 배경에는 내부고발자들의 역할이 컸다는 게 검찰주변 이야기이다. 내부고발자들은 현대차의 현금흐름 및 비자금 조성경로, 사용처 등을 알만한 위치에 있던 정몽구·정의선 오너일가의 최측근 전·현직 임원들로 검찰수사의 ‘조타수’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차그룹 안팎에선 지난 1년 사이 8명의 사장급 임원이 물러나는 등 정몽구 회장의 ‘럭비공 같은 인사’가 이번 사태를 불렀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때문에 제보자가 최근 인사에서 물러난 고위 임원일 것이라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검찰수사관들이 글로비스 본사를 압수수색할 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내부 구조를 훤히 알고 있었고 사장실 옆 후미진 장소에 벽지로 덮인 벽안에 숨겨진 비밀금고를 단박에 찾아내고, 핵심부서의 자료만을 압수한 점 등을 들어 고위 임원출신의 제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검찰은 압수수색하기 전에 현대차와 글로비스의 내부 비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비자금 조성 경로 뿐 아니라 비자금 사용처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본지가 파악한 내부고발자는 전·현직 사장급 임원으로 정몽구 회장의 인사 스타일에 강한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이들은 현대차가 글로벌 경영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에 오너일가의 제왕적 스타일의 시정을 바란 것으로 전해진다.때문에 이들은 현대차 그룹의 해체로까지 사태가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실제로 현대차 그룹은 정몽구 회장의 ‘럭비공식 인사’ 때문에 경영자들이 책임 경영을 못하고 항상 인사 불안감에 떨고 있다. 정 회장이 워낙 수시로 인사를 하다 보니 연중 내내 예측 불가능한 인사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에만 부사장급 이상 사장단 인사를 10여차례 단행하는 등 최근 2년여 동안 거의 매달 주요 경영진에 대한 인사를 실시했다. 여기에 다른 계열사와 임원 인사까지 포함하면 현대·기아차그룹 인사의 횟수와 규모는 더욱 늘어난다.수십조원의 매출구조를 가진 그룹이 한 달에 한번 꼴로 경영 일선을 책임진 사장단을 갈아치우는 것은 자동차 산업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몹시 이례적이라는 게 재계의 평가다.이로 인해 현대차그룹에서는 불과 1년여만에 부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초고속 승진하는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일신상의 이유라는 명목으로 갑작스레 사임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그룹 계열사 중 한 곳은 지난해 초 3개월 동안 세 차례나 대표이사가 바뀌는 일도 있었다.이와 관련, 현대차 측은 “현장경영을 중시하는 정 회장 특유의 인사 스타일로 자신감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인사”라고 설명한다.그러나 재계 안팎에서는 이 같은 ‘깜짝 인사’에 대한 우려감이 커지고 있다. 국내 재계 2위의 대기업을 이끌고 있는 최고경영자(CEO)들의 인사라면 조직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예측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 때문.
오너일가 소환 가능성 커
검찰의 수사가 정몽구·정의선 오너일가를 겨냥하는 것으로 나타나자 현대차그룹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현대차 임직원들은 수사가 어디까지 확대될지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최대의 위기”라는 말로 불안감을 표시했다. 정몽구 회장도 지난달 27일 이후 집무실을 비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정 회장은 주요 임원들과 따로 만나 검찰 수사에 대해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검찰 수사결과 글로비스가 그룹 로비자금의 출처로 밝혀지고 오너 일원이 구속되는 초유의 돌발변수가 등장하면 현대차그룹의 후계구도 시나리오는 상당기간 지체되거나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해질 것이라는 게 재계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조경호 news2002@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