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처조카인 고 이한영씨는 지난 82년 남한에 귀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국정원)는 이씨와 김정일과의 특수한 신분관계를 고려, 이씨에 대해 비공개로 정착을 추진했다. 신변안전 등을 이유로 한 안기부의 비공개 정착 정책에 따라 이씨는 성형수술을 하고 이름을 바꾼 뒤 국내에 정착했다. 안기부의 지원 하에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KBS 사회교육방송 노어반 프로듀서로 취직까지 한 이씨는 1988년 12월 대학 후배의 소개로 CF모델 출신 김모(35)씨를 만나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사업에 뜻이 많았던 이씨는 각종 사업에 손을 대게 되는데 자본주의 구조에 익숙지 않은 그는 하는 사업마다 번번이 고배의 쓴 잔을 마시고 만다. KBS를 나와 주택조합 건축에 손을 대 한때 24억원의 거금을 만지기도 했지만, 93년 3월 10억원대 조합비 횡령사건으로 93년도에는 서울구치소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이씨는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94년 2심에서 무죄로 석방된 그는 민사소송에서 패소, 방배동 집 등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94년 5월 분당으로 전세를 얻어 이사했다. 이후 약 1년간은 부산에 내려가 러시아인들을 상대로 무역을 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잇따른 사업의 실패로 이씨의 삶은 고난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이씨에게 안기부는 제2의 삶을 살게 해준 부모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안기부마저 95년 10월 “우리는 할 일을 다했으니 더 이상 당신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통보, 이씨로부터 완전히 손을 뗐다. 벼랑끝에 몰린 이씨는 이때부터 각 언론사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증언 및 원고를 게재해달라고 요청, 그에게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그가 왜 언론사를 찾아가 자신을 노출시킬 생각을 하게 됐는지 구체적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안기부의 보호그늘이 사라지는데 대해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막연하게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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